4. 쓴 뿌리의 치유 : (생명과) : 용납, 용서편
“ …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마 18:18)
진정한 용서는 세상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위력을 지녔습니다. 구체적으로 근본 쓴 뿌리가 뽑히고 완전 치유되려면 필수적으로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상처의 원인이 피해자의 입장인 경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가해자에 대해 꼬부라져 있는 용납 못하는 타오르는 분노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해 주옵시고”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기 이전에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들의 죄를 먼저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실까요? 억울하고 분해서 속 상해 죽을 지경인데, 하나님은 편애하여 상대방편을 드시는 것일까요? 나보다 저를 더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나는 피해자라고 떠들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보시면 자신의 잘못이 더 큰 가해자일 수도 있을테고요. 둘째는 누가 보아도 피해자인 경우에 처음에 당해서 상처받았고, 되뇌는 동안 오히려 처음 받은 상처보다 눈 뭉치처럼 불어난 아픈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악몽을 되뇌며 스스로 상처를 키우며 고통을 가중시키는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을 미리 아시고 막아 주시는 사랑의 예방책입니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상대방이 저지른 죄를 내가 전철을 밟는 것을 피해야합니다. “나 같은 죄인도 부지중에 얼마나 다른 이를 아프게 했을까? “ 자신의 용서받은 처지를 생각하며 용납하기 힘들더라도 자신이 쓴 마음으로 꼬부라지는 것을 막아야합니다. 내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은 가해자만을 너그러이 봐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남을 용서할 때 더 이상 나 자신이 상처가 깊어지고 나아가 복수 심리로 가해자가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또한 이를 통해 주님께 한 발 더 가까이 가게되며,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높임을 받으시는 영광까지 덤으로 얻게 됩니다. 나아가 자신이 치유 받은 후 적극적으로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도와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는 치유 받은 치유 중매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용서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과거의 나쁜 기억을 되뇌일 때마다 더욱 상처가 깊어진다면, 반면에 용서하면 매여있는 나쁜 기억이 지워져 아픈 상처에서 풀려져 자유케 됩니다. 나쁜 기억이 되살아나려 할 때마다 피묻은 십자가의 사랑을 대신 깊히 생각하여 간절히 성령께 의지하여 계속 죄로 달려가는 생각을 끊어버립니다. 떨쳐 버리려해도 나쁜 기억들은 더욱 생생히 떠오릅니다. 되씹는 기억 속의 상처가 더 무섭습니다. 저도 주님 말씀대로 용서하노라고 선포하며 비통한 마음을 잊게 해달라고 얼마나 매달렸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가증스런 입술의 용서였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입술의 고백이 사실로 바꿨습니다.입으로 표현하면 마음으로 막연히 생각하던 것이 사실로 구체화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의 확신을 하게되는 기본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분하고 억울해도 기억을 스스로 되씹는 것을 우선 멈추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이에게도 백해 무익한 이야기를 쏟아 놓는 것도 목숨을 걸고라도 자제해야합니다. 말은 해야 시원하고 고기는 씹을수록 맛이 난다는 속담대로 분이 가득한 대로 온 주위 사람들에게 떠들다보면, 그 횟수만큼 아픈 것이 상기되니 분한 마음을 확인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코 분한 것이 가라앉지도, 잊혀질리도 만무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남에게는 치명적인 일을 농담거리로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못된 근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한 사람 바보 만들기 잠깐이고 상관없는 남의 일 입놀리기 좋아하다 큰 코 다친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한 것을 알면 노발대발 펄펄 뛰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 뒤집어놓고 법석을 떱니다. 그로 인해 스스로 감추인 수치를 더욱 드러내고 손가락질 받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프다는 것 조금이라도 염두에 둔다면 그렇게는 못하겠지요. 아무리 자기 기준이 맞다고 자기 의를 주장해도 최종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공평히 처리하실 때 가인처럼 잘난 체해도 꼼짝할 길이 없지요.
계속 상상의 나래를 펴고 달려가는 아픈 옛 상혼이 지워지고 잊혀질 때, 묶여있는 과거의 악몽에서 놓임을 받고 새로운 오늘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꼬리를 물고 몰려오는 생각을 끊는 것이 혼자의 의지로는 사실 힘이 듭니다. 생각을 않으려면 더욱 더 미친 듯 달려드는 꼬리 무는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의 경험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모든 악몽의 기억이 녹아 없어지는 잊는 은혜를 받을 때만이 완전히 자유함이 옵니다. 저도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와 잊게를 소원하며 내놓았던 일들 하나도 예외 없이 정도의 강약에 상관없이 잊는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정말 심히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일지라도 주님의 십자가상의 고백처럼, “저들이 스스로 무슨 일하는지 모릅니다. 용서해주세요” 주님의 심정으로 저들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까지 할 수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일쯤이야 깔보고 내 인격의 힘으로 용서해 보려던 것은 영락없이 나를 비통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차 어디서 떨어진 것을 인식하고 다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 놓고 자유함을 되찾곤 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다른 이의 잘못을 되뇌지 않고,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너그러운 만큼이라도 다른 이를 덮어준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생길까요! 우리 모두 사랑에 굶주린 외로운 마음의 사냥꾼입니다. 칭찬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남을 깎아 내리지 않기만해도 좋겠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위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야 시원한 사람이 있습니다. 정작 그 책임을 맡기면 일을 전혀 감당 못하고 자기 일을 남에게 짐지웁니다. 남이 하는 것을 보면 다 시원치 않고 자기가 제일 잘할 것같이 설쳐도 책임 맡는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2차이고 자신이 드러나는 영광을 밝히는 미성숙한 이들이 앞에서 설치는 교단, 연합 모임들, 교계의 풍토... 오랜 세월 연합 사업에 관계하다 생긴 가슴에 맺힌 한입니다. 말로 만이 아닌 이익 관계를 떠나 주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로 연합하면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까! 자랑거리 하나도 없는 무 재주꾼들 모이면 쉽게 하나가 됩니다. 불똥튀는 재주 가진 잘난 무리, 사공이 많아 배가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남에게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면, 부지중에 엄지는 하나님을 향해, 나머지 세 손가락은 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각자가 자기를 비우고, 모두 주님의 뜻만을 따르고자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으며, 세워 준다면 이로부터 작은 사랑의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하겠지요. 말씀으로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기도가운데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연습 죽기로 해봅시다. 성숙한 사랑은 순간의 로맨틱한 감정이 아니라 성령 충만, 주님의 성품과 하나되는 결단의 열매입니다.
“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용서함으로서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KWMC 쓴뿌리치유 세미나 제 4부
이희녕
첫댓글 아멘
감사드립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