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소회라는 이름은 위당 정인보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이당 김은호선생의 부탁을 받은 위당선생이 해려 임상종(海旅 任尙鍾)에게 미술을 함축성 있게 표현하는 무슨 좋은 명구(名句)가 없겠냐고 물었을 때, 해려가 “공자(孔子)말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게 있지 않은가”라고 대답을 했는데 위당은 무릎을 치면서 “그것 참 좋군” 하고 찬동하여, 결국 두 분의 합작으로 후소회란 이름이 지어졌고 위당은 바로 낙청헌으로 달려가 이당선생께 좋은 이름이 나왔다며 추천했고 그 자리에서 낙점된 이름이다.
그후 후소회의 창립 사실과 전람회 계획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문화부 기자 뿐 아니라 이당 선생 댁을 오가던 평론가 등 몇 분의 중요 인사들과 몇 차례 만났는데 하루는 화신백화점 뒤쪽에 있는 ‘태서관(泰西館)’에서 기자들 외에 조선일보 문화부에 있던 홍기문(洪起文)과 안석주(安碩柱), 김규택(金奎澤), 이병각(李秉珏), 그리고 매일신문의 윤희순(尹喜淳) 등이 자리를 함께 해서 구체적인 진행 계획을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제1회 회원전은 후소회가 창립된 1936년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닷새 동안
태평로 ‘조선실업구락부(전 국회사무처 건물)에서 개최되었다.
출품한 회원은 향당 백윤문, 운포(해방후 운보로 바꿈) 김기창, 월전 장우성, 규당 한유동, 심원 조중현, 이석호, 노진식, 조용승, 취당 장덕(장운봉), 현초 이유태, 현소 정도화(정홍거) 등이고, 이당선생과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선생이 찬조 출품했다.
아래는 전시회가 끝나는 날 촬영한 사진이다.
후소회 창립 제1회 회원전 기념사진 丙子 11月 3日 (1936.11.3) 12×16 cm
(뒷줄) 정도화(정홍거), 김기창, 이유태, 조용승, 장우성 (원내는 김은호)
(앞줄) 장덕(장운봉), 백윤문, 윤명진, 박영래, 변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