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로서의 가족은 가족구성원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체계 속의 개인은 다시 전체 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성장과 분화란 가족구성원 개인 내적으로나 가족 및 대인관계에 있어서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할 과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치료에서 추구하는 건강한 가족구성원과 가족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 본래의 진실한 인간상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는 것이며, 모두 평등하고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일체가 되는 화합을 성취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엄선을 대표하는 보조선(普照禪)의 사상은 정혜쌍수(定慧雙修), 성적등지(惺寂等持), 돈오점수(頓悟漸修), 선교일치(禪敎一致)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족의 문제를 겪는 내담자에게 있어서 돈오점수, 특히 수상정혜(隨相定慧)의 수행은 매우 적절한 것이라 할 것이다. 선(禪)은 내담자는 물론 치료자의 자기실현을 돕는다. 치료자는 가족치료시에 공안선(公案禪)?지관선(止觀禪)?염불선(念佛禪) 등을 내담자와 함께 하거나 내담자에게 과제로써 제시할 수 있다. 또한 화엄경의 의미있는 구절을 내담자와 함께 나누면서 문제를 반조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화엄선을 통한 자기실현의 추구야말로 가족해체와 사회분열을 막고 나아가 인류의 파멸을 막는 적극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주요어 : 화엄선, 가족치료, 돈오점수 Ⅰ. 머리말
오늘날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생활은 보다 편리하고 풍부해지게 된 반면,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은 더욱 복잡해지게 되면서 사람간의 관계, 집단간의 관계, 국가간의 관계는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관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 내에서 역기능과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가족과 가족구성원, 가족구성원과 가족구성원간의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과의 조화가 무너지게되면, 분열된 가족이 되거나, 정체성을 잃은 가족구성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족구성원이 가족 내에서 올바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면, 그 가족 역시 사회 속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역기능적인 사회는 다시 가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현대의 가족제도는 서구문화의 급격한 도입으로 서구화되어가고 있고, 서구의 공동선을 중심으로 한 개인주의는 점점 ‘나 하나만’에 중점을 두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로 전락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나아가서 ‘내 가족만’이라고 하는 가족이기주의의 결과를 빚기도 한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한국의 이혼율은 세계 4위에 달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우리’를 강조해왔던 과거의 가족풍토가 ‘나만’을 중시하는 가족풍토로 변화되면서 겪게되는 심각한 혼란의 결과일 것이다. 부분과 전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한쪽에 치우치게 되면 가족해체와 같은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의 동일성을 강조하느라고 가족구성원의 개성과 주체성이 무시되거나, 가족구성원 개개인만 중시하고 가족이라는 전체를 무시하면 결국 가족이 붕괴되고 사회가 해체되는 중요한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건강한 가족이란 가족과 가족구성원간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가족구성원 개인의 자유와 인격이 보다 이상적으로 실현되면서도 가족이 그로 인해 희생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가족구성원의 자아실현은 가족 공동의 선에 있어서도 최선의 상태이며 가족 공동의 선이 최선으로 발휘되면 가족구성원 개인의 자아실현도 이루어지는 상태인 것이다. 안형관?전영숙(2001). 화엄불교의 육상원융과 기능적 가족. 한국동서정신과학회. 제 4권 2호 참조.
가족 내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에서 오는 대립과 부조화는 문명의 발달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치료에서 추구하는 건강한 가족구성원과 가족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 본래의 진실한 인간상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는 것이며, 모두 평등하고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일체가 되는 화합을 성취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치료를 통한 건강한 가족과 가족구성원의 성취와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의 선수행을 통해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일이야말로, 가족해체와 사회의 분열 나아가 인류의 파멸을 막는 적극적인 방법이 된다고 하겠다. 많은 학문 분야에서는 서양 학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동양의 지혜에 눈을 돌리고 있다. 특히 불교에 있어서 선은 정신치료, 상담 등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즉 수식법을 통하여 호흡을 조절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긴장을 풀고 근육이완을 돕기도 하고 지관선을 통해 자기 통찰을 돕거나, 간화선을 통해 자기실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 연구가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복잡한 인간관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활 속의 선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창조하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선 수행은 필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가족치료이론에서는, 역기능적 행동 원인이 되는 가족의 그릇된 체계를 변화시키는데 중점을 두어왔다. 그러나 내담자 혹은 내담자 가족의 역기능의 원인을 찾고 해결한다는 기존의 목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담자의 인격적 성숙을 추구하고, 내담자 가족의 조화로운 발전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으로 화엄불교의 선(禪)사상에서 그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화엄불교의 선사상을 가족치료와 연결하여 고찰하고, 화엄선에서 얻은 교훈을 가족치료에 적용하고자 한다. 다른 어떤 학문보다 체계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가족치료학이야말로 다른 학문이나 사상과의 만남에 있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할 것이다. 서양에서 발달한 가족치료이론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적용하기보다 이미 우리의 심성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 화엄의 선사상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것은, 기존의 이론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의 정서적 경험에 온전히 적용 가능한 학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도로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본 연구자는 종밀에 이어 화엄선을 이어온 보조선을 바탕으로 화엄의 선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지눌은 한국의 선을 일으켰고, 오늘날의 한국선종인 조계종의 개조로서 추앙 받고 있다. 따라서 보조선으로 불리어지는 화엄의 선사상은 오래도록 우리의 문화와 정서 속에 어우러져 개인이 가진 종교의 종류를 떠나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해진 사상임에 틀림이 없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Ⅱ. 화엄선과 보조선
화엄경은 설주인 불?보살이 먼저 삼매에 들어갔다가, 그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법을 설한다. 경에 나타난 해인삼매(海印三昧), 화엄삼매(華嚴三昧)를 비롯한 수많은 삼매는 화엄과 선, 선과 화엄이 동일하다는 회통론(會通論)으로 발전하고 있다. 규봉 종밀(圭峯 宗密, 780-841)은 선과 화엄의 철학적 전제가 일치함을 처음으로 지적한 중국불교학자이다. 심재룡(2000). 보조국사 지눌의 『원돈성불론』상석. 보조사상 제13집. 보조사상연구원. p. 148. 종밀의 교와 선의 융합을 주장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화엄선(華嚴禪)이라고 부른다. 종밀은 『원각경』에 나오는 ‘본래성불’이라는 일구(一句)에 징관(澄觀)의 사사무애법계의 성불론을 결합시켜서, 그것을 돈오점수의 돈오의 내용으로 함으로써 독자적인 본래성불론을 형성하였다. 吉津宜英(1990). 華嚴禪と 普照禪. 보조사상 4집. 보조사상연구원. p. 278 참조. 즉 본래성불을 대전제로하고 점수로써 수행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佛心)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佛語)이라고 하면서 ‘선교상자(禪敎相資)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였다. 지눌은 인도적 불교와 중국적 조도(祖道)를 타성일편(打成一片)하여 인도의 ‘원천적 불교’, 중국의 ‘분파불교’를 융합하여 한국적 ‘회통불교(會通佛敎)’를 건설한 인?중?한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긴 분 이종익(1999). 定慧結社의 思想體系. 선의 세계. p. 94. 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吉津宜英은 지눌이 연수(延壽)와 마찬가지로 선종에 입각한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종밀의 종교일체(宗敎一體)에 의한 화엄선을 중요하게 의식하고, 어떤 면에서는 비판적으로 의용(依用)하고 있다 吉津宜英(昭和 60年). 華嚴禪의 思想史的 硏究. 大東出版社 p. 354 참조. 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그를 선사라기보다 교가(敎家)라고 보았으며, 사상의 핵심은 ‘화엄선’ 성철(1993). 선문정로 - 성철스님 법어집 2집 2권. 장경각 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지눌은 어디까지나 선사이며, 교학자나 철학자가 아니며 현대적 의미의 불교학자는 더더욱 아니라 길희성(1996). 지눌 선사상의 구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 68 참조. 고 하였다. 그는 돈오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현교화 시킬 뿐 아니라, 선의 관점에서 화엄을 해석함으로써- 혹은 화엄의 관점에서 선을 해석함으로써-교를 선 안으로 끌어안았다. 같은 책. p. 92. 이러한 여러 주장들을 종합해보면, 지눌은 화엄과 선이 융합된 선교겸수(禪敎兼修) 혹은 선교일치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면서, 창조적으로 화엄선을 발전시켜나간 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눌은 『육조단경』, 『화엄경』 등을 통해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고, 하택 신회(荷澤 神會, 685-760)를 이은 규봉 종밀의 영향을 받아 선교일치, 돈오점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또한 이통현의 『화엄론』에서 영향을 받아 선교일치론을 완성하여 수행자들에게 교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으며, 한편 임제종계통의 간화선을 대표하는 대혜종고선사(1089-1163)의 『어록』에 의거하여 선수행의 길을 제시하였다. 선수행의 지적 기반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은 현존하는 그의 저서 『수심결』, 『진심직설』,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화엄론절요』,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계초심학인문』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지눌은 『화엄경』「여래출현품」의 성기관(性起觀)에 영향을 받아 선과 화엄을 회통시켜 돈오점수라는 선엄일치(禪嚴一致)적인 보조선(普照禪)을 형성 해주(1998). 화엄의 세계. 민족사. p. 341 참조. 하게 되었는데, 특히 그의 『화엄경절요서』에 보면 『화엄경』과 『화엄론』의 영향을 받아 교선일치의 사상을 갖게 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화엄경』의 「출현품」에서 ‘한 티끌이 대천경권을 함유한다’는 비유를 들고, 뒤에 종합하여 ‘여래의 지혜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의 몸 속에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한 부분에 이르러, 읽던 경전을 머리에 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 [이통현 장자가 지은 『화엄론』에] … ‘범부의 지위에서 10신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모두 스스로 범부라고 인정하고, 제 마음이 바로 부동지불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으며 ‘마음은 지혜의 그림자요 이 세계 또한 그러하다. 지혜가 깨끗하면 그림자 역시 분명하여,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섞이는 것은 마치 인드라망 경계와 같다’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읽던 책을 놓고 길게 탄식하면서,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은 교(敎)요,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禪)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이 필경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인데, 어찌하여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제각기 제가 익힌 것에 안주하며, 망령되이 논쟁함으로써 헛된 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하였다. 보조사상연구원(1989). 보조전서. pp.173-174.
지눌은 선사이면서도 화엄사상을 수용하여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려고 했던 실천적인 불교인으로서 정혜결사운동을 주창하였다. 지눌의 선은 지적이면서도 포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선이나 교에 치우치지 않고, 근기가 각각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선수행의 방법을 제시하면서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였다.
1. 수행론과 심성론 길희성은 지눌 선사상의 구조를 수행론(修行論)과 심성론(心性論)의 두 부분으로 나누면서 양자의 수행론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수행론이라면 선수행에 관계되는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성적등지문(性寂等持門)?경절문(徑截門)의 삼문을 말하고 심성론이라면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진심(眞心)의 세계 즉 깨달음을 통해 드러나는 진여(眞如) 혹은 실재(實在)의 세계에 대한 설명 길희성, 앞의 책 p. 72 참조. 이다.
1) 심성론 심(心)과 성(性)은 선(禪)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달마오성론(達磨悟性論)에서 말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禪)의 종지(宗旨)에서도 그 중요성이 잘 나타나있다. 지눌은 선(禪)이 추구하는 실재의 세계를 진심(眞心)이라 불렀다. 여기서 진(眞)은 이망(離妄)이라 하는데, 즉 헛된 것, 그릇된 것, 진실하지 않은 미망(迷妄)을 떠난 참된 것을 말한다. 그가 『진심직설』에서 진심의 다른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을 인용해보자.
보살계(菩薩戒)에서 심지(心地)라고 하였는데 온갖 선을 내기 때문이며, 『반야경』에서는 보리(菩提, bodhi)라고 하였는데 깨달음을 체(體)로 하기 때문이며, 『화엄경』에서는 법계(法界, dharmadh?tu)라고 하였는데 사물들이 서로 침투하고 포섭하기 때문이며, 『금강경』에서는 여래(如來, tath?gata)라고 하였는데 온 곳이 없기 때문이며, 『반야경』에서는 열반(涅槃, nirv?na)이라 하였는데 모든 성인들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며, 『금광명경』에서는 여여(如如, tathat?)라고 하였는데 참되고 항구하여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정명경(淨名經)』에서는 법신(法身, dharmak?ya)라 하였는데 보신(報身, sambhogak?ya)과 화신(化身, nirm?nak?ya)이 의지하기 때문이며, 『기신론』에서는 진여(眞如, tathat?)라고 하였는데 생멸이 없기 때문이며, 『원각경』에서는 총지(摠持, dh?ran?)라 하였는데 그것으로부터 공덕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며, 『승만경』에서는 여래장(如來藏, tath?gatagarbha)이라 하였는데, [여래를] 감추어 덮고 있기 때문이며, 『요의경(了義經)』에서는 원각(圓覺)이라 하였는데 어둠을 없애고 홀로 비추기 때문이다. 보조전서. p. 50.
이와 같은 다양한 많은 이름들은 동일한 궁극적 실재를 가리키는 상징들이다.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혹은 실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다름 아닌 공(空)이다. 이는 범부 중생들과 관련해서는 부처가 될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불성 혹은 여래장이며, 모든 부처로 하여금 부처가 되게 하는 부처의 본체 혹은 근거이기에 법신이라고도 부른다. 길희성, 앞의 책. p. 79 참조. 지눌은 이 불성에 대한 믿음의 공덕을 설한 『화엄경』 「현수품」의 게송 “믿음은 도의 근본 공덕의 어머니, 온갖 선근을 길러낸다”를 그의 진심직설의 첫머리에 인용하고 있다. 가족치료에 있어서 치료자는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불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치료는 자신의 불성은 물론이고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어떤 내담자도 여래의 종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믿음에서 내담자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소망을 가질 때 성공적인 치료가 가능한 것이다. 또 믿음은 치료자를 겸손하게 하고 인내하게 하며 결코 절망하지 않게 한다. 각자가 가진 마음이 고정불변의 실체라면 어떻게 슬픔에 빠진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으며 또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인가. 찬란한 광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서 어둠 속을 헤매는 내담자를 빛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불성이 없다면 어떤 힘으로도 그를 변하게 할 수 없다. 오늘날 좀더 나은 치료자의 태도를 탐구하고 치료의 온갖 방법을 개발하는 노력도 인간의 불성을 믿는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눌은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온갖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바로 망심 때문이라고 하면서, 『진심직설』에서 진심과 망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망심은 대상을 대하면 앎을 가지고 안다. 마음에 들거나 거슬리는 대상을 만나면 탐욕과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또 그 중간인 대상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킨다. 그 대상에 대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일으키면 그것은 망심임을 알 수 있다. 조사의 말씀에 ‘거슬리는 것과 마음에 드는 것이 서로 다투는 것이 마음의 병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대립시키는 것이 바로 망심이라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진심의 경우, 앎이 없이 알아 공평하고 원만히 비추므로 초목과 다르고, 미워하거나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망심과 다르다. 대상을 대하여도 [마음이] 비어있고 맑아 미워하거나 애착하지 않고, 앎이 없이 아는 것이 진심이다. 보조전서. p. 65.
진심은 성인이나 범부에 있어서도 본질상 같지만, 범부는 망령된 생각으로 사물을 인정함으로써 깨끗한 자기 성품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간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심이 나타나지 못하고, 어둠 속의 나무 그림자나 땅 속에 흐르는 샘물과 같이 그것이 있지만 다만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경에 ‘선남자여, 마치 맑고 깨끗한 마니주가 오색을 비치어 각각 방향에 따라 [색상을] 나타내면 어리석은 자들은 그 마니주에 본래 오색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같은 책. p. 54.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치 마니주에 비친 오색이 진심의 작용(作用)이라는 것을 모르고, 실제로 오색이 존재하는 것처럼 믿는다. 진심은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다(不變). 또한 성인이나 범부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우리 각자가 겪는 일상생활에서의 차별적인 조건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하게 된다(隨緣). 우리의 삶을 떠나 따로 진심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눌은 『정혜결사문』의 시작에서 ‘땅으로 인해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의지하여 일어선다’고 하는 이통현의 『화엄론』의 구절을 옮기면서 땅을 떠나서 일어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비록 무명에 가리워진 망심이나 그것을 떠나 별도의 진심이 있는 것이 아니며, 가족의 문제도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이지만 그 갈등을 떠나 다른 곳에 조화와 일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정혜결사문』에서 지눌은 “한 마음이 미혹하여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중생이고 한 마음을 깨달아 한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이가 부처님” 보조전서. p. 7. 이라고 했다. 중생이 본래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부조화,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엄청난 희망을 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가족과 가족구성원의 치료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의 역기능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내담자와 가족이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게 하는 소중한 가르침인 것이다.
2) 수행론 지눌의 선사상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성적등지문(性寂等持門)?경절문(徑截門)의 수행으로 대표되고 있다. 그 중 원돈신해문은 선과 화엄이 결합된 수행문으로서 『화엄경』과 중국 이통현의 『화엄론』의 영향 하에 형성된 것이다. 종밀이 말한 돈오문은 내용적으로 원돈신해문에 해당한다. 점수문은 내용적으로 성적등지문이며, 그 과정은 성(惺)과 적(寂) 혹은 정(定)과 혜(慧)를 고르게 닦는 데 있다. 화두를 간(看)하는 간화선(看話禪)은 경절문에 해당하며, 선(禪)의 고유한 교외별전적(敎外別傳的) 세계이다. 즉 돈오가 선의 시작이라면 점수는 선의 과정, 간화선은 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돈오가 해오(解悟)적 성격을 띤 것이라면 간화선은 증오(證俉)를 성취하는 선 특유의 길 길희성. 앞의 책. p. 75 참조. 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눌의 저서인 『수심결』과 『간화결의론』 등에서 돈오와 점수, 그리고 간화선에 대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지눌은 『수심결』에서 돈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돈오라는 것은 범부가 미혹할 때, 사대(四大: 地?水?火?風)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자기의 자성(自性)이 참된 법신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된 부처인지를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세찬 물결 따라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의 바른 길로 들어가는 지시를 받아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본래의 성품을 보면 이 성품에는 본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의 성품이 원래 스스로 갖추어져 곧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돈오라고 한다. 보조전서. p. 34.
위의 문장에서 보는 것과 같이 돈오는 무명에 덮여있었던 진실한 자기자신의 마음을 문득 깨달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지눌은 오(悟)를 해오(解悟)와 증오(證俉)로 나누고 있다. 해오란 이해의 주체와 객체가 일치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이해이며, 오직 내적 성찰(廻光返照)의 행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깨침의 체험 길희성. 앞의 책. p. 92. 이다. 또 지눌은 『수심결』에서 점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점수란 비록 본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를 갑자기 다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을 이루고 성태(聖胎)를 길러 오랜 뒤에 성인을 이루기 때문에 점수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어린 아기 처음 태어나는 날에 육근[眼?耳?鼻?舌?身?意] 기관이 갖추어 어른과 다름이 없지만 그러나 그 힘이 충실하지 아니하여 자못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보조전서. p. 34.
위 문장에서 보듯이 누구나 성인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 성인도 될 수 있고 범부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돈오에서 깨치는 것으로 부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온전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눌은 처음 마음을 내어 공부하는 학인들을 가르치는 글인 『계초심학인문』에서 “끝없는 과거로부터 익혀온 습관으로, 애욕과 분노와 우치가 마음을 속박하여 있으면서, 잠깐 없어지는 듯하다가 이내 다시 일어나는 것은 마치 하루거리의 학질과 같다. 그러므로 언제나 수행하는 방편과 지혜의 힘을 더하여, 통절히 그것을 단속해야할 것이다” 지눌, 김달진 역주(1988). 보조국사전서 중의 계초심학인문 p. 356. 라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수행자들이 교만에 빠지지 말고 끊임없이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는 선오후수(先悟後修), 선돈후점(先頓後漸)을 강조하면서 깨달음 전의 닦음[수(修)]과 깨달음 후의 닦음은 다르다고 하였다. “비록 [깨친] 뒤에 닦음이 있지만, 이미 먼저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청정한 것을 단박에 깨쳤기 때문에 악을 끊음에 있어서 끊되 끊음이 없으며, 선을 닦음에 있어서 닦되 닦음이 없으니, 이것이 참된 닦음이요 끊음이다.” 보조전서. p. 37. 고 하면서 깨닫기 전에 닦는 것은 참 닦음이 아니라고 한다. 지눌은 점수의 방법으로서 정(定)과 혜(慧)-혹은 성(惺)과 적(寂), 지(止)와 관(觀)-의 균형있는 닦음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정혜쌍수, 성적등지문이다. 이 때의 닦음은 오후(悟後)의 수행이므로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정혜(隨相定慧)를 구분한다. 자성정혜는 돈문상근(頓門上根)에게, 수상정혜는 점문열기(漸門劣機)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중생의 근기는 이승적인 개성의 소유자도 있고 보살적인 개성의 소유자도 있으며, 불종성적인 개성도 있어서 예리하고 둔한 차이가 다르다.” 같은 책. p. 18. 고 하였다. 즉 자성정혜란 닦음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라기 보다는 돈오에 의해 이미 자신의 현실로서 자각되는 정혜이다. 수상정혜의 정(定)은 수행자가 그때 그때 직면하는 상(相)과 사(事)로서 번뇌에 꾸준히 대처해 나가는 삼매(sam?dhi)이며, 혜(慧)는 제법의 하나 하나에 대하여 미혹됨이 없이 그 공(空)을 관하는 반야(prajn?)를 말한다. 길희성. 앞의 책. p. 104.
지눌은 『수심결』에서 자성정혜와 수상정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돈오문에도 근기가 수승한 이도 있고 근기가 열등한 이도 있어서, 한가지로 그 수행하는 길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善)하면서 선을 떠나고, 악에 대해 악을 떠나 팔풍에 움직이지 않고 세 가지 느낌이 고요한 사람은 자성정혜를 의지하여 마음대로 쌍으로 닦아, 천진하여 조작이 없으므로 동(動)이나 정(靜)이나 항상 선(禪)이니 이는 자연적인 도리를 성취한 것인데, 어찌 상(相)을 따르는 문의 다스림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먼저 깨달았다 하더라도 번뇌가 두텁고 습기가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면 생각이 일어나고 연(緣)을 만나면 상대를 지어 혼침과 산란에 빠지게 되어 공적과 영지가 항상 그러하지 못한 사람은 곧 수상정혜를 빌려 다스려야함을 잊지 말고, 혼침과 산란을 고르게 조복하여 무위에 들어가야 한다. 보조전서. pp. 41-42.
그렇지만 이렇게 다스리는 공부를 하는 근기라고 하더라도 깨달음이 없이 무조건 닦아나가는 사람과 같이 방향을 모르고 닦는 사람과는 다르다고 했다. 성품이 바로 진리요,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모르고 닦는 사람인 경우 근본적인 의심이 남아있기 때문에 열심히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과 같이 일시적인 억제가 될 뿐이라고 했다. 또 지눌은 돈오점수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화두를 통한 간화선이라는 경절문을 제시했다. 이는 진리에 들어가는 지름길로서 선문에서도 뛰어난 근기를 가진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수심결』에서 공안으로 도(道)에 드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성현들의 도에 든 인연이 명백하고 쉽고 간단하여 힘을 덜기에 방해되지 않으리니 이러한 공안으로 인하여 만일 믿음과 알음알이가 있으면 바로 옛 성현들과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가리라. 같은 책. p. 33.
지금까지 돈오, 점수, 간화선의 수행법을 살펴보았다. 돈오가 참된 자신을 자각하는 행위라면 점수는 이렇게 자각된 참된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간극을 메꾸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화두는 이 모든 것에 진정한 자유로움, 곧 무심(無心)으로 참 자아와 하나되는 비결을 제공한다. 길희성. 앞의 책. p.118. 이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사람들마다의 근기에 따라 적절한 방편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족치료에 있어서 화엄의 선사상을 적용하는 것은 치료자의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물론 내담자, 내담자 가족의 역기능 통찰 및 성장을 위한 훌륭한 방편이 될 것이다. 특히 개인의 근기에 따른 알맞은 수행을 닦아나갈 수 있도록 하는 지눌의 자상한 안내는 우리를 선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치료자와 내담자는 각자의 근기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치료자에게는 근기에 따라 간화선의 수행이 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담자와 그 가족에게는 점수 가운데서도 수상정혜의 닦음이 적절할 수 있다. 집착과 억압, 투사와 위장, 속박과 동맹으로 관계를 왜곡하면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는 내담자와 그 가족들은 아무리 치료의 계기를 만났더라도 단번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안다는 것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가족치료의 과정에서 역기능의 원인을 알고 조화로운 가족을 위한 역할과 태도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몸에 익혀 체득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비록 역기능적인 습관이라 할지라도 오랫동안 몸에 배어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그 습기를 없애고 바람직한 태도를 갖추어야하기 때문이다.
Ⅲ. 수행과 증득
1. 종밀의 수증 10단계 종밀은 깨달은 후의 수행과 증득을 10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어떤 중생이 선지식을 만나 본각?진심을 열어서 나타내 보였을 때, 숙세에서 일찍이 들었다면, 지금 깨달아 알 수 가 있다. 둘째 비지원(悲智願)-자비와 지혜 즉 부처님의 근본 성품의 두 면에 대한 서원(誓願), 다른 말로는 성불할 서원이라 할 수 있음-을 일으켜 보리를 증득할 것을 맹세한다. 세째 분에 따라서 보시?지계?인욕?정진?지관의 문을 수습하고 믿음의 뿌리를 증장한다. 네째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은 이것으로부터 나타나고 일어나는 것이다. 다섯번째와 여섯번째는 법의 자성에 간탐(?貪) 등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육바라밀의 수행에 수순하여 선정과 지혜의 힘의 작용으로 아집과 법집을 함께 없앤다. 아(我)가 공한 것을 증득하는 것이 다섯번째이고, 법(法)이 공함을 증득하는 것이 여섯번째이다. 일곱번째 색(色)에 의지하는 것에 자유자재하여 일체가 다 융통하다. 여덟번째 마음에 의지함에 있어서 비추지 않는 바가 없다. 아홉번째 방편을 원만하게 구족하여 일념에 상응하되 마음이 처음에 일어남을 느꼈어도, 그 마음에 처음의 상(相)이 없이 미세한 상념도 여의니 마음은 항상 상주하여 미혹의 근원을 깨닫는 것을 구경각(究竟覺, 궁극적인 깨달음)이라 한다. 열번째 마음이 이미 무념이면 바로 시각(始覺)과의 차이가 따로 없으며, 원래부터 평등하고 동일한 깨달음인 까닭에 근본부터 진실?청정한 마음의 근원에 딱 들어맞아서 응용진사(應用塵沙)하고, 모든 미래의 끝까지 항상 법계에 머물면서 감응하고 바로 통달하는 것을 대각존(大覺尊)이라 부른다. 미혹과 개오에도 각각 10단계가 있는데, 불각의 단계는 첫째 깨달음(覺), 둘째 깨닫지 않음(不覺), 셋째 상념이 일어남(念起), 넷째 능견이 일어남(見起), 다섯째 경계가 나타남(境現), 여섯째 법을 집착함(執法), 일곱째 나라는 것에 집착함(執我), 여덟째 탐진치(貪瞋痴), 아홉째 업을 지음(造業), 열번째 업보를 받음(受報)이다. 순서가 서로 뒤바뀌어져 있는데, 이것의 첫째는 앞서의 첫째와 두번째의 것에 대하여 이것의 열번째는 앞의 것의 제 일과 합하여지고, 나머지 여덟은 모두 다 끝부터 역순으로 앞의 여덟 가지를 뒤집어 파한다. 즉 첫번째 속에 앞서의 제 일의 본각(本覺)을 깨달으면 제 이의 불각(不覺)을 뒤집는다. 두번째, 마음은 생사(生死)의 괴로움을 겁내고서 세 가지 마음을 일으켜 자기 자신을 제도하고 남도 제도함으로 말미암는 까닭에 앞서의 열번째 육도의 윤회생사고에 대하여, 세번째의 오행(五行)을 수행하는 것은 앞의 것의 아홉번째 조업(造業)을 뒤집는 것이며, 네번째의 세 가지 마음을 개발하는 것은 앞의 것을 여덟번째 이독(二毒, 진에?우치)을 뒤집는 것이다. 다섯번째 아공(我空)을 증득하면, 앞의 것의 일곱번째 아집(我執)을 뒤집고, 여섯번째의 법공(法空)을 증득하면 앞의 것의 여섯번째 법집(法執)을 뒤집는다. 일곱번째의 색자재(色自在)는 앞의 것의 다섯번째의 경계(境界)를 뒤집는다. 여덟번째 심자재(心自在)는 앞의 것의 네번째 능견상(能見相)을 뒤집으며, 아홉째의 상념(想念)을 여의는 것은 앞의 것 세번째의 상념이 일어나는 것을 뒤집는다. 따라서 열번째의 성불(成佛)은 부처님에 다른 체가 없고 다만 이것이 시각(始覺)일 뿐인 것이니, 앞의 것의 두번째 불각(不覺)을 뒤집어서 앞의 것의 첫번째의 본각(本覺)과 합치게 된다. 규봉종밀(1981). 선원제전집도서. 법륜사. 下. pp. 17-20 참조.
돈오점수를 주장한 종밀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을 열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한편, 중생들의 미혹 단계를 열 가지로 제시하여 수행의 단계를 거치며 미혹을 타파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가족치료에 있어서 내담자 자신과 그 가족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고통과 문제로 바꾸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내담자가 처한 상황을 10가지 단계에 적용하여 그것을 치료장면에서 다루어 나가며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지눌의 무심 공부 지눌은 그의 『진심직설』에서 어떻게 망심을 다스리는가의 질문에 무심법(無心法)으로 망심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무심공부를 10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깨달아 살피는 것이다(覺察) 공부 할 때에 잘못된 망념이 생기면 깨달아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둘째, 쉼(休歇)이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 일어나면 곧 쉬고, 인연을 만나면 곧 쉬는 것을 말한다. 셋째,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두는 것이다(泯心存境). 경계는 그대로 남겨두고 주관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없애는 방법이다. 넷째,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두는 것이다(泯境存心). 공부할 때 안과 밖의 모든 대상을 다 비워 고요하다고 관하고, 다만 한 마음만 두어 외로이 뛰어나고 홀로 서는 것이다. 다섯째, 마음과 대상을 없애는 것이다(泯心泯境).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대상을 비우고 다음에 안에 있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여섯째, 마음도 두고 대상도 두는 것이다(存心存境). 공부할 때 마음은 마음의 자리에 머물고, 대상은 대상의 제자리에 머물러, 때로는 마음과 대상이 맞서더라도 마음이 대상을 취하지 않고, 대상이 마음에 다가오지 않아, 각각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 저절로 망념이 생기지 않아 도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일곱째, 안팎이 모두 전체인 것이다(內外全體). 산과 강과 대지, 해와 달과 별, 안의 몸과 밖의 세상 등 모든 법이 다 진심의 본체와 같고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 덩어리로 두들겨 한 조각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덟째, 안팎이 모두 작용인 것이다(內外全用). 공부할 때에 일체 안팎의 몸과 마음과 세계의 모든 법과, 또 일체의 행동과 그 외의 쓰고 베풀고 하는 일들이 모두 진심의 묘한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홉째, 본체와 작용은 뗄 수 없음을 알고 공부하는 것이다(卽體卽用). 공부할 때에 비록 진심의 본체에 고요히 합하여 오직 한 맛으로 비어있고 고요하나 그 가운데에 신령한 밝음이 숨어 있으니 본체가 곧 작용인 것이다. 열째, 본체와 작용이 함께 뛰쳐나오는 것이다(透出體用). 공부할 때에 안과 밖을 가리지 말고 동서남북도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 때 안은 정신, 밖은 물질세계 혹은 관계의 차원에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보조전서. pp. 55-58참조.
지눌은 그의 『진심직설』에 “망념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깨달음이 늦는 것을 두려워하라” 같은 책. pp. 56. 는 조사의 말을 옮기고 있다. 망념이 생기는 것도 두려운 일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망념이 생기면 그것을 깨달아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가족치료적 관점에서 볼 때, 문제를 가지지 않은 가족은 아마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없는 가족이 되기를 바라기보다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가는 가족이 되어야할 것이다. 이를 가족치료적 관점에서 보면, 내담자와 그의 가족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비합리적인 신념이 일어나는 것을 살피고, 의존하고 집착하려는 마음을 쉬게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와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가 조화를 이루어 걸림이 없게 하며, 체(體)와 용(用)의 원만한 관계를 이해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눌의 무심 공부를 치료에 적용한다면, 문제의 통찰과 해결은 물론 내담자를 자기실현의 길로 안내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Ⅳ. 선의 치료적 의미
선(禪, Dhy?na)은 선나(禪那)의 약어로 기악(棄惡)?사유수(思惟修)?정려(靜慮)등으로 번역한다. 선은 진정한 이치를 사유하고, 생각을 고요히 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며,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즉 선은 정신을 통일하는 것이며 마음을 닦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계?정?혜 삼학(三學) 중의 하나이며, 화엄의 십바라밀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선은 반드시 불교인의 것이거나, 수행자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자기성장을 추구하고, 자기실현을 목표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비록 망심에 가리워져 있으나 진심이라는 것은 중생들에게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불성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과 남에 대한 어떤 왜곡과 투사도 없는 완전한 건강을 회복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에서 본래 자기마음이 부처요, 본래 자기의 성품이 진리(自心是佛 自性是法)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치료적 의의를 가진다고 해야할 것이다.
1. 돈오점수와 치료과정
지눌은 도(道)에 들어가는 문(門)은 많지만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돈오점수의 수행을 일관되게 강조해왔다. 『수심결』에서 “규봉선사가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깊이 밝혀 말씀하시기를 ‘얼음 연못이 전부 물인 것을 알지만 볕의 기운을 빌려야 녹고 범부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법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익히고 닦아야 한다’” 같은 책. p. 33. 고 말한다. 즉 이치는 단번에 깨닫는 것이지만 습기는 한꺼번에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가족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역기능의 원인을 알고 그 해결책을 알아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습관을 일시에 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범부는 시작도 없는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도(五道)를 헤매어 다니며 태어나고 죽음에 아상에 굳게 집착하여 망상과 전도와 무명을 익혀 오랜 성격을 이루었으니 비록 금생에 이르러 자기 성품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단박 깨쳤을지라도 이러한 옛 습성은 갑자기 제거하고 끊기 어렵다. 그러므로 거슬리거나 마음에 드는 대상을 만나서 성내고 기뻐하고 옳고 그른 것이 불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객진의 번뇌가 예전과 다름이 없으니 만약 반야로써 공과 힘을 더하지 않으면 어찌 무명을 대치하여 일체 망상을 떨쳐버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같은 책. p. 37.
가족구성원의 증상이나 가족의 역기능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몇 년, 몇 십년, 어쩌면 몇 대에 걸쳐 형성된 것일 수도 있고,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족이 가진 문제의 원인을 알고, 자신이 소중한 인격체(불성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오래되어 습관화되고 몸에 배어버린 그릇된 행동을 고쳐나가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새티어(Satir)는 문제를 가진 가족과 가족구성원의 변화과정을 여섯 단계로 나누면서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후, 역기능에서 기능적인 상태로 이동하는 단계에서 비록 역기능이라 할지라도 익숙해진 상태를 벗어나는데는 혼돈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통합단계에 이르렀다고 해도 가족과 다른 대인관계에서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실습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현상을 확인하고 재결합할 수 있어야 새로운 현상단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지눌이 돈오점수의 수행을 주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2. 정혜쌍수와 치료방법
지눌은 혼침과 산란을 없애지 않고는 선정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면서, 정혜쌍수, 성적등지가 불법수행의 유일한 방편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법이라 할지라도 삼학에 돌아가지 않음이 없으며, 한 분의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삼학을 빌지 않고 성불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정혜결사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익진기』에 “정과 혜의 두 글자는 삼학을 별칭한 말인데, 갖추어 말하면 계정혜(戒定慧)이다. 계는 그른 것을 막고 악을 멈추게 한다는 뜻이니 이로써 삼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게 되고, 정은 진리에 합하여 산란한 마음을 수습한다는 뜻이니 이로써 능히 6욕을 뛰어나게 되며, 혜는 법을 간택하여 공을 관한다는 뜻이니 이로써 생사를 묘하게 벗어나게 되는 것으로 이것은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없앤 성인이 보살행을 하실 때 배우는 것이므로 삼학이라 한다. 같은 책. p. 13.
또 지눌은 『수심결』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만일 번뇌가 들끓거든 먼저 정문(定門)으로써 이치에 맞춰 산란을 거두어 마음이 반연(攀緣)을 따르지 않고 본래 고요함에 계합(契合)하게 하며 만일 혼침(昏沈)이 더욱 많으면 다음에는 혜문(慧門)으로써 법을 택하여 공(空)을 관하여 비추어 보아 미혹(迷惑)됨이 없이 본래 앎에 계합하게 할지니 정(定)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혜(慧)로써 무기(無記)를 다스려 동요하거나 고요한 것도 없어지고 대치하는 공력도 끝나면 경계를 대하여 생각 생각이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도에 계합하여 임의로 운전하고 쌍으로 닦아야 바야흐로 일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만일 이렇게 하면 참으로 정과 혜를 평등히 가져 맑게 불성을 본 사람이다" 같은 책. p. 40.
적적성성(寂寂惺惺)은 선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정(定)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려 고요하고 번뇌망상이 텅빈 경지이며, 혜(慧)로서 무기(無記)를 다스려 지극히 초롱초롱하고 깨어있는 경지를 말한다. 적적(寂寂)은 진리의 본체라고 하면 성성(惺惺)은 진리의 작용이며, 적적은 공적(空寂)이고 성성은 영지(靈知)이다. 따라서 성성하면서 적적하고 적적하면서 성성해야 한다. 가족의 문제에 있어서도 선정을 통해 혼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반조를 통하여 가족의 역기능적 문제의 병리적 부분을 깊이 통찰하게 되면, 모든 번뇌가 스러지고 슬기로운 지혜로서 문제극복의 능력을 얻게될 것이다.
3. 수행의 중요성 인간은 누구나 자기실현의 욕구가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의 실현인 것이다. 화엄불교는 전체와 부분의 조화로운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물론, 화엄선의 실천적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지눌은 반조(返照)의 노력도 없이 ‘내가 곧 부처’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반조란 외적인 상(相)과 색(色)에 휘둘리지 않고 빛을 돌이켜 비추어(廻光) 자기 자신의 본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며 자신의 본 성품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닫는 일이다[廻光返照]. 지눌은 도를 닦는 이들의 그 누구도 범부에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행하기 어렵다고 닦지 않는다면 다겁(多怯)이 지난다해도 더욱 어려워질 것이므로 지금 억지로라도 닦는다면 그 닦은 힘 때문에 닦기 어려운 행이 점점 어렵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다. 지눌은 『수심결』에서 “단박 깨치면 비록 부처와 같지만 여러 생의 습기가 깊은 지라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오히려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아직도 침노한다” 같은 책. p. 37. 는 대혜선사의 말을 예로 들고, 병이 들어 훌륭한 의사를 만났지만 약을 먹을 줄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 도를 구하는 사람은 용맹한 마음을 내어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정혜결사문』에서 수행을 권하는 지눌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을 닦는 사람은 스스로 굽히지도 말고 스스로 기대지도 말 것이니 기대면 마음이 자성을 지키지 않고 범부도 성인도 되어 찰라로 조작하므로 다시 떳다 가라앉는 작용에 떨어진다. 따라서 낮이나 밤이나 힘을 다하여 익혀서 성성하게 깨어 있지만 생각이 없고 적적하게 고요하지만 밝게 하여 수행의 문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같은 책. p. 20.
지눌은 입으로만 바른 이치를 말하고, 마음으로는 퇴굴심을 내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음을 경고하고 스스로 비굴하지도 스스로 높이지도 말아야 하며 겸손한 자세로 끊임없이 정진해야함을 지적하고 있다. 가족치료에 있어서 내담자를 비롯한 가족들은 스스로 문제를 의식하기도 힘들고, 그것을 받아들여 인정하는 것도 힘이 든다. 그런데 가족의 화합과 자신의 성장을 위해 겸손한 자세로 노력하는 태도는 참으로 훌륭한 자세일 것이다. 이미 익숙해진 틀을 깨고자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더구나 자기실현을 위해 정진하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자세야말로 선수행의 구도적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눌은 세월을 허송하며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열심히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모든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을 내지도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도 말며 머리에 타는 불을 구제하듯 비추고 돌아보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덧없는 세월은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명은 서쪽의 빛과 같아서 오늘은 비록 있지만 내일을 또한 보존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뜻에 두고 간절히 마음에 두어라. 같은 책. p. 43.
Ⅴ. 가족치료에서의 선의 적용
1. 가족치료장면에서의 선수행 휘태커(Whitaker)와 새티어(Satir)를 중심으로 하는 경험적 가족치료에서는 안정이 아닌 성장에 목표를 둔다. 성장이란 가족의 성장을 말함과 동시에 가족구성원의 성장을 의미한다. 휘태커는 자아성취는 가족응집력에 달려있으며 개인의 경험과 이해의 수준을 수용하는 가족의 진실한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치료에 있어서 가족과 그 구성원의 창의력과 문제해결 능력의 증진에 힘쓰고, 가족들이 그들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데 목표를 둔다. 보웬(Bowen)은 가족구성원의 분화 정도가 낮을수록 불안정하고 의존성이 커서 삼각관계를 형성하며 결국 병리적인 현상을 초래한다고 하였다. 자아분화는 가족구성원 개인 내적으로나 가족 및 대인관계에 있어서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할 과제이다. 따라서 가족체계치료를 두 단계로 나누어 먼저 가족체계 내의 스트레스와 불안의 해소에 초점을 두고 그 다음은 가족구성원 개개인의 기본적인 분화수준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체계로서의 가족은 가족구성원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체계 속의 개인은 다시 전체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마치 한 개의 그물코를 잡아 끌어올리면 그물전체가 끌려 올라오듯이 가족구성원 한 사람은 가족을 떠난 독립된 개체가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가족구성원의 성장과 가족의 성장, 가족구성원의 분화와 가족의 분화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가족구성원과 가족구성원에게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지는 가족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치료의 여러 이론에서는 내담자와 가족의 성장과 분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깊이 인식하고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그 방법적인 면에서는 구체성이 부족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을 화엄의 선사상에서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화엄선은 바로 이와 같이 가족구성원의 자기실현과 조화로운 가족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지침이 되고있다. 선(禪)수행은 치료자, 내담자, 내담자의 가족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치료자에게는 보다 더 깊은 수준의 자기성찰과 자기실현이 목표가 되겠지만, 내담자와 그 가족에게는 가족의 문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관계의 부조화에서 오는 역기능의 요소를 발견하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담자와 그 가족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가족관계를 이끌어나가며 내담자와 가족구성원 모두가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치료에 있어서 치료자의 인격적 성숙은 참으로 중요할 것이다. 치료자는 자신이 성장한 만큼 내담자와 그 가족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화엄론』에 스스로 결박을 풀지 못하면서 남의 결박을 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같은 책. p. 21. 고 하였다. 또 “이미 남을 제도하기로 원(願)을 세웠으면 먼저 정혜를 닦아야 한다. 그래서 도력이 생기면 자비의 문을 구름 펴듯이 열고 물결을 가르면서 바다를 달리는 듯 할 것이다” 같은 책. p. 22. 라고 했다. 치료자의 인격적 성숙은 어떤 이론적 바탕과 치료적 기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치료자는 내담자의 치료에 앞서서 끊임없이 자기실현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선의 적용에 있어서 치료자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내담자와 그 가족에게 치료를 위한 과제로 제시할 수 있다. 하루에 일정 시간(예를 들어 아침과 저녁에 30분씩, 물론 대상에 따라 적절한 양의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임) 참선 시간을 갖도록 하는 방법이다. 참선의 방법은 내담자 및 가족에 따라 지관 혹은 간화선의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둘째는 치료자가 내담자의 가족을 치료하는 과정 중에 함께 선수행의 시간을 갖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즉 치료시간의 시작이나 마지막(혹은 치료자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때)에 5-10분 정도 함께 참선 시간을 갖는 방법이다. 이것은 내담자와 그 가족의 문제를 지금여기에서 반조해 볼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일 것이다. 또 내담자에게 의미있는 화엄경의 구절이나 선사상을 두고 함께 나누면서 가족문제와 결부시켜 대화를 진행해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2. 선의 실제 지눌은 수행의 실제적인 방법으로 주로 대혜종고선사의 공안선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 지관과 염불을 통한 자력(自力), 타력(他力)의 방법 모두를 권장하고 있다.
이렇게 깊이 관하여 번뇌의 티끌을 잘 씻어 내면 마음이 항상 겸손하고 공경하여 교만을 멀리 여의며 번뇌를 항복하고 정혜를 힘입어서 점점 밝고 고요한 본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만일 만가지 선을 닦아 자력적인 수행을 도와줌이 없으면 잘못되고 막힐까 염려스러우니, 모름지기 삼보(三寶)께 부지런히 공양하며 대승경을 독송하고 도를 행하며 예배?참회?발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말라. 이렇게 공경하는 순후한 마음이 부처님 위신력의 가피를 입어 업장을 녹이고 선근이 물러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자력(自力)?타력(他力)의 안팎으로 서로 도와서 위없는 도를 구한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같은 책. p. 23.
법집별행록에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성불하는데 이르기까지 오직 고요하고 오직 깨어 있어서 그래서 변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도다. 지위를 따라 이름이 다르니 사무쳐 깨달은 때에는 이치(理)와 지혜(智)라 하고 발심하여 닦을 때에는 지(止)와 관(觀)이라 하여 맡겨서 행을 이루는 때에는 정(定)과 혜(慧)라 하고 번뇌가 다 없어지고 공행이 원만하여 성불한 때에는 보리와 열반이라 하거니 마땅히 알라. 발심으로부터 구경에 이르기까지 오직 적이요 오직 깨어 앎이다“ 했다. 이 글의 취지를 의지한다면 비록 이제 범부가 빛을 돌이켜 비춘다면(廻光返照) 그래서 방편을 잘 알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닦는다면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이 마음이 바로 인을 갖추고 과를 사무쳐서 변하지 않고 끊어지지 않는 것인데 다만 생소하고 익숙하며 밝고 어둡고 한 공을 따라 다를 뿐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책. p. 18.
1) 지관(止觀) 선은 돌아다니면서 하면 행선(行禪), 앉아서 하면 좌선(坐禪), 움직이면서하면 동선(動禪) 누워서 하면 와선(臥禪)이다. 선수행은 꼭 앉아서 닦는 것만이 아니고, 일상(日常)의 기거동작 어느 때든지 닦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선수행을 접하는 사람들은 선을 수행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히 하고 자기의 심성(心性)을 밝히기 위해서는 앉는 것이 가장 도움을 주므로 좌선수행을 주로 하고있다. 좌선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으로는 『좌선의(坐禪儀)』에 의하면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우선 대비심을 일으켜 큰 서원을 세우고 정교하게 삼매를 닦아 맹세코 중생을 제도하려 할지언정 자기 한 몸만을 위해서 해탈을 구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또한 모든 인연을 끊고 만사를 쉬고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음식을 적게도 많이도 먹지 말며, 잠도 적절하게 취하도록 하였다. 현각스님 엮음(1998). 선학강의 중 좌선의. 불일 출판사. pp. 176-177 참조.
지관선은 선수행의 기본으로 사마타(止-samatha)와 위빠사나(觀-vipa?yan?)의 음역이다. 지(止)는 정지한다는 뜻으로 망념을 멈추고 진리에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한 관(觀)은 진리를 달관(達觀)하는 것으로 지(智)의 별칭이다. 지(止)가 우리의 의식이 대상을 향해 작용하는 것을 바로 돌이켜 마음의 근원을 깨닫는 것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정적(靜的)인 요소를 극대화시키는 과정인 한편 관(觀)은 우리의 의식이 대상을 향해 관조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동적(動的)인 부분을 다스리는 과정을 말한다. 남악혜사, 이상섭 역(1955). 지관의 이론과 실제. 도서출판 삼양.
이는 천태종(天台宗)에서 수행의 중심으로 삼은 선(禪)이라고 할 수 있다. 천태지의(天台智?, 538-597)의 『소지관小止觀』에는 조화(調和)는 좌선을 익혀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조식(調食), 조수면(調睡眠),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조식(調食)은 음식이란 본래 몸을 부지런히 하여 수행길을 정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만일 지나치게 포식하면 숨이 급하게 차서 모든 혈관이 통하지 않아, 마음이 막혀지게 되어, 좌선하여도 생각이 안정되지 않는다. 만약 지나치게 적게 먹으면, 바로 몸은 약하게 되고, 마음이 걸려서 뜻과 생각이 고정되지 않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모두 선정을 얻는 길이 아니다. 또 더럽고 탁한 것을 먹으면,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며, 만약 몸에 좋지 않는 것을 먹으면, 바로 몸의 구성요소가 서로 뒤틀리게 만든다. 조수면(調睡眠)은 잠이라는 것은 무명이 미혹하고 덮어버리는 것이니, 이를 제멋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만일 잠자는 것이 지나치게 많으면, 거룩한 법을 수행하는 것을 그르치게 될 뿐 아니라 수행한 것을 잃게되고, 그로 인해 마음이 어둡게 되게 하고, 선근(善根)을 침몰하게 한다. 따라서 생명의 무상함을 깨달아 수면을 조절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조신(調身)은 선에 들어갈 때 몸, 호흡, 마음을 고르게 해야하는데 몸의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호흡이 거칠어지고, 따라서 마음이 곧 산란하여져 걷잡기 어려워진다. 조식(調息)은 호흡을 조절하는 것으로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이 거칠게 끊어져서는 안되고 계속 부드럽게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조심(調心) 마음을 조화시키는 것으로 혼란한 생각을 조복시켜서 졸지도 않고 온갖 딴 생각을 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즉 마음이 환하게 깨어 있는 상태이다. 김무득 역주(1990). 지관좌선법. 경서원. p. 67-84 참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주의사항으로서 먼저 장소선택에 있어서 고요하고 안전한 장소, 사람의 출입 염려가 없는 곳, 눈앞에 여러 물건이 널려있지 않은 곳, 밤에는 너무 어둡지 않고 낮에는 너무 밝지 않은 곳,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통풍 잘 되는 곳, 높은 곳은 피하고 바람이 세거나 연기, 냄새가 들어오는 곳도 피하는 것이 좋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잠이 부족하거나 극도로 피로할 때,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을 때, 배고플 때, 술을 마셨을 때는 피하는 것이 좋다. 음식은 부족한 듯하게 팔분정도로 하고 미식을 탐하지 말도록 하며 식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좌선에 들어가야 한다. 또한 의복에 있어서는 간편한 옷으로, 허리끈을 여유 있게 하고 목이 너무 덮이거나 조이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떨어졌거나 더럽거나 너무 사치스럽거나 두껍거나 너무 얇지 않은 옷을 입는 것이 좋다. 좌선은 결가부좌나 반가부좌의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가정에서 자유롭게 앉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모르겠으나, 치료장면에서는 의자에 바르게 앉아서 참선을 할 수 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리가 긴 서양사람이나 좌선을 위한 준비가 마련되지 않은 장소에서는 의자에 단정히 앉아서 명상할 수도 있다. 엉덩이를 깊숙하게 앉아 편안하게 의자등받이에 허리를 받치며 엉덩이를 될 수 있는 대로 뒤로 밀어내며 앉는다. 바쁜 현대인들이 직장생활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2) 간화(看話) 간화선은 그 이념이나 지향하는 정신에 있어서는 조사선과 같으나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간화선은 오가칠종 중에서도 임제종(臨濟宗) 계통에서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도록 지도하는 선을 말한다. 송나라 말기에 대혜종고선사가 출현하여 임제의 선풍을 크게 선양하였고 공안을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는 간화선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중기 보조 지눌이 육조단경과 대혜어록 등을 통하여 간화선을 선양하여 보조선을 형성하였으므로 해동에서의 임제종의 초조가 되었다. 채인환, 보조선과 도원선. 선의 세계. p. 115.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그저 사유하거나 사색하는 정도가 아니다. 왜 조사들이 이런 말을 했을까를 계속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덧붙이려고 하거나 그 의미를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간화선에 있어서 세 가지 요소는 첫째 대신근(大信根)으로 이 화두를 참구하면 반드시 깨닫는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둘째 대분지(大憤志)로 다른 사람은 깨닫는데 나라고 왜 깨닫지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으로 분발하는 것이다. 셋째 대의정(大疑情)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까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지눌은 그의 『간화결의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선문에 바로 뛰어 증득해 들어가는 사람은 처음에 이치와 뜻을 들어 아는 생각을 상대하지 않고, 바로 재미없는 화두만 붙들어 깨달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의 길과 뜻의 길을 알음알이로 생각하는 경계가 없으며, 또한 보고 듣고 이해하고 수행하는 등의 과정도 없다가 홀연히 화두를 대번에 한 번 깨치고 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일심의 법계가 훤하게 뚜렷이 밝아지는 것이다. 보조전서. p. 100.
그는 참선을 할 때에는 반드시 산 활구(活句)를 참구할 것을 권하며,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비밀스러운 뜻을 가리켜주는 곳은 글로 논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Ⅵ. 맺는 말
불교는 신앙만의 종교가 아니라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이다. 선(禪)사상은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앞에서 화엄과 선이 융합된 교선겸수(敎禪兼修)를 주장한 지눌의 선사상을 살펴보았다. 화엄의 선사상을 바탕으로 한 보조선의 주요 사상은 ‘정혜쌍수(定慧雙修)’, ‘성적등지(惺寂等持)', ‘돈오점수(頓悟漸修)', ‘선교일치(禪敎一致)'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지눌은 『정혜결사문』에서 정과 혜를 함께 닦을 것을 권하면서 공연히 침묵을 지키는 어리석은 선[痴禪]이나 글만 찾는 미치광이 지혜[狂慧]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는 가족의 문제를 이론적으로만 접근해 들어가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이론을 바탕으로 한 역기능적 문제의 발견과 함께, 가족구성원 모두의 분화와 성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음이 미혹하여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중생이고, 한 마음을 깨달아 한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이가 부처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구나 불성을 가진 존재로서 깨달음에 있어서 치료자와 내담자의 구분은 필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가 다르고 개성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치료자는 자기실현을 위한 수행의 차원에서, 내담자는 문제 해결과 자기성장의 차원에서 선수행을 해야할 것이다. 지눌의 돈오점수설은 가족치료에 있어서 역기능 상태에서 기능적인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가족역기능의 원인을 알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았다 하더라도, 올바른 습관을 익히고 행하여 완전히 새로운 현상단계를 이룰 때까지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법(法)에 있어서 돈(頓)이나 점(漸)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사람마다의 근기가 다르므로 돈점의 논의가 있는 것이며, 더구나 선(禪)의 수증론은 미혹에 빠져 헤매는 중생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가족의 문제를 겪는 내담자를 위한 좋은 지침이 되고있다. 점수 특히 수상정혜의 수행은 고통을 겪는 내담자와 가족들에게 매우 적절한 수행방법일 것이다. 지눌은 회통론자이다. 선과 교, 즉 선과 화엄의 회통은 물론 선과 정토의 회통까지도 주장하고 있다. 현대인은 끊임없는 분열과 대립 속에 갈등을 겪고 있다. 그것은 지구상의 여러 나라간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국가, 사회, 가정의 모습이기도 하다. 선은 단지 개인의 정신적 자유만을 추구하는 행위는 아니다. 지눌에게 사회적 책임감은 개인적 구도심 못지 않게 그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대승의 보살도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세계로부터의 자유로움 못지 않게 세계 안에 머무르는 길도 배워야 한다. 길희성. 앞의 책. p. 119. 우리는 보조선을 통한 화엄의 선사상에서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달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가족과 사회의 조화롭고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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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ying Hwaom Son to Family therapy
Ahn, Hyeong Gwan Jeon . Young Sook Catholic University of Taegu . Yeungnam University
Family as a system affects to each individual member of family and also each individual member of family affects whole system. The growth and differentiation might be a lifelong task of family members when they do their inner life and personal relationship. So we can say that the healthy family member and family, which is a objective of family therapy, is the process of seeking ‘the original face', an original truthful human, described in buddhism and the process of accomplishing a harmony which can make one body with equity and without losing one's identity. The thought of Chinul's Son representing Hwaom Son can be summarized as ‘Cultivation of Samodhi and Prajn?', ‘the path of parallel keeping of quiescence and wakefulness',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Cultivation(tonochomsu)' and ‘the harmonization or combination of S?n and Kyo'. The practice of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Cultivation(tonochomsu)', especially ‘The Characteristic-oriented Samodhi and Prajn?', may be a very appropriate treatment for the client who have problems in their family affair. Contemplation can help not only the client but also be helpful for therapist's self-realization. A therapist can practice the Hwadu Son, Chih-kuan Son and Yombul Son with the client, or give them as homeworks. And discussing meaningful paragraphs of Hwa?m-Sutra with client and doing inward illumination could be a good method. Pursuing self-realization through the Hwaom S?n might be a positive means for preventing dissolution of family, disruption of society and destruction of man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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