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2508223A5412747C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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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보라.
그럴 때 저절로 대상들이 들어올 것이다.
대상들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대상을 아는 것이 된다.
그렇게 그냥 '들어오는 대로~' '알아지는 대로~' 알기만 하라.
들어오는 대로~ 알아지는 대로~ 알아갈 때
들어오는 것에는 이미 대상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들어오는 대로가 대상이 되면 좋다.
또한
그것을 알아지는 대로 알기만 할 때
알아지는 대로에는 들어오는 대로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알아지는 대로에는 이미 들어오는 대로가 들어있기 때문에
알아지는 대로 알아만 갈 때 대상은 이미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된다.
더 이상 대상을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알고 알고.. 대상을 아는 마음.. 대상없는 마음(의식) 없다.
그저 대상일 뿐이고 마음일 뿐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19A833541274F31A)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인다.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들린다. 그냥 알기만 하면 될 뿐이다.
아는데 있어서 힘을 쓸 것도 없고, 대상을 찾을 필요도 없다.
단지 잊지 않으면 될 뿐이다. 아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잊지 않는 것이 아는 것이다.
그저 부단 없이
꾸준히 잊지 않고 알기만 할 때 알아차림이 이어질 것이다.
한 번 알 때마다 사띠사마디, 지혜가 나기 때문이다.
실은,
'알고 알고' 가 알아차림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고 알고...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때
사띠사마디가 생겨나서 알아차림의 가속도가 생겨난다.
그럴 때
보는 쪽에서부터 사띠로 볼 수 있고, 아는 마음으로 볼 수가 있다.
지켜보는 마음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지켜볼 때
보는 것에서 법의 조사와 이해가 되어 앎이 생겨난다.
집중하고 억제하고 만들어서 볼 때
힘이 들어가고 그것은 내가, 사람이 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냥 마음이.. 알아차림이.. 지혜가 일하도록 해야만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이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한다.
마음이 하는 일을 수행이라고 하며 이럴 때 법이 일한다고 한다.
마음은 제 할 일을 제가 스스로 할 뿐이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보고 알고.. 보는 마음 아는 마음.. 지켜보는 마음..
바깥 대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마음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결국
몸과 마음, 6근/경/식, 오온이 ‘나’라는 것에서 다~ 벗어나야만 된다.
마음 안에서 법이 일하도록 해야만 된다.
자기 자신의
이해에 따라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을 볼 줄 안다.
몸과 마음을
'내 것'이거나 ‘나’라고 자아동일시할 때
바깥 대상에 대하여 집착을 하지만...
그것의 자연적인 성품, 단지 마음이 일함으로 볼 때,
빠라마타-법으로 볼 수 있고 ‘법이 일함’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럴려면 뒤에서 지켜보는 마음에 지혜가 있어야만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5B54345412755205)
앞에는 함정이 있다.
볼 때,
꽃이다, 뭐다뭐다 하는 것이, 맹목적으로 앞으로만 돌진하는 경우이다.
저녁나절 날개 달린 개미가 방안의 불빛만 보고 달려들다가
유리창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마뱀 혀에 말려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마음이 있어도
그 마음을 보는 줄도 모르고.. 알 줄도 모르고.. 지켜볼 줄도 모른다.
정말로 마음을 보려거든 뒤로 물러나야만 된다.
자꾸 뒤로 물러나야만이 지켜볼 수가 있는 것이다.
발뒤꿈치를 앞에다 두고 걸어가 보라..그와 같다.
지켜볼 줄 안다면
이미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것이 된다.
물러나 있기 때문에 지켜볼 수 있고 지켜볼 줄 안다.
사띠사마디, 지혜가 있을 것 같으면 항상 뒤로 물러나서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이,
사띠사마디, 지혜가 나야만 되는데..
그것은 뒤로 물러나서 지켜볼 수 있도록..
대상으로 볼 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7C4D3B541275FA29)
그럼
어떻게 해서 사띠사마디, 지혜가 생겨나는가?
무엇보다도 견해를 바르게 하고, 사띠가 있도록 하며,
있는 사띠를 더욱 유지하면서 대상을 자꾸자꾸 알아야만 된다.
지속적으로 알아가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진다.
알고 싶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행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대상과 마음에 대하여 관심과 흥미가 있어진다.
알고 싶기 때문에
수행에 대하여 더 관심과 흥미 있어 하는 것이 사띠요,
지혜(앎)이다.
앎이 있기 때문에
수행이 더 하고 싶어하며 안 하고는 못 배긴다.
대상과 아는 마음이 항상 함께 해야만 된다.
아는 마음을 알 때라야 법의 조사에 의해 더 많은 이해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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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70D4336541276EE30)
_(2014' 봉축 부처님오신 날을 맞이하여...사사나 스님) _
첫댓글
본 카페메뉴-[워킹쥬타임]에 있는 글을
사진과 함께 새롭게 따로 분리구성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