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피천득
강의정
대학에 입학하자, 선배들로부터 피천득 교수님의 강의에 감명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기대하면서 교수님이 이제나저제나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은 기대와는 달리 마르고 머리도 빠지고 체구도 작아 다소 볼품이 없어 보였다. 이분이 바로 ‘피천득 교수님’이란 말인가? 앞자리에 앉았던 나는 주책없이 실망과 놀람의 탄성을 냈다. 그 소리를 들으셨을까 염려했다. 그 분은 머뭇거림 없이 출석을 확인한 후, 책을 펴서 몇 구절을 잔잔히 읽으며 문장의 의미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첫눈에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느꼈던 불손한 생각은 어느 사이엔가 깨끗이 사라지고 강의에 몰두했던 기억이 났다.
수필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 속 깊이 스며들어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와 교수님 강의에 심취하면서 시작됐다. 나는 수필을 쓰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시작도 못한 채, 60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 버린 것이 아쉽다. 이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 갖기를 삶의 철학으로 알려주신 그분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교수님은 다정다감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깔끔하게 감정처리를 하는 분이다. 그분은 작지만 칼칼한 음성으로 강의에 열정을 다하셨다. 간결하고 쉽게 문장의 의미를 설명해, 모든 학생들을 강의에 몰입케 하는 마력이 있었다. 강의내용의 세련미와 섬세함은 늘 우리 모두를 감탄시켰다. 그런데 문학세계에서 보여주었던 세련됨, 섬세함, 고귀함과는 달리 가정에서는 소시민으로서의 소박함을 보여 주었다. 특히 소박한 모습으로 늘 뜨개질을 하시며 차를 대접해 주던 사모님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소중히 여기는 딸 서영이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다. 어느 해인가 노래를 작곡하려는 여교수님의 작사부탁을 받고 여러 차례 만났는데, 이를 눈치 챈 딸은 아빠 책상 앞에 항상 붙여있는 “아빠, 몸조심!”이란 어구를 “아빠, 맘 조심!”이란 경고장으로 바꾸었다고 하며 서영이가 아주 깜찍하고 대견스럽다고 자랑하셨다.
학과 정원 33명중 16명이 여학생인데 편애를 해서 언제나 여학생에게는 칭찬과 배려를 했지만, 남학생에게는 냉정하셨다. 남학생이 강의에 집중하려고 앞자리에 앉아 있으면 일으키어 뒤로 보내고 여학생을 그 자리에 앉힌 적도 있었다. 아마도 남학생 보다 여학생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려 했던 것 같다.
여름방학 어느 날 여학생 몇 명이 서교동 교수님 댁을 찾아 나섰다. 따가운 햇빛아래 한 시간 가량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맸지만 ‘피천득’이란 문패를 찾을 수 없었다. 지쳐서 어느 문 앞에 앉았다가 앞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작은 나무 조각에 붓글씨로 쓴 ‘피천득’ 세 글자를 볼 수 있었다. 오랫동안 비바람에 지워져 간신히 읽을 수 있는 문패였다. 문패 때문에 집 찾기가 어려웠다고 불평을 했더니 “나는 번쩍번쩍 빛나는 돌에 이름 석 자를 적을 만큼 유명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아서 문패를 그대로 두었지.”라고 담담하게 말하셨다. 그 낡아버린 초라한 문패는 큰 의미로 다가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과장되지 않은 소박한 삶을 지키며 살아온 한 학자의 숭고한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작품 속에서 느꼈던 꾸밈없음, 솔직함, 담백함을 그 분의 삶속에서 실감하고, 작은 몸에서 나오는 거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졸업 후 각자의 삶에서 한동안 바쁘게 지내다가, 차차 자리가 잡히면서 그간 뵙지 못했던 교수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긴 세월이 흘러 서교동 주택에서 반포동 아파트로 이사하신 것도 뒤늦게 알았다. 교수님은 예전보다 왜소해지신 듯했지만 여전히 천진난만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셨다. 거실과 방 벽에 줄지어 기대어 있는 그림들도 우리를 반겨주었다. 교수님은 작품을 차례대로 보여주면서 작가의 의도를 살피고, 당신의 느낌을 말하면서 작품이해와 감상법을 차근히 알려주셨다. 인간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시와 수필로 표현하셨다.
또다시 시간이 흘렀고 교수님 미수생신이 되어서야 다시 한자리에 모여 늦게까지 기념촬영도 하고 담소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두 손을 맞잡고 긴 인사를 나누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날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미수생신 이후 선생님을 다시 뵙지 못한 채, 홀연히 2007년 5월 25일 우리 곁을 떠나셨다. 스승님을 잊을 수 없어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 예술인 묘역에 동상을 세웠고, 각종사업을 추진한지도 15년이 되었다.
이제는 내 인생에서 소중한 분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것이 마음 아프다.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그분의 말씀은 나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첫댓글 이제는 내 인생에서 소중한 분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것이 마음 아프다.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그분의 말씀은 나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