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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요한복음 11:44, 마가복음 5:41-43, 누가복음 7:15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4)
할렐루야! 오늘도 임마누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에 은혜 받을 말씀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라고 하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은 가장 극적인 삶을 경험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죽음은 그 인생의 끝이고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넌 것과 같은데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왔으니 얼마나 그 인생이 극적인 삶이 되겠습니까?
오늘 첫 번째 본문에서 이와 같은 극적인 삶을 살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가 되는 나사로입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오누이입니다. 나사로가 주님의 사랑을 지극히 받은 사실을 그 누이들도 알고 그 이웃 주민들도 모두 알았습니다. (요11:3, 5, 35-36) 그런데 주님이 그토록 사랑했던 나사로가 병이들어 고생하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가장 슬퍼한 사람은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계셨더라면 자기 오빠가 죽지 않았을터인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슬펐을 것입니다.(11:21) 그러나 주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나사로에게 너무나 극적인 새 인생의 삶을 주셨습니다. 아마 나사로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이후의 삶은 과거보다 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나사로는 육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예수 믿는 성도들은 그 영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엡2:1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본문의 나사로와 우리들은 비록 육과 영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모두 예수님으로 인하여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실로 너무나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내가 나의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인데 예수님의 피 공로로 다시 새 생명을 얻은 것을 진정으로 기뻐한다면 과거 주님이 기뻐하지 않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교회는 나오면서도 그 삶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새 생명을 얻은 새 삶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사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제는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해방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1. 나를 묶고 있는 것에서 풀어져야 합니다. (요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4)
요11:43절의 말씀을 보면 무덤속에 있는 나사로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나사로야 나오너라” 부르시므로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나사로가 사망에서 다시 산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올 때 수족이 베로 묶인채로 나왔습니다. 수족이 묶인채로 나오기 때문에 나사로의 걸음이 원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다시 그 육신이 살아났지만 그 육신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 수족의 베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건 속에서 오늘 예수 믿는 자에게 주시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은 받았는데 아직도 수족이 베로 묶인채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유가 있고 해방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복을 누리지 못하는 신자가 너무도 많습니다. 새 생명의 복을 주시고 해방의 복을 주님이 주셨는데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을 묶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받은 그 생명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하게 묶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열악한 환경, 혹은 물질, 사업, 자녀 등 많은 문제들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묶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을 자유롭게 못하게 하는 것은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아니라 내적인 것도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버리지 못한 교만, 고집, 시기, 질투, 혈기, 불순종, 무관심 등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을 묶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님의 백성들이 이런 것에서 풀어져서 자유롭게 다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묶고 있는 것에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합시다.
“나를 묶고 있는 악한 것들아 묶임을 풀고 떠나갈찌어다.”
“내 수족을 묶고 있는 모든 장애물들아 그 묶임을 풀고 떠나갈찌어다.”
“물질의 근심과 염려에 묶인 묶임을 풀고 떠나갈찌어다.”
“교만과 자존심과 고집과 게으름과 무관심에 묶인 묶임을 풀고 떠나갈찌어다.”
“가정의 불화와 분쟁을 일삼는 악한 것들아 그 묶임을 풀고 떠나갈찌어다.”
“육신의 약함과 병마로 묶고 있는 더러운 병마들아 그 묶임을 풀고 떠나갈찌어다.”
목사도 가끔 기도 중 선포기도 혹은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을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담대히 선포할 때 아멘으로 받으시고,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묵고 있는 것에 담대히 선포하여 그 묶임에서 풀어나서 진정 영적으로 자유롭게 다니기를 축복합니다.
더 나아가 이 민족에게 해방을 주셨지만 온갖 더러운 죄악과 악한 사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묶여져 있는 이 백성을 향해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김일성과 김정일 우상숭배의 더러운 귀신들에 묶여져 있는 북한정권과 북한 동포들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가 오도록 담대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선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막 5:41-42)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막 5:43)
두 번째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해방의 복을 받은 신자들이 계속 영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막5:41-4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다시 살려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소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입니다. 여기서 유의하여 볼 말씀이 있습니다. 43절을 유의해서 보십시오. 다시 살아난 소녀를 위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왜 다시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은 그 소녀가 육신적으로는 지금 심히 약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난 그 소녀가 강건하게 움직이고 활동하려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아시기 때문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죽은 자가 다시 살면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육신도 먹어야 하지만 죽었던 영이 소생한 사람도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이 다시 소생한 사람은 육신의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소생한 영의 사람이 먹을 음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죽음에서 소생한 자에게 계속 먹을 것을 공급하는 곳입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아니하면 영적 생명은 받았는데 영적활동을 못합니다.
영적활동은 무엇을 말합니까? 기도생활, 전도생활, 훈련 받는 생활, 봉사생활, 헌금생활 등입니다. 이와 같은 삶은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났다 할지라도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면 아무런 영의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아멘으로 말씀을 먹으십시오. 막5:43절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먹을 것을 주라”했습니다. 누가 줍니까? 그리고 어디가서 먹습니까?
그 먹을 것을 공급하는 곳은 슈퍼마켓도 아니고 마트도 아닙니다. 교회입니다. 그리고 주의 종 목사님들을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 받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주님의 양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의 양식을 공급함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말씀으로 살지 못하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결코 누리지 못합니다. 힘있게 움직이지 못하고 늘 비실비실 합니다.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 말씀대로 오늘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맛있게 말씀의 양식을 먹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마지막 때를 맞이해서 마지막 때에 먹을 양식을 먹여주시는 주님께 특별히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마24:44) 꿀처럼 달게 먹고 사자같이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3. 입을 열어 말을해야 합니다. (눅7: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5)
세 번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신자들이 해야 할일이 있습니다. 눅7:11-16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 속에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의 말씀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나인성 과부의 독자입니다. 남편을 잃고 독자를 의지하고 살았던 한 과부가 그 아들이 죽으므로 너무 슬퍼하는 과부를 불쌍히 보시고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한 행동을 유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과부의 아들이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왜 말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살아 났으니까 말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결코 말이 없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죄와 사망에서 어린 양 예수님의 피공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역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믿기 전에도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다시 소생한 이후에는 우리의 말이 달라졌습니다.
다시 살아난 과부의 아들이 무슨 말을 했을까요? 죽기 전의 사업이야기 했을까요? 죽기 전에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이야기 했을까요? 틀림없이 그 청년은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이야기와 주님의 은혜로 자기가 다시 산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영이 소생한 우리들은 무슨 말을 합니까?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자로서 내 입에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영적세계 경험이 없고 말씀의 세계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면 십자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이 경험되고 믿어지는 사람은 반드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옛날하고는 다른 말을 합니다.
땅의 말이 아니고 하늘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육의 세계가 아닌 영의 세계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세상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에 흥미를 잃기 시작합니다. 영적세계에 대한 말이 자꾸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망에서 다시 살은 자의 모습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지만 예수님께서 그 어미를 불쌍히 보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오늘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님이 나를 살려 주셨습니다. 나를 살려 주신 그 분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전도입니다.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심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적상태를 점검하십시오. 아직 내가 거듭나지 않았거나 사망에서 해방받지 못한 상태 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교회는 나오지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나의 신앙이 생명의 신앙으로 그리고 영적신앙으로 변화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님이 계속 주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주십니다. 생명의 주님을 완전히 내 심령 속에 모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들은 마지막 날에 입이 터져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리섞은 부자처럼 지옥가서 입이 열려 가지고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되면 절대 안됩니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눅 16:24)
“오늘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도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십자가 죽음을 경험하고 진정한 해방을 받은 백성들이 무수히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입이 열려서 주체할 수 없이 예수님에 대하여 수다를 떠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제목
1. 주님! 나를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옛 사람에 묶여 살지않고 성령에 붙들려 살기를 소원합니다. 나를 통치하여 주옵소서.
2. 주님! 내 입을 열어 주님만을 증거하며 마지막 때에 말씀을 담대히 증거하겠습니다. 하늘의 권세를 더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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