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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則 네가 바로 혜초이니라(汝是慧超)
垂示
聲前一句 千聖不傳 未曾親覲 如隔大千 設使向聲前辨得 截斷天下人舌頭 亦未是性懆漢 所以道 天不能蓋
성전일구 천성부전 미증친근 여격대천 설사향성전변득 절단천하인설두 역미시성조한 소이도 천부능개
地不能載 虛空不能容 日月不能照 無佛處獨稱尊 始較些子 其或未然 於一毫頭上透得 放大光明 七縱八橫
지부능재 허공부능용 일월부능조 무불처독칭존 시교사자 기혹미연 어일호두상투득 방대광명 칠종팔횡
於法自在自由 信手拈來 無有不是 且道 得箇什麽 如此奇特 復云 大衆會麽 從前汗馬無人識 只要重論蓋代功
어법자재자유 신수념래 무유부시 차도 득개십마 여차기특 복운 대중회마 종전한마무인식 지요중론개대공
卽今事且致 雪竇公案又作麽生 看取下文
즉금사차치 설두공안우작마생 간취하문
서문
지극한 도 또는 절대 그 자체의 말은 어떤 성인도 글이나 말로 남에게 전할 수가 없다. 이를 직접 터득하지 못했다면 끝없이 아득한 저편에 있을 뿐이다. 설령 지극한 도 또는 절대 그 자체를 터득한 바가 있어 세상 사람들의 말머리를 꽉 막아 버려도, 역시 그 사람을 영특한 사람이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극한 도란 하늘도 이를 다 덮지 못하고, 땅도 이를 다 떠받들지 못하며, 허공도 이를 다 담지 못하고, 해와 달도 이를 다 비추지 못한다. 부처도 없고 유아독존의 나도 없다고 할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뭔가 조금은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아직 멀었다. 하나의 털끝을 갖고도 우주의 묘리를 터득하고, 커다란 빛을 내뿜어, 온갖 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으며, 우주의 온갖 사물과 자유자재로 교섭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다면 그 무엇을 가져와도 또 무슨 일을 해도 모두 옳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자, 말해 보아라. 어떤 것을 얻었기에 이같이 기묘하고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옛사람이 선을 수행하며 겪은 고초를 세상 사람은 짐작도 못한다. 훌륭한 스님 앞에서 세상에 떨칠 만한 공로인가를 신중하게 평가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그만 두고라도, 여기 설두스님이 내놓은 공안의 뜻은 어떤가? 자, 이제 본문을 살펴보자.
本則
擧 僧問法眼 慧超咨和尙 如何是佛 法眼云 汝是慧超
거 승문법안 혜초자화상 여하시불 법안운 여시혜초
본문
어느 날 중 하나가 법안스님에게 물었다.
“혜초가 화상께 삼가 묻겠습니다. 부처란 본디 무엇입니까?”
법안이 대답했다.
“네가 바로 혜초이니라.”
頌
江國春風吹不起 鷓鴣啼在深花裏 三級浪高魚化龍 癡人猶戽夜塘水
강국춘풍취부기 자고제재심화리 삼급랑고어화룡 치인유호야당수
송
강남에 봄바람 산들산들
자고새는 꽃 그늘에서 우짖네
물고기 뛰어뛰어 용이 되건만
어리석은 이는 밤새 봇물만 푸네
[解釋]
우주의 참모습, 절대 그 자체, 지극한 도라는 것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으니 그 어떤 성인도 말이나 글로 전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주의 참모습, 절대 그 자체, 지극한 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인가? 지극한 도는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 있는데, 그것을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면 그것인 끝없이 아득한 저편에 있다는 것인가? 지극한 도를 다소 터득한 바가 있어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정말 지극한 도를 터득한 자인가? 지극한 도와 우주의 참모습은 한없이 넓고 커서 하늘도 이를 다 담지 못하고, 땅도 이를 다 떠안지 못하며, 해와 달도 이를 다 비추지 못한다. 그렇게 한없이 넓고 큰 지극한 도와 우주의 참모습은 알 수 없어도, 부처도 없이 조사(祖師)도 없이 유아독존(唯我獨尊) 오직 나만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비로서 그대는 그런대로 조금은 뭔가 알았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또 아직 멀었다고 한다. 하나의 털끝을 갖고도 우주의 묘리를 터득하고, 커다란 빛을 내뿜어, 온갖 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으며, 우주의 온갖 사물과 자유자재로 교섭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다면 그 무엇을 가져와도 또 무슨 일을 해도 모두 옳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도대체 지극한 도와 우주의 참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제 법안스님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혜초가 법안스님에게 부처란 본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법안스님이 “네가 혜초이니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나는 다음 몇 가지의 뜻으로 풀어본다.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신경 쓰거라.”
“네 안에 있는 것이 부처이니라.”
“네가 혜초이듯, 부처는 그저 부처일 뿐이다.”
인도 요가 수행에서는 인간을 일곱 가지의 신체로 나누고 또 이에 대응하는 챠크라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몸이라고 생각하는 물질적 신체(physical body)이고, 두 번째는 에테르체(etheric body)이며, 세 번째는 아스트랄체(astral body)이고, 네 번째는 멘탈체(mental body)이며, 다섯 번째가 영체(spiritual body)이다. 여섯 번째는 코스믹체(cosmic body)이고,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의 신체가 니르바나 샤리르(nirvana sharir)이며, 열반체(nirvana body) 또는 무체의 체(bodiless body)라고 불린다.
인간이 태어나서 최초의 7년 동안은 스툴 하리르(sthul sharir), 즉 육체만이 형성된다. 다른 여섯 가지의 신체는 씨앗의 형태로만 남아있고 성장의 잠재성은 갖고 있지만 초기단계에서는 잠들어 있다고 한다. 이 7년 동안 물질적 신체(physical body)는 지성, 감정, 욕망 등이 성장하지 않고 오직 물질적 신체만이 성장한다. 그 다음의 7년, 즉 일곱 살에서 열네 살까지는 브하와 샤리르(bhawa sharir), 에테르체(etheric body)가 성장한다. 이 7년 동안에는 감정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열네 살에서 스물한 살까지인 세 번째 7년 동안에는 수크쉬마 샤리르(sukshma sharir) 즉 아스트랄체(astral body)가 성장한다. 두 번째의 신체에서 감정이 성장하였고, 이 세 번째 신체에서는 이성과 사유, 지성이 발달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완성된 인간이 이 기간 동안 만들어 지고, 이성과 지성 및 사유능력이 발달되는 세 번째 신체는 교육과 문화, 문명의 결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세 번째 신체 이상으로는 발달하지 못하고 평생을 이 단계에서 살다가 삶을 마감하게 된다고 한다.
그 다음 스물한 살에서 스물여덟 살까지의 네 번째 7년 동안에는 마나스 샤리르(manas sharir) 즉 멘탈체(mental body)가 성장할 수 있지만 이 신체를 발달시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 네 번째 신체에서는 흔치 않은 경험이 일어난다고 한다. 최면, 텔레파시, 투시 등 그 같은 현상이 이 단계에서 일어나서 시간과 공간의 장애 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아트마 샤리르(atma sharir), 즉 영체(spiritual body)라고 불리는 다섯 번째 신체로서, 이 신체는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만일 아무 장애도 없이 자연스럽게 성장이 이루어진다면 서른 다섯 살에 이 신체가 완전히 발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요원한 일이다. 우리는 아트만(atman)을 말하지만 이 아트만은 그저 단어에 불과하다. 이 단어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우리는 아트만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아트만이 우리의 다섯 번째 신체이다. 다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해탈의 문이 열린다. 여섯 번째 신체는 브라흐마 샤리르(brahma sharir), 즉 코스믹체(cosmic body)라고 불린다. 아트만을 넘어섰을 때, 기꺼이 아트만을 잃어버릴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 여섯 번째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만일 인간이 과학적으로 자신을 계속 발달시키면 마흔두 살에 이 여섯 번째 신체가 자연스럽게 발달될 것이다. 이 여섯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은 神을 체험한다. 이 여섯 번째 신체의 차원에는 해탈의 문제조차 없다. 이 신체에 도달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that which is)과 하나가 된다.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 ; 나는 신이다.)’라는 선언이 이 차원에 속한다. 그리고 마흔두 살에는 일곱 번째 신체인 니르바나 샤리르(nirvana sharir), 즉 열반체(nirvana body)가 발달될 것이다. 이 열반체는 무체의 상태, 무형의 상태이다. 이 궁극적인 상태에서는 오직 공(空)만이 남는다. 신도 없고, 우주적 실체도 없고, 오직 공(空)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일곱 개의 신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곱 개의 챠크라(chakra)가 있다. 각 챠크라는 그에 대응하는 신체와 특수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질적 신체(physical body)에 대응하는 챠크라는 물라다르(muladhar)이다. 이것이 첫 번째 챠크라이다. 이 챠크라는 육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두 번째 신체는 감정적인 신체, 즉 에테르체(etheric body)이고 이와 연결되는 챠크라는 스와디쉬탄(swadhishthan)이라 부른다. 이 챠크라의 자연적인 잠재성은 두려움, 미움, 분노, 폭력 등 인간의 일차적인 감정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세 번째의 신체는 아스트랄체(astral body)이고 이와 연결되는 챠크라는 마니푸르(Manipur) 챠크라이다. 기본적으로 세 번째 신체는 의심과 생각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이런 속성이 변형되면 의심은 신뢰(trust)가 되고, 생각은 비베크(vivek), 즉 이해가 된다.
네 번째 차원은 멘탈체(mental body)이고 이에 대응되는 챠크라는 아나하트(anahat) 챠크라이다. 이 차원의 자연적인 성질은 상상과 꿈이다. 상상과 꿈, 이것은 마음이 항상 하는 일이다. 마음은 밤에도 꿈을 꾸고, 낮에도 꿈을 꾼다. 상상이 완전히 개발되면, 즉 상상이 극한까지 완벽하게 개발되면 이 상상은 결단력(determination), 확고한 의지가 된다. 완전히 개발된 꿈은 사이킥 비전(psychic vision)으로 전환된다. 한 인간의 꿈꾸는 능력이 완전히 발달하면 그는 눈을 감고서도 사물을 볼 수 있게 된다. 다섯 번째 신체는 영체(spiritual body)이고, 이에 해당하는 챠크라는 비슈드히(vishudhi) 챠크라이다. 앞의 네 가지 신체와 그에 상응하는 챠크라들은 이원적인 성질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신체에서는 그런 이원성이 끝난다. 이 신체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아니라 오직 하나의 가능성을 갖는다. 여기에 지복(至福)이 있다. 완벽한 깨어있음(awakening)이 있다. 자기에 대한 앎이 있다. 여섯 번째는 브라흐마 샤리르(brahma sharir), 즉 코스믹체(cosmic body)이고 이에 상응하는 챠크라는 아즈나(ajna)챠크라이다. 이 차원에는 이원성이 없다. 다섯 번째 차원에서는 지복의 경험이 강해지고, 여섯 번째 차원에서는 존재의 경험이 강해진다. 마지막 일곱 번째 차원은 니르바나 카야(nirvana kaya), 즉 열반체(nirvana body)이고, 이에 상응하는 챠크라는 사하스라르(sahasrar) 챠크라이다. 이 챠크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여섯 번째 차원에서는 존재(being)의 모든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아직 비존재(non-being)이 남아 있다. 빛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어둠이 있다. 삶이 하나의 면이라면 다른 면에는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나머지 비존재, 공(空)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존재와 비존재 둘 다 알아야만 궁극적인 진리가 밝혀진다. 존재가 완전히 알려지고 비존재도 완전히 알려져야지만 비로서 앎이 완성된다.
이상은 라즈니쉬 오쇼의 ‘기적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발췌한 글이다. 내가 일곱 가지의 신체와 이에 상응하는 챠크라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인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에 이러한 방식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인도의 요가 수행에서 사용하는 이 방식은 어느 하나 틀림이 없다. 그러나 신체를 일곱 가지 단계로 나누고, 또 그에 상응하는 챠크라를 만든 이유는 수행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라는 열반(nirvana)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을 하여야 하는데 수행의 어떤 가시적인 결과가 있어야 수행을 지속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깨달음’ 또는 열반(nirvana)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자을 위한 수행과정이며 방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하여 열반에 이르는데 50년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이러한 방법에 대하여 부정을 하지는 않지만, 그 필요성에 대하여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예로 釋迦는 고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데 6년의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 원효대사는 해골 바가지와 같이 잠을 잔 이틀 동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단 하루 만에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 예수가 죽임을 당한 나이가 33살이니 예수가 깨달음을 얻은 때는 그 보다 훨씬 전이었음이 분명하다.
인간의 일곱 가지 신체와 이에 상응하는 챠크라를 통하여 ‘깨달음’ 즉 열반(nirvana)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은 분명 맞지만, 이 단계는 다섯 단계로 줄일 수도 있고, 또는 세 단계로 줄일 수도 있다. 방법은 분명 맞지만 그 방법이 다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뇌와 이해를 하다 보면 어느 한 순간 ‘깨달음’이 나에게 불현듯 온다. 그것은 우리 마음창고 안에 가득히 쌓인 온갖 마음을 비우면 그 ‘깨달음’이 바로 나에게 찾아 온다. 깨달음을 얻는 데 50년의 세월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일곱 가지 신체와 이에 상응하는 챠크라를 통하여 ‘깨달음’ 즉 열반(nirvana)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은 전혀 권하고 싶지가 않다. 이 수행방법으로 ‘깨달음’ 즉 열반(nirvana)에 이르는 사람도 극소수라고 하고, ‘깨달음’에 이를지 또는 이르지 못할지도 모르는 불확실성에 50년을 허비하느니 하루 아침에 ‘깨달음’을 얻어 같은 열반(nirvana)의 지복과 환희를 느끼는 것이 더 났지 않겠는가?
道, 열반, 성령, 法(無), 지혜, 하나님, 神 등으로 표현되는 ‘깨달음’은 곧 우리의 삶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극한 행복의 삶을 사는 것이 곧 ‘깨달음’의 목적이다. 산속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고자 50년을 허비하는 구도자가 되어서 무엇 하겠는가? 비록 ‘깨달음’을 얻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 ‘깨달음’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이 아름다운 사람들과 어울려 멋지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 산속에서 구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다. 50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수행을 하여 얻는 것도 ‘깨달음’이지만, 온 세상에 도처에 널려 있는 것도 또한 ‘깨달음’이다. 우리가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우리 마음의 속성을 이해하면 길 바닥에 널린 개똥을 보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난 산 속에서 고행하며,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구도자를 미친 놈들이라 부른다.
‘깨달음’은 온전히 나의 문제이다. 그 어떤 누구도 나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내가 온전히 바로 서면 세상도 나에게 온전히 바로 선다. 내가 없으면 세상은 나에게 없다. 내가 있어야 비로서 세상은 나에게 존재한다. 내가 온전히 바로 서지 못하면 세상이 나에게 온전할 수가 없다. 내가 온전히 바로 서면 세상 모든 것이 나에게 온전히 바로 선다. 나는 세상 속의 나가 아니라, 내가 곧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극한 도와 우주의 참모습은 어렵다고 보면 한없이 어려운 것이고, 쉽다고 보면 또한 한없이 쉬운 것이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그저 아름답기만 한데 어떤 놈은 길길이 뛰고 또 뛰어서 지극한 道를 찾기도 하지만, 또 어떤 놈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밤새도록 헤매고만 있다. 지극한 道가 다 무슨 소용 있으리? 그저 내가 이 세상 잘 살다가, 기쁘게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