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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처를 만나다
-그래엄 웸(Graeme John Webb)지음, 박영기옮김/ 말·글빛냄
십우도의 선 사상과 기독교 신앙(Riding the Gentled Ox Home)
십우도는 중국 송나라시대(1126-1279)에 린자이Rinzai파의 선승 카쿠안Kakuan이 도교의 관습에 따라 황소를 사용해 그린 열 개의 그림이다. 거기에 노래와 시, 해설을 붙인것이다.
십우도의 그림과 노래나 시들은 선불교에서 수세기에 걸쳐서 신앙인들이 신앙을 찾아나가는 깊은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다.
1.길들여지지 않았다. (Not trained yet)
들소가 성이 나서 머리를 휘저으며 날뛴다.
미친듯이 언덕을 내달린다.
안개속에서 길은 보이지 않는데, 얼마나 많이 들판을 헤매어야만 하는지...
그 누가 알랴?
2.처음으로 소를 붙잡는다.(First training)
소년이 밧줄을 걸어서 소를 잡아 코를 뚫고 끌고 간다.
소가 반항을 하지만, 소년은 몽둥이로 소를 제어한다.
황소가 제 아무리 발버둥을 치며 고집을 부려도, 소는 밧줄을 꽉 잡고 있는 주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3.소를 길들인다.(Being controlled)
소가 말을 듣기 시작하고 길들여진다.
이제 목동은 소를 부리고, 황소는 소년을 따른다.
목동이 여전히 손에 고삐를 움켜쥐고는 있지만, 소년은 더 이상 밤이나 낮이나 피곤하지 않다.
4. 돌아서서 본다.(Turning around to look)
오랜 수련으로 마침내 소가 돌아서기 시작했다.
소를 길들이자 드디어 악한 심성이 순해졌다.
들소를 길들일때는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들기 전 까지는 소의 고삐를 나무에 매어놓고 주의해 보아야 한다.
5.완전히 길들이다.(Totally tamed)
언덕 아래 시냇가 나무 밑에서 소의 고삐를 풀어준다.
더 이상 고삐에 묶어 놓을 필요가 없다.
저녁이 되면, 소가 알아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며, 소는 믿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를 것이다.
6.어려움이 없다.(No difficulty)
황소는 성정(性情)이 깨끗해져서 언덕 위 풀밭에서 쉰다.
더 이상 단련이 필요 없고, 더 이상 불복종하는 일도 없다.
이제 목동은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다.
행복에 젖어서 피리를 불어 감미로운 선율에 젖는다.
7.소를 부려서 일한다. (Now the animal is useful for work)
맑은 햇살을 받으며 시냇물은 흐르고 풀들은 그 햇빛을 받아서 더욱 푸르고 풀을 뜯던
소는 한가롭게 물을 마시며 노닐고 바위에 기대어 있는 목동은 단잠에 빠진다.
목동의 마음에는 걱정할 일이 없다. (비었다.)
8.서로 잊는다.(Forgetting each other)
흰 구름이 소를 덮어서, 황소는 하얗게 되고 목동의 마음에는 구름 한 점도 없이 맑다.
흰 구름 사이로는 달빛이 은은하게 세상을 밝힌다.
모든 사람들이 이 법을 따라서 변할 수 있고 이것이 길이다.
9. 홀로 깨우치다.(He alone is enlightened)
이제 황소는 사라지고, 목동의 마음은 비어있다.
그는 구름 위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고요한 달빛 속에서, 소년은 행복한 노래를 부르고 그곳에서 목동은 이 법의 행복한 삶을 누리네.
10. 모두 다 사라지다.(Both have disappeared)
이제 황소도 목동도 다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밝은 달빛만이 허공을 비추네.
이도를 깊이 알려면, 이 말을 주목하라.
숲속 시내가에서 백합이 향내를 내며 자라네.
- 태국 치앙마이, 왓 우몽(Wat Umong)의 벽화의 글
소, 소농경사회에서 농업과 풍요의 상징이자 숭배의 대상,
종교에서 신성시되는 동물로 생활속에서 사람과 가까워
고대 농경사회에서 소는 일을 하고 짐을 나르는 생활속에 매우 중요한 짐승이자, 농업과 풍요의 상징이다.
온순하고 유순한 동물로 짐을 부리고, 일을 부리기가 쉽다고 해서 사람과 가까이 지냈으며,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불교에서는 소는 나의 본성이고, 목동은 본래의 자아를 찾아나서는 나이다.
소를 찾아서 고삐를 매고 길들이는 것을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으로 본다. 아브라함의 종교에서 양치기가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도교에서는 소와 목동이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상징하고 전원생활의 여유를 의미했다.
그래서 편안히 소의 잔등을 타고 있는 양반의 그림이 많다.
저자인 그래엄 웹은 최근 6년 동안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의 신부로 외국인 감사성찬례(예배) 인도와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한국과 북한을 오가며 여행을 했는데 특히, 절에서 법당 밖의 벽면에서
십우도(Ox-Herding Painting)에서 기독교 신앙과 진리를 연결시키는 주제를 이끌어 냈다.
서구의 기독교적 시와 산문에 영적인 지혜와 아름다음의 조화로 종교간의 대화를 한 단계 올렸다는 평을 듣고 있는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예수회 신부의 『기독교인에 대한 선의 선물Zen Gifts to Christmas』인용 부분은 선과 기독교의 원리를 대조시키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남, 북한및 태국과 일본의 선 그리고 중국의 고문화와 인도의 고문헌에서 소 목동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제시하는데, 아시아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열정을 느끼게 한다.
십우도속의 선불교를 기독교인의 신앙순례와 연결시켜 푼다.
대조적, 상호보완적이고 융합적인 불교와 기독교의 진리는 종교간의 유익한 결과 가져올수 있어
1부에서는 십우도에 나타나는 선불교의 특성과 몇가지의 개념, 역사적 관점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이 관점을 선불교에 그치는 것이 아닌 기독교인의 신앙순례에 도움이 될것과 연결시켰다.
2부의 설교는 2005년 사순절과 부활적기간에 기독교회의 신부로서 기독교적인 방식을 성찰하면서 십우도의 이야기와 접목시킨 자전적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부록에는 불교 문화권 복음 전파에 관심을 사람들을 위한 예수 경전Jesus Sutras을 실어 흥미로움을 더한다.
저자는 불교와 기독교의 진리는 대조적인것과 상호보완적인 것도 있으며 융합적인 것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면이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고 본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두 종교의 만남은 종교적 통찰력을 심화시켰으며, 현재까지 종교간 논쟁의 뫼비우스띠와같다.
불교는 기독교보다 500년 이상이나 앞선 종교이다.
역사적 예수의 활동시기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 것처럼 역사적 부처의 활동시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불교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확실하다. 19세기 초엽 이래로 인도에서 온 불교의 전도자들이 이집트, 팔레스타인 및 시리아 지방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러한 영향이 예수의 이야기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학문적 논의가 제기되었다. 특히 일부 독일의 학자들은 불교의 사상 및 경전과 예수의 말씀 및 비유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1부-3.원형, 46~47쪽 본문내용)
부처의 가르침, 즉 불교경전과 산상수훈 내용을 비교하는 대목은 언어나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도 어떻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같은지 위의 주장에 무게를 더해준다.
다음의 구절을 비교하며 읽어보면 한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의 행위가 선하든지 악하든지 간에, 사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따른다. (우다니바르가 9:8)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컹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마태오 7:16-17)
비가 낡은 집에 스며드는 것과 같이 욕망은 산만한 정신에 스며든다.
잘 지은 집에 비가 스며들지 못하는 것과 같이 건전한 정신에는 욕망이 스며들지 못한다.(다르다파다 1:13-14)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마태오 7:24-25)
저명한 신약성서학자들 중에서 신약성서가 불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큐1과 불경의 닮은꼴에 놀라움이 있다. 이렇게 성경과 불경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두종교 간의 대화를 더욱 더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부처와 예수의 본질적인 메시지에는 원형(原形)의 양식(良識)에서 우러 나오는 유사성이 많다.
예를 들면,둘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배격한다. 그리고 존경, 자각, 성실, 사랑과 평온, 겸손과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물질적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단순한 삶, 다른 사람에게 연민의 마음을 주며 사는 삶 등 중용의 길을 주장한다.
(1부-본문 55-56쪽 참조)
기원전 272년부터 232년까지 제3대 마우리아 Mauriya왕조의 아소카 왕은 인도대륙을 거의 다 통일하여 지배하였다.
10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낸 잔혹한 군사적 승리보다 스스로의 잔인성을 인정, 참회하는 계기로 불교에 귀의, 자국민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에까지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스리랑카, 미얀마 그리고 중국과 유럽까지 포교승을 파견하기도 했다.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인 태종은 학문과 예술을 숭상했다.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 전략가, 그리고 서예가이기까지 했으며,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청나라의 강희제와도 줄곧 비교된다. 그가 다스린 시대를 정관의 치라고 했다.
특히, 그는 정치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불교,도교와 유교의 중국 3대 종교 간의 경쟁속에서 균형을 취하려 했다. 638년에는 “이(기독교의)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고 모든 피조물에게 이롭다. 그러니 이를 제국 전역에서 자유롭게 가르치도록 하라.”는 종교 간에 서로 관용하라는 칙령을 공포했다.
역사적으로 나라를 통일하고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위정자들의 정치와 종교에 대한 접근이 종교차별, 반목을 불러일으키는 현재 대한민국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고, 조물주인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참된 자아를 아는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의 시장에서 사랑하고 자비하며 생활한다.
그것은 자기도취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문화의 지배에서 탈피하라고 요구한다.
참된 자기는 비우는 것이다. 그리고 비우는 것과 비움은 선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이다.
저자가 타락과 구원의 신학에서 벗어나 참된 자아의식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저자는 더 이상 은혜와 권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크리스천으로서 자립할것을 설교한다.
십우도의 이야기는 성경의 비유와 같다.
기독교의 영적인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전통적 기독교의 틀에 갇혀버린 예수의 진면목을 이해하게 한다.
다른종교의 관점에서 신앙을 더 성숙시킬수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스즈키, 머튼, 틱 낫 한, 달라이 라마, 그리피스, 마사오 아베, 성철스님, 웨인 디스데일등의 글을 인용하여 동서양과 타 종교와의 진정한 대화를 강조한 부분은 책 전반에 걸친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적 메시지가 다르지 않음을 느낄수 있다.
첫댓글 이 글을 보며 드는 생각: 1. 저자가 "최근 6년 동안" 서울 주교좌 성당에서 봉직하셨다는데, 왜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까. 2. 대한 성공회의 '내부인'이었는데 웹 신부님의 활동 영역이 성공회 교우들 사이 화제로나마 오르내린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장대하게 남북한, 인도, 일본, 타일랜드(티베트는 없군요)까지 걸치는 범아시아 지역 불교를 아우르는데. 3. 성공회 신자는 왜 이런 저술을 못하는가. 하다 못해 옮긴이 박영기 님이라도 성공회 신자인가. (이런 질문에는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옆에서 감 내라 대추 내라 해봐야 소용없는 짓일 터이므로^^)
그래엄 웹 신부님은 뉴질랜드 성공회 출신의 신부님으로 들었습니다. 옮긴이 박영기 님은 개신교 신자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용어가 한국불교에서 쓰이는 용어가 아니고 미국식 불교발음을 바탕으로 번역해 놓아서 약간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럼 윗글은 <풍류인>님이 쓰셨군요. 잘 쓰신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쓴글은 아닙니다. 다음(Daum)에 '종교 평화'라는 블로그에서 내용을 가져오고, 제가 조금 편집을 했습니다. ^^
그래엄 웸(Graeme John Webb) 신부님의 "예수, 부처를 만나다" 책에 대하여 본 카페 "성공회 신간서적" 게시판 2010.11.6일자(No15)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네, 찾아보고 읽어보겠습니다. <성사모>가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