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는 얘기지만 소설은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 그런데 ‘이야기’를 자랑하는 장르로 소설 이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신화나 민담, 엄마 무릎 베고 듣는 ‘옛이야기’ 같은 것들이 있었다. 소설은 그런 것들과 무엇이 달라서 소설인가. 소설은 그 이야기를 ‘말’이 아닌 ‘글’로 전하는 과정에서 표현을 더 효과적으로 하고, 문장을 맺고, 문단을 나누고, 원 이야기의 순서를 바꾸고 하면서 ‘말의 이야기’가 아니라 ‘글로 구성된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이번에 두 편을 읽었다.
「어느 가을날에」는 ‘말의 이야기’가 ‘글로 구성된 이야기’로 오는 과정에 많은 부분에서 원 이야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의 글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숙명적인 관계로 성장한 ‘동혁’과 ‘영숙’의 사랑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가슴 아픈데, 그걸 ‘말’ 아닌 ‘글’로 구성될 때의 효과를 지향해야 더 소설다워질 터였다.
「새벽의 소리」(서 연)는 ‘말’이 아닌 ‘글’로서의 가치가 드러난 작품이다. 가난하지만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줄 아는 아빠가 사고를 당해 위독한 상태. 연명치료를 요구해 뒷바라지에 매진한 엄마는 지쳐 가고, 그 사이 맏이 지우는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지내는 어려움에 처했다. 지우는 이 소설의 주인공. 동시에 이른바 ‘시점인물’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는데,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약점이 이 점에서 생겨나 있다. 시점인물이 어린아이가 되면 작중 상황은 당연히 어린 아이로서의 시선에서 파악되고 묘사된다. 이때 흔히 ‘어린 아이다움’이라 말하는 ‘동심의 지위’가 유지되느냐에 따라 그것이 ‘동화적’이냐 ‘소설적’이냐가 판가름 된다. 이 소설은 시점인물인 지우로서의 내면화가 유지될 때는 ‘동화적’으로 흐른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그 내면화의 일관성이 깨질 때가 자주 생기는데, 그 깨짐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하면서 또한 그때서야 ‘소설적인’ 면모가 나타난다. 이야기를 현재적 시공간을 설정해 집약한다는 점, 작중 소재 ‘리코더’로서 상당한 상징을 부여한다는 점 등은 앞으로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믿음을 주는 요소다. 무엇보다 소설이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서사적 상황’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도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든다.
습작생에서 작가로서의 전신(轉⾝)을 보다 성숙한 작품으로 하게 할 기회를 주느냐, 아니면 이 정도에서 격려하면서 확정에 주느냐를 두고 집행부와 상의 끝에 ‘가작’으로 결정한다.
박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