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최용술 도주가 합기도를 대구에서 개관한 이후 서복섭 선생의 야와라 도장, 지한재 선생의 성무관, 서인혁 서인선의 국술원, 김무홍 선생의 신무관, 장인목 선생의 대동류, 신상철 선생의 광무관, 강무진 선생의 평무관, 송중회 선생의 송무관, 김정윤 선생의 한풀, 황덕규 선생의 비룡관, 김정수 선생의 연비관, 이면영 선생의 유심관, 나인동 선생의 인우관, 김용진 선생의 을지관, 홍순길 선생의 수도관, 원관화 선생의 원무관등 많은 유파가 우후죽순 처럼 생기고 또한 그 영향으로 많은 합기도 도장이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대구에서 최용술 도주를 중심으로 통일된 합기도 발전을 위하여 1963년 9월 2일 사단법인 대한기도회가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음으로써 합기도가 일단은 기도회 중심으로 통합하는듯 하였으나 최용술 선생과 임원들의 의견차이, 기도회 이사들의 다툼으로 1965년 이후 대한기도회를 배제하고 많은 유파 및 도장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성무관, 신무관, 국술원 등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들이 대구의 최용술 도주와 대한기도회를 이탈하여 독자적 행보가 시작되었다.
1967년 일선 실무자들의 합기도 난립성의 인식과 통합에 대한 통감으로 최용술 도주와 지한재 성무관 총재, 국술원의 서인혁 서인선 총재, 김무홍 신무관 총재 등이 합기도 통합을 위하여 서울에서 처음으로 통합 모임을 개최하였다. 그때 참석한 합기도인은 성무관 지한재 총재를 비롯하여 황덕규, 이태준, 김영환, 김용진, 명재남 등이 참석하였고 국술원에서 서인혁 서인선 총재를 비롯하여 서인석, 이정오, 장명호, 변종원, 이돈 등이 참석하였으며, 신무관에서는 김무홍 총재와 김무정 등이 참석하여 통합의 필요성을 회담의 의제로 정하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2차 모임은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참석자는 지한재 총재, 황덕규( 현 신무합기도 회장, 이태준, 김영환, 김용진, 명재남 등 여러 합기도인들이 부산을 방문하여 2차 회담을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번의 회담을 가졌으나 합기도 통합 명칭과 서열 순위 등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회담의 큰 성과는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에 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지한재 총재, 서인혁 총재, 김무홍 총재, 서인선 총재 등 참여한 사람 대부분이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고 이렇듯 모두가 너무 젊은 나이였으니 누가 누구 밑에 가야 하는 문제, 명칭문제 등 해결해야 부분들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고 오히려 얼굴만 붉히고 더욱더 사이들만 벌어지고 말았다.
1967년에서 1968년 사이에 국술원은 대한기도회와 통합하여 대의원 30여명 중에 14명의 대의원과 서인혁씨는 수석 부회장으로 추대 받았다. 성무관 지한재씨는 이름을 대한 합기도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신무관 김무홍씨는 한국합기도로 하였고 이후 김우중씨를 추대하여 대한민국 합기도로 하였다. 회장에는 김우중씨, 전무이사 김무홍, 상무이사 명재남이 중심이되어 활동하였다. 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재력가였고 한국의 저명 인사였으나 그 당시 합기도 유일의 사단법인 대한기도회를 배제하고 합기도 통합을 한다고 선전하였으니 대한기도회나 대한국술원이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렇게 서울 대구 부산을 각자 중점을 두고 활동한 각 유파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자주 생각하는데 그때 합기도 원로들이 일보씩만 양보하였으면 오늘과 같은 합기도 난립을 막을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 후회를 할때가 있다. 그때 우리들이 통합을 하였으면 합기도가 태권도 만큼 성장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후배들에게 미안한 감을 금치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