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則 매일매일이 참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
本則
擧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不問汝
十五日已後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거 운문수어운 십오일이전부문여
십오일이후도장일구래 자대운 일일시호일
본문
운문스님이 선승(禪僧)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지나간 15일 전의 일은 너희들에게
묻지 않겠다. 앞으로 15일에 대하여 무엇인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아라”
아무런 답변이 없자 운문스님이 대신 말했다.
“매일매일이 참 좋은 날이다”
頌
去卻一拈得七 上下四維無等匹
徐行踏斷流水聲 縱觀寫出飛禽跡 草茸茸 煙羃羃 空生巖畔花狼籍 彈指堪悲舜若多
거각일념득칠 상하사유무등필
서행답단류수성 종관사출비금적 초용용 연멱멱 공생암반화랑적 탄지감비순약다
莫動著 動著三十棒
막동저 동저삼십봉
송
하나를 버리니 일곱이 얻어지네
온 천지 어디에도 그만한 사람 없네
깊은 계곡 흐르는 물소리 천천히 헤치며
날아가는 새의 자취를 보는 대로 그리네
무성한 풀 낮게 드리운 구름이여
수보리 앉은 바위에 꽃잎이 흩날리네
가련하고 가련한 순야다여 꼼짝 말아라
꼼짝 만 해도 매가 30대 있으리
[解釋]
사람들은 참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일이 많아서 걱정, 돈을 많이 못 벌어서 걱정, 차가
많이 막혀서 걱정, 비가 많이 와서 걱정, 가물어서 또 걱정, 아들 걱정에 부모님 걱정 도무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갈 터인데 내가 지레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 행복한 날은
도대체 언제 오는가? 그 행복한 날이 오기는 오는가? 운문스님은
“지나간 15일 전의 일은 너희들에게 묻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다 흘러간 것이니 생각해서 무엇하고, 후회해서
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지나간 과거는 아예 깡그리 잊고 살아야 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가슴에 후회를 안고, 원한을 품고, 좋았던 추억을 그리며 살아야 그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흘러간
과거는 모두 잊어야 한다. 그 과거에 있었던 일이 나에게 교훈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지혜로써
내 몸에 남아있다. 좋은 기억이던, 나쁜 기억이던 그 어느
하나 돌이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과거에 발목 잡혀서 사는 사람이 참 많다. 그것을 운문스님이 이야기 한 것이다.
“앞으로 15일에 대하여 무엇인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아라” 과거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앞으로 있을 15일에 대하여 아무것이나 말해보라 했더니 선승(禪僧)들은 아무 대답이 없다. 선사(禪寺)는 배움과 가르침이 있고, 수행을 하는 절을 말하며, 선승(禪僧)은 배우고
수행을 하는 중을 말한다. 선승들이 운문스님의 질문에 그저 침묵만 하고 있으니 운문스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말했다. “매일매일이 참 좋은 날이다.” 참 좋은 말이다. 세상은 내가 걱정을 하던, 하지 않던 그저 잘 돌아간다. 스스로 잘 돌아간다. 그래서 自然이라 부른다. 그런 自然을 두고 온통 내가 걱정이다. 마치 인간은 걱정하러 세상에
태어난 것같이 온통 걱정뿐이다. 세상은 그저 있는 그대로인데 온통 내가 걱정이다. 세상은 어느 것 하나도 나에게 걱정을 주는 것이 없는데 온통 내가 걱정이다.
왜들 이렇게 사는가? 있는 그대로인 세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오히려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나는 황홀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매일매일이 참 좋은 날이다.” 매일매일 참 좋은 날을 우리 스스로가
매일매일 고통스러운 나날로 바꾸고 있을 뿐이다.
운문스님은 “앞으로 15일에 대하여 무엇인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아라”라고 했으나, 나는 “과거도 잊고 미래도 생각하지 않은 채 지금을 말해보아라”라고 말하겠다. 우리의 삶을 미래에 초점을 맞추면 지금을 희생하게 된다. 미래의
어떤 꿈을 위해서 지금을 참고 견디는 꼴이 된다. 그러나 미래의 어떤 꿈운 그것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것이고, 지금과 같은 각박한 환경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다.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삶은 잘못된 삶이다. 삶에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만 있다. 그 어떤 과거도, 그 어떤 미래도 현실이
아닌 허상을 뿐이다. 지금을 멋지게 살다 보면 더 멋진 미래는 스스로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 지금을 멋지게 사는 자가 어찌 미래에 멋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조금의 과거에도 얽매이지 않고, 조금의 미래에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지금을
사는 것이 바로 깨달은 자들의 삶이다. 그것이 또한 삶의 본질이다. 우리가
삶의 본질을 알면 우리의 삶은 식은 죽 먹기만큼 쉬어 진다. 깨달음과 삶의 본질은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뿐이다.
하나를 버리니 일곱이 얻어지네
하나는 절대세계의 절대를 말하고, 일곱은
상대세계의 상대를 말한다. 하나를 버린다는 말은 하나에 해당하는 절대를 깨우친다는 말도 되고, 절대에 해당하는 나를 버린다는 의미도 된다. 나를 버린다는 말은
상대세계에서 쌓였던 모든 마음(관념)을 버린다는 말이다. 모든 마음(관념)을 버린다는
말은 곧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한다. 상대세계에서 존재하는 옳고 그름 및 좋고 나쁨의 판단 기준이 사라지니
내가 곧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마음(관념)으로 세상을 살 때에는 그 일곱을 얻기 위하여 그토록 헤매고 다녔는데, 마음(관념)을 버리니 세상 일곱이 고스란히 나에게 온다. 온 천지 어디에도 그만한 사람 찾기 어려우나 마음(관념)만 버리면 누구든지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조주스님이
벽암록 제2칙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라고 말한 것이다. 세상에 돈 벌고 얻기는 힘들어도, 돈 쓰고 버리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렇게 쉬운 일을 세상 사람들은
하질 못하여, 그토록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깊은 계곡 흐르는 물소리 천천히 헤치며
날아가는 새의 자취를 보는 대로 그리네
무성한 풀 낮게 드리운 구름이여
온 세상이 나와 하나되어 세상을 즐기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순야다(舜若多)는 釋迦의 16 제자 중 한 사람인 수보리(須菩提)의 별명이라고 한다. 그런
수보리보다 몇 백 년이나 뒤에 태어난 설두스님이 송(頌)에서
가련한 순야다라고 했으니, 이는 유명한 고승인 釋迦의 제자 수보리가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가정하고
시를 읊은 것 같다. 도처의 깔린 道를 모르고 헤매고 있으니 이 가련하고 가련한 순야다야 너에게 道가
무엇인지 알게 해줄 터이니 꼼짝 말고 있어라. 조금만 움직여도 매가
30대 날아가리라. 서문에 해당하는 수시(垂示)는 그 유명한 선사(禪師)들의
고매한 말을 보충 설명하느라 원오스님이 지은 것이고, 본문에 해당하는 본칙(本則)은 유명한 선사들이 직접 남긴 말과 행동이므로 이 수시와 본칙에서
우리가 얻을 것이 많지만, 송(頌)은 각 칙에 대한 느낌을 설두스님이 시로 읊은 것이니 약간 우화적인 요소가 많다. 그래서 송(頌)의 해석에는
많은 비중을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