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이 주목한 시집|이성수
신작시
보다,는 미친 짓이다 외 1편
모든 창문은 편집증 환자다
항상 불신과 의심 가득한 어둠만 껴안고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인격 장애를 가졌다
꽃 진 마음 절여 낸 여울까지
자기 마음대로 자른다
다른 창문의 고통을 창문은 전혀 알지 못한다
가끔 환각의 빗물을 몇 날 며칠째 흘리기도 하지만
창문에서 벗어나라는 말을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은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병 걸린다, 제발
다른 것도 먹어보라 해도 편식한다
말 듣지 않는 아이다
욕망의 방아쇠
회수할 수 없는 충동의 실탄
햇살을 되쏘는 유리의 본성
보다,는 원리주의자다
어떤 창문은 구름만 먹고 구름만 토해놓는다
이런 창문이 가장 교리에 충실하다
어떤 창문은 그네를 옆에 끼고 있는데
거식증에라도 걸렸는지
먹고 뱉기를 반복하는 환자다
농담처럼 꽃 피어도
산 산
조각나지 않는 저 고집
창문은 늘 창문만 본다
내가 이 악물고 기웃거려도
나한테는 제가 보여줄 계절만 걸어두고
닫는다
내 눈알 파서 바닥에 내팽개쳐야
그나마
깨져 뒤틀린 창문에서도 떠나지 못하는 몸뚱어리
용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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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깎다가
저녁 먹고 사과를 깎다가
어둠까지 다 깎아 놓았다
하얗게 드러난 사과의 한나절
저 단단한 계절
내가 어떻게 다 도려냈을까
사과는 말하지 않았다
아프다,
저물어가는 서녘 붉은 상처
단내만 칼에 묻혀 놓았다
농익은 아픔을 견고한 단맛으로 베풀 줄 아는
사과의 생
내 손에 가을 언덕 다 벗겨 놓았다
잘 갈아놓은 먹물처럼
하얀 피가
별의 울음으로 경전을 새겨놓을 줄은 몰랐다
이 한 생 더 깊이 후비면
아직도 남아 있는 검은 봉투 속
보름달 순결도 저며놓을 수 있을까
내 죄로 더 환해진 밤이 자꾸 단단해진다
저게 달이라고,
내 입과 손이 저지른 죄
사과의 피로 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