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는 매우 독특한 영지주의 색깔을 보여주는데요. 학술적인 분석을 피하고, 큰 시야에서 요한 복음서를 훑어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이 드러납니다.
(1) "유대인들의 신"을 배척하고, 이제까지 사람들이 모르던 "새로운 신"을 내세웁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영지주의 성향이에요.
(2) 그러면서도 "gnosis"를 배척하고, 바울처럼 "믿음"을 내세웁니다.
이 두 가지 특징, 즉 "유대인들의 신"을 배척하고 "믿음"을 내세우는 것만 고려하면,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 어떤 파벌이 떠오르는가요? 넵, 이 두 가지 특징만 따지자면 마르키온파에 가까운 성향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야기의 끝이 아니에요.
(3) 요한 저자는 히브리 성서를 속속들이 잘 알고, 복음서 이야기의 곳곳에서 히브리 성서의 메아리가 울려 퍼집니다. 일부 학자들이 요한 저자를 가리켜 "유대 신비가"라고 부를 정도예요. 그러면서도 "반 유대주의" 성향입니다. 즉, 성경 해석이 매우 유대적이면서도 그 결과가 반 유대주의로 치닫는, 이를테면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특징이 요한 복음서를 "매우 불가사의한 책"으로 보이게 합니다.
(4) 요한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윤리적"인 관심사가 거의 안 나타나고, 순전히 "신학적"인 주제들만 쭉 다뤄 나갑니다. 윤리적인 관심이 적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말해 영지주의의 한 특징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특징이 눈에 띄는데요. 그중에서도 세 번째 특징이 매우 독특한 면모를 보이는군요. 이 때문에, 한 저자가 이 네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추었다는 건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이프릴 드코닉(April DeConick)은 이런 수수께끼에 대해 나름대로 신선한 시각을 제시했는데요.
"What is the Gospel of John?" : http://aprildeconick.com/gospel-of-john-1/
거기에 네 편의 영어 논문이 실려 있으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씩 읽어 보세요.
또한, 맨 첫 번째 논문에 대해서는 "요한 8:44, '유대인들의 신은 악마의 아비' " 글을 참조하세요 : http://blog.daum.net/philokang/357
여기에다가는, 맨 앞의 소개문만 번역해 놓겠습니다 :
요한 복음서는 다차원적인 초기기독교 문헌으로서, 고대 기독교의 이런저런 다른 형태들이 한군데로 융합되어 있다. 이를테면 "토마 복음서"에 반영된 것 같은 시리아 기독교, 또한 시몬 마구스파, 발렌티누스파, 그리고 케린투스를 추종하는 파벌 같은 영지주의 영성이 한군데로 융합되어 있다. 아주 오래된 증언들에 따르면, 이 복음서는 영지주의자들과 가톨릭 교인들 모두에게 읽혀졌고 찬미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요한 복음서는 정통 기독교인이건 이단 파벌이건 간에,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사랑받아온 독특한 책입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의 위와 같은 네 가지 특징을 감안하면, 이런 "이단적"인 성향의 책이 어떤 논란을 거쳐 가톨릭 신약에 채택되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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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타리 밖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강경수
첫댓글 예전에 성경에 몰입해 있을 때 유달리 요한복음서에 애착을 가졌더랬습니다.
왜라는 의문을 파고 들 때,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다면 영지주의 성향이 강했던걸까요? ㅎ
요한 복음서는 물론 영지주의자들(특히 발렌티누스파)이 좋아한 책이지만, 가톨릭 교부들이나 신교도 개혁자들도 마찬가지로 좋아했어요. 이레나이우스만 해도 요한 복음서를 굉장히 옹호했고요. 루터도 복음서들 가운데는 요한 복음서를 첫손가락에 꼽았습니다.
정통 기독교 노선을 따르더라도 꼭 영지주의를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영지주의 신학에서 "신관"만 좀 수정하면, 정통 기독교 신학에도 얼마든지 도움이 되니까요. 요한 복음서의 네 가지 특징 가운데 (1)번만 좀 손보면, 곧바로 정통 기독교 신학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노선 자체가 "반 유대주의"이므로, 반 유대주의 색채는 큰 장애물이 못 됩니다.
타락해 가는 사회와 인간들에 시니컬한 냉소를 퍼붓는 ... 나물먹고 물마시고 살아도 자연속에서 행복함을 누리던 영지주의자들의 할아버지 .. 견유학파 철인들, 그들은 헬레니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소크라테스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또 헬레니즘시대 문화권에 살던 예수도 그 둘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모습들이 복음서에 나타나지요. (소크라테스는 예수의 모습의 전형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에수보다 몇 백년 선배일 것입니다.
"나물먹고 물마시고 살아도 자연 속에서 행복함을 누리던"... "견유학파 철인들" 같은 모습은 공관 복음서들의 일부에, Q가설에서는 Q의 초기층(Q1)에 나오고요. 이건 일종의 "떠돌이 선교사들"의 모습 같은데(마르코 6:1~13 참조), 요한 복음서나 영지주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또 소크라테스(플라톤)와도 다른 성향입니다. Q1 비슷한 것이 "토마 복음서"(시리아 북동부의 에데사가 출처임)에도 나오는데, 혹시 뭔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지는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