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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중에도 미국에 유학생 보내 “2023학년도 미국내 北유학생 3명” 미국이 교육시킨 북조선의 테크노크라트
2023-11-16
국무부 “2023학년도 미국 내 북한 유학생 3명”
2023.11.13 https://www.rfa.org/korean/in_focus/nkstudent-11132023141348.html
국무부 “2023학년도 미국 내 북한 유학생 3명” 미 국무부 교육문화국과 국제교육원이 발간한 '오픈도어스 2023' 데이터 캡쳐.
앵커: 올해 북한 국적으로 미국 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 수는 지난해보다 1명 줄어든 3명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조진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미국 국무부 교육문화국과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국제교육원(IIE)은 13일 2022-23 학사 연도에 미국 대학에 등록한 외국인 유학생 현황을 담은 ‘오픈 도어스 2023’(Open Doors 2023)’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연례보고서는 미 전역 대학기관에 보내진 설문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유학생 수와 출신 국가를 집계하고 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미국 대학에 등록한 북한 국적 학생은 3명으로, 2021-22 학사 연도와 비교하면 1명 줄었습니다.
보고서는 이들 유학생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일본에 살면서 북한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조총련계 혹은 북한 외교관의 자녀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찬모 평양과학기술대학 명예 총장은 13일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북한 국적 유학생이 조총련계이거나 북한 외교관 자녀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찬모 명예 총장: (미국이 북한 국적자에게) 학생비자는 안주는 걸로 되어있는데, 그것도 외교관 자제는 학생이라도 (비자를) 줘요. (북한) 외교관의 경우에는, 예를 들어 뉴욕에 있는 (북한) 대표부에 나와있는 북한 대표, 그 자녀들은 미국서 대학에 가게 되면은 그 학생을 받아요.
국제교육원 공보실 관계자는 이날 북한 국적 유학생이 재학 중인 학교와 전공 등 세부상황을 묻는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질의에 학생들 사생활 보호를 위해 공개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소속된 기관으로부터 실제로 북한 국적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미 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북한 국적의 미국 유학생은 지난 1975년에 5명이 최초 등장한 이후, 1980년 11명, 1990년 31명, 2000년 201명으로 꾸준히 증가했으며, 2007년에는 266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북한, 냉전 중에도 미국에 유학생 보냈다
2012.02.07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039#google_vignette
북한, 1960년대부터 미국 대학에서 배우게 해…양국 대학 간 직·간접 교류로 학생 선발
2011년 현재 3명의 북한 유학생이 있는 미국 일리노이 대학 얼바나샴페인 캠퍼스 전경. ⓒ일리노이대 홈페이지
미국에서 공부하는 북한 유학생들이 있다. 특히 미국·소련 냉전 시대였던 1960년대부터 북한 국적의 학생이 미국 대학에서 유학했던 사실이 <시사저널> 취재 결과 밝혀졌다. 지금까지는 1990년 이후의 재미 북한 유학생 수만 간간이 알려져왔다.
북한 유학생이 많은 대학으로 알려진 미국 일리노이 대학(UIUC· 얼바나샴페인 캠퍼스)에 1967년부터 2011년까지 등록한 북한 국적의 유학생은 모두 1백87명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대학 학적 자료를 보면, 지난 45년 동안 이 대학에 유학한 북한 출신 학부생은 1백29명, 대학원생은 57명, 연구원 1명 등이었다.
1967년에는 남학생 한 명, 여학생 한 명 등 모두 두 명이 이 학교 학부생으로 등록했다. 1960년대에 이 대학을 거쳐간 북한 유학생은 모두 여섯 명이고, 대학원생으로 등록한 북한 유학생은 없었다. 1970년대에는 학부생이 여덟 명으로 집계되었다. 1974년부터 1977년까지, 그리고 1979년부터 1984년까지는 북한 국적의 유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1980년대에는 그 수가 급격히 줄어서, 1985년에는 남학생 한 명만 학부생으로 등록되었다.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이 대학을 다닌 북한 유학생은 없다.
1990년대부터 크게 증가…대학원생도 등장
그러나 1990년대부터 미국으로 향한 북한 유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학원생도 이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1993년 이 대학에 등록한 북한 유학생은 모두 10명인데, 학부생 아홉 명, 대학원생 한 명이다. 1990년대에는 모두 67명이 이 대학에서 학부생 또는 대학원생으로 공부했다. 2000년대에는 북한 유학생 수가 더욱 늘어나 2011년까지 모두 1백5명이 이 학교에서 유학했다. 처음으로 10년 동안 누적 유학생이 100명을 넘은 셈이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학부생과 대학원이 골고루 섞여 20명 이상이 해마다 이 학교에 등록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단 한 명도 없다가 2011년 학부 과정에 남학생 한 명, 여학생 한 명과 연구원 한 명 등 모두 세 명이 등록했다.
지난 45년 동안 이 대학에서 공부한 북한 유학생은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많은 점이 특징이다. 학부생 1백29명 중 남학생은 57명, 여학생은 72명이었고, 대학원생 57명 중 남학생은 22명, 여학생은 35명이었다. 북한에서 유학생을 선발할 때 여학생은 제외한다는 그동안의 추정을 뒤집는 결과여서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미국 전체 대학에 분포하고 있는 북한 유학생은 얼마나 될까? <시사저널>이 미국 기관과 현지 언론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로는 2011년 현재 16명의 북한 국적 학생이 미국 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다. 미국 국토안보국, 국무부, 국제교육연구소(IIE) 등에 따르면, 이들 중 13명은 대학의 학부생이고, 나머지는 대학원생이나 연구원 등이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북한 유학생은 100명 이상이었다. 특히 2000년과 2004년에는 각각 2백1명, 2백19명으로 2백명을 넘기기도 했다. 학위 취득 목적 외에 단순 연구원 등으로 유학한 북한 학생까지 포함하면 이 수는 더욱 늘어난다. 미국 국무부가 2001년 한 해 동안 북한에 발급한 유학생 비자가 3백건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2009년부터 북한 유학생이 43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고, 2010년 57명에 이어 2011년 16명으로 많이 감소했다. 국제 사회의 경제 봉쇄 조치 등으로 북한 경제가 악화된 데다 김정일 사망 등이 그 배경으로 분석된다.
리나 소만 IIE 공보팀장은 이메일을 통해 “미국 전역에 있는 대학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일부 대학에 북한 학생이 등록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들 중 일부는 일본 등 다른 국가에서 살다가 왔을지도 모르지만 북한 국적을 가진 학생들이다”라고 밝혔다.
미국 국토안보부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2008년 현재까지 강제 소환 등으로 학업을 포기한 북한 유학생은 100여 명이다. 미국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북한 유학생은 68명에 이른다.
1990년대 들어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에 북한 유학생이 급격히 늘어난 배경은 1984년 김일성의 동유럽 국가 방문과 무관하지 않다. 동유럽 여러 국가를 순방한 김일성은 북한 경제가 낙후된 원인을, 선진 기술을 도입하지 못했고, 인재를 양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유학생을 해마다 6백명씩 외국으로 보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 외국 유학 출신자는 현재 북한 사회 고위층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뒤를 잇기 위해 지금까지도 외국으로 유학생을 꾸준히 보내는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 유학생 수가 늘어났지만 아무나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당국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이유로 미국 내 북한 유학생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현지 대학생, 언론인, 미국 기관의 조사 방식 등을 통해 북한 유학생의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김일성·김정일 친인척 자녀 또는 당 고위 간부의 자녀일 가능성이 크다. 또 유엔대표부 등에 파견된 북한 공관원의 자녀일 수도 있다. 일본에 살면서도 북한 국적을 유지해온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학생도 있다. 이들은 비자를 발급받을 때 ‘일본 여행증’을 사용하면 일본인 유학생으로 분류된다. 물론 학위 취득이 목적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과 정책 등을 분석할 전문가를 양성할 목적으로 보낸 유학생도 섞여 있을 수 있다.
북한의 유학생 선발은 매우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 특히 한국, 미국, 일본 등지에 친인척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당 고위 간부의 자녀이고 사상 교육을 투철하게 받았더라도 긴 시간 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고, 현지에 친인척이 있다면 도움을 받아 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유학하던 북한 학생 중 일부가 망명한 사례도 있었다.
또 북한에서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부모의 출신 성분도 좋아야 한다. 8촌 이내 친인척 중에 당 정책이나 법에 따라 처벌받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군인 출신과 기혼자는 유학생 자격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북한 교육부, 각 대학, 정무원(북한 국민경제 담당 부서) 산하 교육위원회 등이 유학생 후보를 선발한다. 유학생 최종 결정권은 중앙당 국제사업부에 있다. 유학생으로 선발되면 평양외국어대 등에 있는 유학생 강습소라는 곳에서 6~14개월 동안 어학과 사상 교육을 받는다. 출국 12주 전에는 중앙당 국제사업부에서 출국 선서를 한다.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유학을 보내준 당에 보답하자는 내용이다.
현지에서 상호 감시하고 비상연락망도 갖춰
북한 학생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 미국 대학과 북한 대학 사이의 직·간접 교류로 미국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있다. 남캘리포니아 대학(USC) 등 일부 미국 대학은 북한의 김일성대, 김책공대 등과 학술 교류 관계를 맺고 있다. 일본·쿠바 등 제3국으로 유학을 간 후 교육 교류 프로그램에 따라 교환 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향하기도 한다. 2002년 미국의 한 방송인이 쿠바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미국 대학으로 유학 왔다는 북한 국적의 학생을 만난 일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미국 현지 대학생들에 따르면, 북한 유학생들은 대외적인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노출된 북한 유학생을 북한 당국이 관리하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북한 유학생들이 북한 체제에 의심을 품지 않도록 유지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지난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자 유학생들이 민주주의 사상에 노출될 것을 우려한 북한 당국이 5백여 명 전원을 긴급 귀국시켰던 적이 있다. 지금도 대학 또는 지역별로 북한 유학생들은 비상연락망을 갖추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6시간 이내에 연락할 수 있어야 하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정치 학습을 한다.
또 여권을 당에 반납해서 유학생은 다른 국가로 이동하지 못한다. 학교 성적이 낙제 수준이면 강제 송환되므로 유학 생활 초반에는 성적이 상위권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상 교육의 ‘약발’이 떨어지면서 점차 성적도 중·하위권으로 밀린다. 방학 중에는 미국에 남지 않고 전원 북한으로 일시 귀국한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북한은 고질적으로 경제 문제가 심각하므로 무역·경제·경영과 같은 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미국에 있는 북한 유학생 중 상당수는 경제 관련 분야에서 공부할 것이다”라고 추정했다.
북한 교수 중 미국 석사 유학생 출신도 있어
미국에 유학하는 외국 학생의 65%는 자비로 학비와 생활비를 부담한다. 미국 대학의 장학금을 받는 외국 학생은 23%이다. 나머지 12% 정도는 자국의 국비 장학금, 미국 정부의 장학금, 재단의 장학금 등을 받는 부류이다. 북한 유학생들의 유학 자금은 이 12%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 경제 사정을 고려할 때 북한 당국이 유학비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1990년대 초 북한은 외국 유학생에게 매월 80달러를 지급했는데, 이는 기숙사비와 식사비로 쓰기에도 빠듯한 금액이다. 따라서 북한 유학생은 미국 정부나 재단으로부터 유학비 등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학을 마친 후 북한으로 돌아가면 유학생들은 3개월 동안 사상 교육을 받고 혁명사적지 등을 답사한다. 이른바 ‘귀국 학생 상호 분리의 원칙’에 따라 3년 동안 외국 유학 출신 학생은 분산 배치되며 당의 관리와 감시를 받는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미국의 초청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북한 학생이 있을 것이다. 미국은 과거에도 제3세계 국가의 인재를 육성한 경험이 있는데, 이런 조치는 미국의 전략적인 행보로 보인다. 미국과 캐나다 등 자본주의 국가에서 북한과의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대학들이 늘어나면서 북한 유학생 규모가 늘어날 수 있다. 외국 유학을 마친 북한 학생들은 전문가 또는 외교관으로서 활동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북한의 교수도 자본주의 국가로 유학을 떠난다. 지난해 북한 김일성대와 정준택경제대의 거시 경제·조세·국제 통상·금융 통상 분야 교수 여섯 명이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사례가 있다. 북한 교수들이 캐나다 유학길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지난해 7월부터 6개월 동안 캐나다 서부의 명문 대학인 브리티시컴럼비아 대학(UBC)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밟았다. 이들은 국제 경영, 국제 경제, 재정, 무역 등을 공부했다. 교수 유학생들은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유학 비용은 캐나다 지원 단체가 모금으로 조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캐나다와 북한은 2001년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북핵 문제로 인해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양국은 교육계 교류가 먼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교류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번에 북한 교수들을 초청했다.
이 프로그램에 미국의 일부 대학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북미 지역 국가에서 공부하는 북한 유학생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한국 국적으로 미국 유학 떠난 ‘탈북자’도…
김상희씨(가명·여성)는 20대 초에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한국에서 7년을 살다가 201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김씨는 석·박사 과정에 도전한 것이다.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부해야 시야도 넓힐 수 있다는 생각에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김씨처럼 국내 북한 이탈 주민(탈북자) 가운데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로 유학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국적이 한국이므로 개인적으로 유학길에 오르기도 하지만 양국의 교류 프로그램에 따라 유학을 떠나기도 한다. 지난해 5월 영국 정부는 국내에 있는 탈북자 한 명을 영국 유학생으로 초청했다. 영어 교육, 인턴십, 영국 유학 기회를 제공하는 ‘미래를 위한 영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아, 2002년 한국에 정착한 오세혁씨가 지난해 9월부터 1년 동안의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통일부 정책지원과 관계자는 “탈북자가 개인 부담으로 외국 유학을 떠난 건수는 파악하지 못한다. 다만 정부나 재단의 지원을 받아 외국 유학을 떠난 탈북자는 현재 10여 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탈북자 출신이기 때문에 신변 보호를 위한 ‘안전장치’가 있다. 긴급한 일이 생겼을 때 외국 현지 정부와 한국 대사관 등으로부터 도움을 받도록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올해 미국 내 북한 유학생 2명…1975년 이후 최저"
2019-11-20 https://www.yna.co.kr/view/AKR20191120026700504
올해 미국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북한 국적 유학생이 2명으로 1975년 이후 가장 적다고 자유아시아방송(RFA)이 20일 보도했다. RFA는 미국 국무부 교육문화국과 비영리단체 국제교육원(IIE)이 지난 18일 발표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미국에 있는 북한 출신 유학생이 2명이며 모두 대학생이라고 밝혔다.
RFA는 미국 내 북한 유학생 숫자가 비핵화 협상 등 미북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고 분석했다. 유학생이 가장 많았던 2007년은 북핵 6자회담에서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자는 2·13합의를 도출했던 시기다. 그러나 북한이 '윤달 합의'를 깬 2012년에 14명으로 줄었고 이후 20명을 넘지 못했다.
오픈도어스 "올해 미국 내 북한 국적 유학생 4명"
2022년11월17일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21117000102
RFA는 지난달 국무부 통계 자료를 인용해 미국 정부가 7년 만에 북한 국적자에게 학생비자(F-1 Visa)를 발급했다고 보도했다며, 이 수치도 올해 보고서 북한 유학생 수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北 평양과기대 대표단, 미국 방문해 강좌개설 지원 요청
2017.01.31. http://cafe.daum.net/flyingdaese/VCUP/321
북한 평양과학기술대학 대표단이 농업경제학과 공중보건 부문에서 강세를 보이는 텍사스A&M대학 등 미국의 10여개 대학을 방문해 강좌 개설 지원을 요청하고 나섰다.
로이터통신은 31일 텍사스A&M대학을 방문 중인 평양과기대 대표단이 이같이 밝히고 이런 지원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이상을 위한 학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평양과기대 대표단은 10여 개 미국 대학들이 식량재배학, 식량안보론, 영양개선학 등의 강좌 개설에 도움을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들은 다른 접촉 대학들의 경우 학교 이름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전유택 평양과기대 총괄 부총장은 텍사스A&M대학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에 이런 대학은 없다"면서 평양과기대는 미래 북한의 지도자들을 위해 외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注目)북한, 1990년대 미과학재단에서 사용한 용어 '스템 (STEM) 교육' 강조
2023-10-08 https://cafe.daum.net/flyingdaese/Vfr0/14816
북한도 '스템 교육' 강조…'핵개발 자력갱생' 맞물려 주목
2023-10-08 https://www.yna.co.kr/view/AKR20231006055500504?section=nk/news/all
북한이 미국 등 서구의 이공계 융합 교육인 '스템 교육'(STEM)을 강조하고 나섰다. 8일 대외선전매체 려명은 "세계적으로 창조적 능력을 소유한 인재들을 더 많이 육성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스템 교육이 주목을 끌고 있다"고 소개했다.
스템은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첫 글자들을 딴 조어다.
매체는 "스템 교육은 매 과목의 기초지식을 튼튼히 다진 데 토대하여 응용 단계에서 종합적인 활용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과학·기술·공학·수학 교육을 의도적으로 결합시켜 진행하는 다학과 종합교육 방식"이라고 설명했다.이어 "스템 교육의 주되는 목적은 학생들에게 과학, 기술, 공학, 수학적 자질에 기초한 창조 정신과 실천 능력을 키워주자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가령 식물세포를 두고 과학 학습을 할 때 현미경 기술 지식, 그 설계 및 제작과 관련된 공학 지식, 배율 확대에 대한 수학 지식을 결합시켜 취급하는 방식이라고 예를 들어 설명했다.매체는 스템 교육이 학과 간 구분을 넘어 각 분야 지식을 종합적으로 활용해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준다고 강조했다.
스템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과정 설계가 중요하다며 "스템 교육은 적용 대상의 제한이 없고 유치원으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모든 단계의 교육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전면적 적용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에 집착하는 북한이 '스템'이라는 영어식 표현과 개념을 그대로 쓰는 점은 필요시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북한 체제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STEM이란 용어는 1990년대 미국 과학 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에서 과학, 기술, 공학, 수학의 약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용어는 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를 통틀어서 일컫는 용어로 시작되었지만 국가 정책, 의회 보고서, 교육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약간씩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방북 IPF 자문위원장 "북한 15∼20년후엔 또다른 싱가포르 될것"
2016-05-11 https://www.yna.co.kr/view/AKR20160511092500076
노벨상 수상자들의 북한 학술교류 행사에 동참했던 국제평화재단(IPF) 자문이사회 위원장이 북한의 교육과 과학, 기술 분야 투자를 높이 평가하면서 15∼20년 후에는 또 다른 싱가포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만약 앞으로 중대한 위기가 없다면 북한은 향후 15∼20년 후에는 과학기술 교육기관과 첨단기술을 보유한 회사들,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이 있고 정부가 이 분야를 강력하게 지원하는 또 다른 싱가포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알프레드 왕자는 또 북한 정부가 2년 전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의무화한 것도 놀라운 점이라면서 "앞으로 10∼15년 후에는 영어가 그들의 제2의 언어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북 IT연구협력 상황보고서(김책공대/시라큐스대학/코리아소사이어티) 2001년 2월~2010년
2018.10.25. http://cafe.daum.net/flyingdaese/Vfr0/105
기술강국 꿈꾸는 북한…올해 'IT 특성화고' 190곳 신설--한국특성화고와 유사
2020.04.26 https://cafe.daum.net/flyingdaese/Vfr0/4396
북한 농학자들 ‘미국 농축산업 견학’ 제안에 뛸듯 반겼다”
2020.07.06.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52460.html
北 평양과기대, 전 세계 교수진과 원격 '화상수업' 개시
2020.12.03 https://cafe.daum.net/flyingdaese/Vfr0/6245
米国が仕込んだ北朝鮮のエリート集団
2015年2月19日 小川和久
미국이 교육시킨 북조선의 테크노크라트
米国が仕込んだ北朝鮮のエリート集団
2015年2月19日 小川和久 번역 오마니나
미국이 교육시킨 북한의 엘리트 집단 "NEWS를 의심하라! "제 371호(『NEWSを疑え!』第371号より一部抜粋)에서 일부 발췌
최근 일본을 방문한 한국의 북한 문제 전문가 그룹과 의견을 교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에 대한 상대방의 요구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의 후에 있을 일본의 안전보장정책과 미일동맹의 전망, 중국의 군사력에 관한 분석, 같은 것이었는데, 내게도 매우 공부가 되는 가치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김정은 제 1서기가 이끌고있는 북한이 구미류, 그것도 미국적인 발상을 몸에 익힌 기술주의 집단(테크노크라트)에 의해 국가건설을 추진하고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나의 가설에 대해, 그 증명이 될 듯한 정보를 얻은 것입니다.
평소부터 나는,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 미사일 개발은, 2차대전 후의 미국을 모델로 경제건설을 추진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시해왔습니다.
핵무기와 탄도 미사일의 개발을 추진함으로써, 세계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환경을 만들어내, 우선 인도와 같은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고, 그 단계에서 핵억지력을 구비했다는 것을 이유로 국내의 군부에게 군축을 실행시켜, 과도한 재래식 전력의 부담을 가볍게 만들어 경제건설을 추진하려고 하고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전후, 아이젠 하워 정권의 8년 동안에 전술 핵무기를 일거에 100배까지 늘리는 한편, 재래식 전력의 대폭삭감을 통해 재정부담을 완화해, 경제건설을 추진했습니다. 그 상황은 西恭之 씨(시즈오카 현립대학 특임조교)의 칼럼 (2013년 4월 11일호)에 상세하게 쓰여있기 때문에 참조하십시오. 그것을 답습한 것이 중국의 경제적 성공이라는 견해도 있으므로, 북한이 미중 양국을 모델로 하지않을 이유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젊은 김정은 제 1서기만을 보면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불안정하다고 느낄 지도 모릅니다만, 이것을 강력한 테크노크라트 집단이 지지하고 있다면, 그러한 움직임도 불가능 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김정은 체제가 되고나서의 북한의 움직임의 배후에 구미식 교육을 받은 테크노크라트 집단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점을 한국 측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미국식 교육을 받은 테크노크라트 집단이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미국의 대학원에 몇 년 넘게 재학하면서 박사학위를 받는 그런 케이스는 아니지만, 1년 정도의 연수에는, 매년, 많은 테크노크라트가 파견되고 있다. 미국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구미에서 연수를 받는 북한의 테크노크라트는 연간 1000여명에 이른다"
어떤 곳에서 연수를 하고 있는가 하면, 유명 대학으로는 시러큐스 대학이 있고, 여기에서는 경제문제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 같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사해 보자, 놀라웠습니다. 무려 시러큐스 대학에서는, IT 관련 교육까지 실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하이브리드 전략"인가
미국 사정에 정통한 기자인 마츠오 후미오 씨(교도통신 OB)의 블로그 "아메리카 와치"가, 이 IT연수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그 일부를 소개해 둡니다.
"교류의 주체는, 뉴욕 주 북부에 있는 1870년에 멘디스트 교회에 의해 설립된 오랜 역사를 가진 시러큐스 대학과 평양에 있는 북한의 대표적인 이공계 대학인 김책 공업 종합대학. 테마는 시스템 · 어슈어런스 라는 IT 기술을 둘러싼 "쌍무적인 연구 협력"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이것은 명분상의 것으로, 실제로 시러큐스 측이 김책 측에 IT 기초 기술을 가르치는 연수의 실시다. 이 프로젝트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주간지 "타임"의 창간으로 성공한, 고 헨리 루스가 남긴 7억 달러의 유산을 바탕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다양한 교육 지원사업을 전개하고있는 "헨리 루스 재단"이다. 그 중개자 역할은, 한국 전쟁 직후에 한국과 미국과의 우호 친선단체로 설립되어 뉴욕에 본부를 둔 코리아 소사이어티다. 연락역할은 뉴욕의 북한 유엔 대표부도 참가하고있다. 시러큐스 대학 캠퍼스에서 연수를 받는 김책 공업종합 대학 측 관계자에게는, 미 국무성에서 비자가 나오고있다. 어디로 봐도 미국, 북한, 그리고 한국도 암묵적인 지지를 하고있는 굉장한 민간교류다"
"최초의 연수가 시라큐스 대학에서 열린 것이 2003년 4월이다. (중략) 2003년 4월이라고 하면, 북한을 이라크,이란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악의 축"이라고 단정한 부시 대통령이, 실제로 이라크 전쟁을 강행한 직후다. 4월 9일에는 바그다드가 함락되었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에서도 6자회담의 전단계인 북미중 3개국 협의가 부진끝에 끝나, 미국과 북한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러한 IT기술 연수가 당당하게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보고, "미국은, 왜 북한의 위협을 증대시키는 짓을 하는 것인가. 북한의 사이버 공격의 위협을 증가시킬 뿐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본적인 생각입니다.
미국은 지금까지도, 동맹국이나 우방국의 젊은 엘리트를 대학원 등에서 받아들여, 박사 학위를 받게 해 귀국시켜, 그 엘리트를 통해서, 그 나라를 콘트롤하는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략" 이라고도 할 수있는 전략적 자세를 보여 왔습니다. 물론 일본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 "하이브리드 전략"을 북한에 적용하고 있다고 하면 ....
미국에서 연수받은 엘리트를 통해 북한을 컨트롤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북한의 경제건설과 농업정책, IT전략 등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가르친 상대이기 때문에 동향을 예측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도록 될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그러한 각도에서 북한의 진행 방향을 주시하며, 동시에 국가건설에 협조하면서, 북한이 위협이 되지않도록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 그리고, 북한도 미국의 전략적 자세를 알게된 후, 배울 것, 훔칠 것은 탐욕적으로 흡수해 가고있다.
이러한 북미관계,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북한을 안정시키려하고 있는 한국의 자세에 대해서는, 일본으로서도 참고가 될 것이 적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http://www.mag2.com/p/news/7354/2
今なお機能している米朝の「深くて太い」水面下接触に気をつけよう
8月危機、実はトーンダウンの連続
2017. 08.31 松尾 文夫
지금도 작동 중인 북미의 "깊고 굵은" 물밑 접촉
8월 위기? 실은 톤 다운의 연속
2017. 08.31 松尾 文夫(마츠오 후미오) 번역 오마니나
북-미간에 존재하는 채널
일본인에게는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핵 미사일 개발문제로 격렬하게 대립해야 할 미국과 북한 사이에는 직접적인 채널이 통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정면에서는 "핵 카드"를 내세워 대결하는 한편으로,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는 북한의 IT 전문가가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비자를 받아 미국 본토를 밟는 등의 관계가, 2002년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일본은 제대로 인식해야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북측이 김정은 총서기 하에서, 핵과 대륙 탄도미사일의 개발을 위한 실험을 가속시킨 2014년을 마지막으로, 이러한 관계는 중단되었다.
2014년 중국 다롄에서 열린 북미 과학기술 교류
8월 29일의 시그널
8월 29일에는, 북한이 발사한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홋카이도 상공을 통과해, 전국의 TV 화면이 "경보"를 계속 발하는 이상한 사태가 발생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중국과 러시아도 포함한 비난성명은, 제재조치를 무시하고 계속되는 북측의 도발행동을 "피부로 느낄 수있는"상황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한미합동 군사연습이 시작되어, 북의 드높은 대미 비난의 레벨이 상승하는 가운데, 22일에 필자의 수십 년간의 친구인 북한문제 연구자로, 뉴욕의 사회과학 연구협의회에서 동북아 공동안보 프로젝트 부장을 맡고있는 레온 시걸 박사는, 도쿄에서 건 나의 전화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사견이지만, 북측과 트럼프 정권은 어딘가에서 비밀접촉을 하고있다고 생각한다. 그 채널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한국군이, 이번 한미합동훈련에서 북측을 자극하는 연습에는 참가하지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에 나는 주목하고있다. 즉, 북측이 평소부터 강력한 불쾌감을 드러내고있는 괌기지의 B1-B 폭격기와 핵 항공모함 등에 의한 선제공격을 상상시키는, 시위적인 연습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관측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든 북미 간의 대화가 시작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을 할 수없다는 인식은 이미 쌍방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목할만한 발언이다. 시걸 박사는, 7월 25일의 상원 외교위원회에서의 증언에서도, 이른바 중국을 동원해 북한에 대한 제재압력에 찬성하면서도, 북측이 핵문제에서 어떤 출구를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기위해, " '대화를 위한 대화'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는 견해를 밝혔다."그 점에 트럼프 대통령은 현명한 태도를 취하고있다"고도 말했다.
북측도, 8월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추가제재 결의에도 불구하고, 위협했던 6차 핵실험을 글을 쓰는 현재인 8월 말의 단계에서도 실시하지 않고있다. 그 대신, 괌 주변 30~40킬로미터에 미사일 4발을 쏘는 "포위 발사" 계획을 세운다고 발표하는 데 그쳤다.
8월 하순, 한미합동 훈련의 개시 후, 곧 행해진 항의의 미사일 발사도, 예상되던 잠수함 발사형 미사일(SLBM)이 아니라, 단거리 미사일을 사용하는데 머물러 북측은 그 기세를 내리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29일에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넘어 1발만 발사된 미사일은, 신형이 아니라 괌 "포위사격"에 사용될 것으로 보였던 것과 같은 형이었다. 시걸 박사는, 다음 날, 필자의 전화취재에 "실제로는 괌에 대해 쏘지않으므로서, 태도를 연화해 보였다"고 답했다.
미국 측도, 시걸 박사가 주목하고있는 B1-B 폭격기의 출격을 억제하면, 북측의 연화자세에 응하는 것이 된다.
"대화"가 시작될 것인가
이렇게 되면 물밑에서의 "대화를 위한 대화" 채널은, 충분히 생겨난다.
시걸 박사는, 예일대, 하버드 대에서 수학하고, 국무부 근무 후, 뉴욕 타임즈의 논설위원을 거쳐 현직. 1994년 "제네바 합의"의 과정을 분석한 "디스 아밍・스트레인져스 북조선과의 핵협상"(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1998년)이라는 저작이 있다. 북조선도 여러 번 방문해, 세계 각지에서의 북미 비공식협의에는, 몇 번이나 미국 측의 구성원으로서 참가하고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걸 박사가 예언한대로, 이 "대화를 위한 대화"의 끝에 보이는 양자의 "합의"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미 매티스 국방장관은, 명확히 "북측의 체제 변화 등 원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해리스 미 태평양 군사령관도 22일 "먼저 외교적 노력이 첫째이며, 군사적 수단은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면의 초점은, 한미합동 군사훈련의 마지막 단계에서, 미국 측이 B1-B 폭격기 등의 출동, 북측이 6차 핵실험 등의 추가적인 "도발 에스컬레이션"을 단행할 지의 여부, 혹은 반대로 쌍방이 에스컬레이션을 가속화해 최후에 "대화 노선"으로 돌아설 것인가의 분기점이다.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대화"를 위한 무대는 세팅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은 것이 아닌가.
미국이, 북한을 어디까지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것인가, 과연 인도, 파키스탄 수준의 대우를 할 용의가 있는지의 여부, 북이 어느 정도의 "체제 보장"에 만족할 지의 여부----라는 곳까지 생각하는 단계에 와 있는 지도 모른다.
따라서, 북미가 2014년까지 계속했던 "밀월 관계"를, 일본은 확실히 재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난스럽게 "위기"라고 소란을 떠는 것보다, 과거의 사실을 이해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이 IT 기술 교육에으로 북측을 지원할 계획
필자가, 이 수면하의 관계의 존재를 알게된 것은, 고이즈미의 방북과 평양선언 서명 직후인 2002년 9월 말, 뉴욕에 들렀을 때였다.
뉴욕의 재팬 소사이어티가 타이밍 좋게, "북한에서의 고이즈미 총리 --- 일본과 미국의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타이틀로 미일의 전문가 패널 토론을 주최해, 오래된 미국친구의 호의로 방청할 수 있었다.
회의장을 바라보니 맨 앞줄에 당시 한국의 유엔대사인 선준영과 북한의 한성열 유엔 차석대사가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있었다. 과연 세계정치의 중심인 뉴욕답다며 감탄하고, 리셉션에서 미국 친구에게 "도쿄에서는 아직 볼 수없는 풍경"이라고 하자, 그 친구는 "워싱턴에서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뉴욕에서, 우리는 민간 위주로 평양과 채널을 확실히 가지고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거기에서 들은 것이, 뉴욕 주 북부에 있는 시러큐스 대학에, 북한의 김책 공업종합대학에서 IT기술을 배우는 연구자를 받아들일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였다.
이미 2002년 3월에 김책 공업종합대학의 부학장 등 2명이 시러큐스 캠퍼스를 방문하고, 같은 해 6월에는, 시러큐스 측 대표가 평양을 방문. 계획실행을 위한 합동조사위원회의 설립에 합의를 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목적은, 북한이 파견하는 IT 전공 연구자에 대해, 시라큐스 대학 측이 "디지털 라이브러리" "머신 트렌스레이션" "디시젼 서포트" "랩 디자인"등 시스템 어슈어런스의 기초연수를 실시하는 것으로, 12월에는 60명 정도가 올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금은, 시러큐스 대학이 일부 부담하는 것 외에, 헨리 루스 재단을 필두로 하는 미국의 재단과 기업에서의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존재
이 교류사업의, 북측 창구는 유엔 대표부, 미국 측은 코리아 소사이어티였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한국전쟁 정전 시 미국 제 8군 사령관이었던 제임스 A · 밴플리트 중장의 제안으로 창설된 한미교류 조직이다.
처음에는 반공, 반북단체였지만, 2002년에, 이 조직의 회장에 부시(시니어)행정부의 주한 미국대사였던 도널드 그레그(Donald P. Gregg)가 취임한 이후, 반대로 북측과의 대화의 장이 되어, 접촉 루트가 되었다.
그 근저에 있던 것이 그레그 대사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남북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현재 상황을 낳은 것은, 미국의 책임이라는 속죄의식이다. 그의 휘하에는, 그 인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대일 전후정책에 대해서는, 전쟁 중부터 상당히 정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황제 유지 등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완전히 공백이었다"며, 그레그 씨는 몇 번이나 나에게 말했다. 물론,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얄타・포츠담 선언의 틀에서는, 일본령인 조선의 주민은 전후 "해방민족"으로 다루어지게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 후, 미국은 한반도의 독립에 관여할 필요가 있었지만, 아무런 검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미국이 하와이에 망명하고있던 이승만을 남쪽으로 데려온 것은, 1946년이 되어서였다. 좀 더 빨리, 미국이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을 생각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지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그레그 대사 등의 자기비판이다.
그는, CIA의 토박이이면서, 베트남 군사개입의 확대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전후 일본 근무 경험도 있어, 부시(시니어) 대통령이 부통령이었던 시대부터 국가안보 문제 보좌관을 역임해, 지금도 깊은 신뢰를 얻고있다.
어쨌든 남북분열에 대한 속죄의식은 강해,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남북 화해의 장으로 만드는 열정은 인상적이며, 그의 사무실에는, 북한 유엔 대표부 공사 등이 자주 와, 내가 방문했을 때는, 함께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은 적도 있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을 퇴임한 후에는, 스펜서 김이라는 한국계 미국 기업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Pacific century institute (PCI)라고 싱크탱크를 설립해, 이사장으로 들어가, 리버럴계의 언론인 등도 참가하는 화해파의 거점이 되어 활동을 계속하고있다.
대학을 활용해 북한과 교류
앞서 말한 북과 시러큐스 대학과의 교류를 중개한 것도, 그레그 대사와 그에게 협력하는 전 USIS(미국 홍보문화 교류국)의 한국 전문가들이었다. 시라큐스 대학의 북한 유학생 사업이 피크였던 2000년대에는, "풀 브라이트 재단에도 북한의 학술 연구자도 넣어야한다"는 제언까지 미국 측에서 나오고 있었다.
시러큐스 대학이 북한 대표단을 받아들인 것은, 2010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북미 기술 연수사업은, 그 후에도 헨리 루스 재단, 포드 재단 등의 지원으로 계속되어, 집회 장소를 조지아 공대와 평양, 심지어는 북경, 다렌 등으로 옮겨, 2014년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의 진전이 멈추지 않았던 점도 있어, 2015년 이후 중단 된 상태로 남아있다.
시러큐스 대학은 1870년, 메소디스토 · 에삐스로바루 교회에 의해 설립된 동부의 유명 대학의 하나로, 그 대학원인 맥스웰 스쿨을 중심으로, 국제관계 교육에도 열성적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 세대에게, 시러큐스 대학이라고 들으면 즉시 떠오르는 것은, 점령 하의 가리로아 · 에로아 장학금과 그 후, 풀 브라이트 재단의 최초의 대미 일본인 유학생의 창구 학교로 유명했던 시절의 이미지다.
일종의 오리엔테이션 센터로서의 역할을 다해, 많은 일본인 유학생이 이 학교에서 일정한 영어연수를 받은 후, 미국 전역의 대학으로 갔던 시대가 있었다.
"닫힌 사회"를 여는 사명
이 취재에 착수했을 무렵, 일본에 온 시러큐스 대학 이사회에 "이 시기에 북한의 대학과 교류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전세계의 여러 사람들과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키우는 것이 견학 이후의 방침이며, 특히 "닫힌 사회"의 사람들과의 우호관계 수립에 도전한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시라큐스 대학은, 군부독재 시대의 한국을 비롯한 구소련, 중국 ......과, 현재의 북한과 같은 IT 기술의 학습에 의한 "닫힌 사회"의 개방 실현에 공헌이라는 테마에 오랜동안 노력하고있다.
중국의 공무원 양성기관인 국무원 직속의 중국국가행정학원(CNSA)과 명문인 칭화대학과의 교류 실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중국에서 실적을 올린 "연구 협력"방식을 김책 공업 종합대학에 적용하려고 하고있다고 한다.
나는, 이 "닫힌 사회"에 도전하는 시러큐스 대학의 자세에서 19세기 미국의 서부로의 개척사업을 지지했던 인식, "매니패스토 데스티니(명백한 운명)의식", 즉 "신의(神意)는 민주주의의 서진(西進)을 축복한다"는 사명감의 잔영을 본다.
시라큐스 대학의 경영 모체인 메소디스토는, 미국의 개신교 파 중에서도, 가장 전투적인 "명백한 천명"이라는 노선의 추진으로 알려져있다.
이 역사적 사명감의 선두에 서서, 건국기의 미국 각지에 대학을 만들고, 드디어는 중국, 한반도 등과 같은 "닫힌"국가로 속속 보내진 미국인 선교사의 궤적이, 오늘의 미국 과 북한 사이에 있으며, 일본과의 사이에는 없는 "관계"의 뿌리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 해두고 싶다.
시라큐스 대학은, 태평양 전쟁 패배 후의 일본 유학생에게 내밀었던 손을, 지금은 북한에 내밀려고 했던 셈이다.
시걸 씨의 "디스 아밍 스트레인져스 북조선과의 핵 협상"에 따르면, 고 김일성 주석의 부친은 "제네바 합의"의 비밀 부속문서의 실행 시에, 친평양의 입장에서 활약한 한국계 미국인인 K.A.남 씨의 할아버지가 만든 미션스쿨에서 공부했다.
고 김일성 주석 자신도, 1890년대에 시러큐스 대학과 같은 메소디스토파의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서울에 설립된, "존 돈 교회"의 4대째 목사, 손 죤드 목사에게 구만주와 길림에서 학창 시대에, 그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즉, 이 시기, 한반도에서는 미국 선교사와 그 뒤에 있던 "미국이라는 나라"는, 일본의 지배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였던 셈이다
미국이 북한을 지원하는 이유
원래 미국과 북한 사이의 공식, 비공식 교류, 접촉 채널의 크기와 수는 북일과는 비교가 되지않는다. 부시 주니어 대통령이 대 테러와의 전쟁 중, "악의 축"의 하나로 꼽아, 대결자세를 표출한 이래 대체로 잊어버리기 쉬운 사실이다.
역시, 클린턴 전 정권의 1994년 10월에, 실험용 원자로 등의 동결과 관계개선의 거래로 결정된 "제네바 합의"가 체결된 이후, 2000년 12월까지 계속된 밀월시대의 유산이 크다. 일본에게는 전혀없는 관계다.
2004년 1월, 영변의 핵개발 시설이 미국 방북단에 공개되어, 플루토늄 보유가 공개되었다. 6자회담의 모든 관계국에 대해 핵억지력의 존재를 증언하는 메신저 역할을 맡게 된 2팀의 방북단은, 그야말로 밀월시대에 생존한 인물들이었다.
이 때, "북한이 초보적인 핵장치를 제조할 수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판단을 가지고 온 핵문제 전문가인 지그프리드 헤커 전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소장과, 귀국 후의 "뉴욕 타임즈"지의 기고에서, 거물급 대표의 임명에 의한 북미 직접협상 재개를 제안했던 찰스 프리처드 전 한반도 평화담당 대사, 그리고 그 일행을 이끌었던 존 루이스 스탠퍼드 대 국제안전보장 협력센터 교수는, 베테랑 북미채널 역이다.
시걸 씨에 따르면, 루이스는 원래가 중국학자. 그러나, 1990년 6월과 1991년 12월 두 차례, 평양에서, 북미 거기에 한국의 당국자도 포함한 회의를 열었던 인물로 알려져있다.
루이스는, 또 하나의 북한과의 접점인 스탠포드 그룹의 중심 인물이었다. 즉 "제네바 합의"실현의 선도역이었다. 미국의 기업이나 재단에서 많은 원조를 제공받은 이 제네바합의 비밀부칙(트랙 2)의 실행에서 활약한 오래된 강자다.
이 밖에, 공화당원이면서, 평소부터 "제네바 합의"의 지지자로서 현재도 협상에 의한 해결을 주장하고있는 리처드 루거 전 상원 외교위원장의 스탭이었던 키스 루스 씨, 조지프 바이든 전 부 대통령의 의원 시절의 스탭인 프랭크 자누지 씨 등과 같은 우수한 전 외교 위원회 직원도 비공식적인 채널을 가지고있다.
자누지 씨는 현재 맨스필드 태평양 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을 맡고있다. 물론 이 두 사람은 방북 경험이 있다.
이러한 북미 간 채널의 저변은 넓어, 맨스필드 태평양 문제 연구소에서 출판된 "선의로 이루어진 - 북한에서 NGO 경험"(고든 플레이크, 스콧 스나이더의)에 따르면, "북미 제네바 합의"의 영향으로 1995년 8월의 "대홍수 피해"를 계기로 미국에서의 인도주의 목적의 NGO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주요 NGO 그룹만 압축해도, 그 수는 31개 단체에 달한다고 한다. 각종 기독교 계열의 단체를 중심으로, 미국 유니세프 기금, 아시아 재단 등 폭넓은 분야의 단체 이름이 줄지어 있다.
미국에게는, 북한에 대한 NGO 활동을 포함한 채널이 있다는 현실을 음미해 두지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하에 "압력"의 측면에서는, 유엔제재의 지도권을 쥐고, "모든 옵션"을 배제하지 않는다며, 군사공격 옵션까지 입에 올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도적 지원은 물론이거니와, 북한이, 국제사회로 복귀하는 선택을 취할 경우, 개혁개방 정책에 필요한 인력을 사전에 준비해둔다는, 실로 전략적이면서도, 호흡이 긴 지원사업을, 민간 차원에서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미국이 "대화와 압력"이라는 정책을 꺼내들 때, 그것이 만만이 아닌 것임을, 이미 북한은 피부로 알고있다. 서로가 서로의 손바닥 속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닉슨에 의한 미중화해의 전 단계 시기와 비교해, 현재의 북미관계의 거리는 월등히 가깝다.
2006년, 고립되어 버린 아베총리
이러한 북미의 물밑 움직임이 시작된 당초, 일본정부의 대책은 좋았다고 할 수 없다. 핵 미사일 위기뿐 아니라, 납치문제도 있어, 반북감정으로 국내정치가 덮혀버린 감이 있었다. 미국과 동조해 "대화와 압력"과 같은 표현은 하고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대화"의 단서조차 아무 것도 없었다.
이에 대해, 시걸 박사가 필자에게 전해 준 바에 따르면, 미국은 2005년 경부터 물밑에서 비밀리에 회담의 재개를 위해, 북한과의 접촉을 활발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2006년의 제 1차 총리취임 후 첫 외유로 먼저 중국을 선택하고, 10월 8일에 베이징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10월 9일, 북한은 1차 핵실험을 실시.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심지어 그 다음날인 10월 10일, 특사로서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 씨가, 김정일 군사 위원장에게 보내는 부시(주니어) 대통령의 친서를, 후진타오 주석에게 부탁한 것이다.
친서에는, 핵 포기의 대가인 평화조약 체결 준비를 비롯해, 신뢰구축의 필요성을 강조, 군사 옵션과 레짐 체인지의 의사가 없다는 등이 제시되었다고 한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 하에서, 이러한 과거에 축적된 미국의 북한에 대한 복선적, 다원적인 채널이, 어떠한 정책의 전개에도 대응 가능한 "자산"으로 남아있다.
북한과는, IT 연 사업 채널이나, 그 경험자들의 존재 등, 대립의 이면에 물밑 파이프는 확실히 존재해, 언제든지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해 둘 필요가 있다.
지금, 납치문제로 "출구"은 물론이고, 대화의 계기조차 보이지 않은 일본과의 깊은 "격차"를 철저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http://gendai.ismedia.jp/articles/-/52413?pag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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