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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385일 째); 휴전(休戰)회담 낙수(落穗)-2
오늘의 전황 (1951년 7월 14일) * UN군, 양구(楊口)지구 적 반격 격퇴 * 미 해군, 동해안 적 연대 지휘소를 함포사격으로 격파
휴전회담 낙수-2
UN측 대표; 수석대표 극동해군 사령관 터너 조이, 8군 참모부장 호데스, 극동공군 부사령관 크레이기, 알레이 버크 극동해군 참모부장, 백선엽 국군 제1군단장.
(사진 순서; 크레이기, 백선엽, 조이, 호데스,
버크)
“勝者가 먼저 發言한다” 이어 3번째 심리전이 이어졌다. 정식회담(正式會談)은 서로 기립한 채 신임장(信任狀)을 교환한 뒤 자리에 앉음으로써 개막되는
것이었다. UN군 대표단장인 터너 C 조이 중장은 여기서 작전을 쓴다. 터너는 공산측에게 UN측의 신임장을 넘겨 주었다. 하지만 곧바로 공산측 수석대표인 남일 중장이 공산측 신임장을 내밀자 터너는 머뭇거렸다. 남일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터너 중장을 바라보았다. 터너 중장은 공산측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기다려 신임장을 받았다. 남일은 터너가 머뭇거리다 신임장을 받자 무심코 자리에 앉았다. 터너의 이상한 행동에
시선을 빼앗겨 집중력을 잃은 것이다. 그 때였다. 신임장을 받느라 자리에 서있던 터너 중장이 잽싸게 개회사(開會辭)를 읽어 내려갔다. UN군측은 ‘승자(勝者)가 먼저 발언한다’는 중국의 관습에 따라 발언순서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꼼수를 부린 것이다. 터너 중장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한방 먹였다’고 여겼다. UN군측 1승
'높은 의자', '큰 깃발' ...
기세(氣勢)를 잡아라! 터너가 ‘승자(勝者)의 미소’를 흘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공산측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싸늘한 표정으로 UN군측을 쏘아보는 남일 중장의 얼굴이 아주 높아보였다. 남일 뿐이 아니었다. 작은 키의 공산측 대표들이 UN군 측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특히 남일 중장은 등을 한껏 곧추 세운 뒤 조이 중장을 내려다 보았다. 공산측이 UN군 대표단 자리에
4인치(10㎝ 정도)나 낮은 의자를 놓았던 것이다. UN군 대표단이 ‘무슨 짓이냐. 의자를 빨리 바꾸라’고 항의했다. 공산측은 ‘알았다’며 ‘쿨(COOL)’하게 의자를 바꿨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공산측 사진기자가 ‘남면(南面)의 높은 의자에 앉아 패자(敗者)를 깔보는’ 사진을 충분히 찍은 뒤였다. 공산측 1승
오후 회담에서도 신경전이 이어졌다. 회담장에 들어선 UN군 대표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UN군측이 오전 회담 때 테이블 위에 작은 탁상용 UN기(旗)를 놓아두었었는데, 공산측이 어느새 탁상용 북한기(旗)가 높아진 것이다. 문제는 북한군 기(旗)가 UN旗 보다 2~3인치(INCH)나 더 큰 깃발을 놓은 것이다. 받침대와 깃대, 그리고 기의 끝장식이 조금씩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공산측 2승
역사인식(歷史認識)의 차이
이렇게 아이들 싸움처럼 유치한, 그러나 결코 질 수는 없었던
힘겨루기로 시작된 휴전회담은 금방 난관에 봉착했다. 공산측의 요구는 분명했다. 전쟁 이전(以前), 즉 38도선 분단 상태의 원상회복(原狀回復)을 주장했다. 38도선을 양측의 군사분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38도선은 전쟁 이전에 이미 모든
국가가 알고 있는 경계선이다. 이 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공산측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UN군 측을 자극했다.
UN측이 제안한 휴전선
“전쟁(戰爭)은 여행(旅行)이 아니며, 부대(部隊)는 관광객(觀光客)이 아니다. 휴전(休戰)이 성립되고도 그 자리에 부대(部隊)를 그냥 둔다? 그 의도(意圖)는 뻔하지 않는가. 조선(朝鮮)의 아름다운 경치(景致)를
보라고 그 부대를 두지는 않을 것이다.” UN군 측은 공산측의 이런 주장을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일축했다.
공산측이 이미 38도선을 4번이나 횡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38도선은 군사분계선으로서 적합치 않다는 것이었다. UN군은 오히려 휴전회담 당시(1951년 7월)의 전선보다 30~50㎞ 북쪽에 군사분계선을 설치한 군사지도(軍事地圖)를 공산측에
제시했다. “지금 UN군 측은 육상에서는 한정된 지상진지를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空軍은 전 한반도의 제공권(制空權)을, 海軍은 전 연안의 제해권(制海權)을 갖고 있다. 만약 이 순간 휴전한다면 UN군은 도리어 공군과 해군력을 제한받게 된다. 그러나 공산측은 (휴전 덕분에 UN군의 압도적인 공군·해군력을 피하게 되므로) 좀 더 자유롭게 육상의 전투력을 증강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공산측은 지상에서 마땅히 더
양보해야 한다.” 즉 UN군은 육·해·공군을 통합한 군사력의 우세로 협상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UN군측은 “美國이 日本을 敗戰시킬 때 단 한 사람의 美軍도 日本 本土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例를 들었다.
물론 공산측은 ‘가소로운 제안’이라며
일축했다. “미군이 일본을 패망시켰다고 하지만, 日本을 屈服시킨 것은 朝鮮人의 鬪爭과 中國人의 人民戰爭, 그리고 소련의 低抗이었다. 소련이 가담하기까지 미국은 3년이나 패전을 거듭하지 않았는가. 어찌 역사를
부인할까?” 회담은 ‘역사인식’의 차이까지 드러냈다. 여름철 후텁지근한 무더위와 같은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휴전 당시까지 한국 해병대가 점령하고 있던 원산 앞 섬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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