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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4. 28.
근래에 본 자동차회사 이벤트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한국 자동차산업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더군요. 지난 26일(현지 시각) 포드의 전기 픽업트럭 양산(量産·대량생산) 개시 이벤트를 보고 든 생각이었습니다.
GM에 이어 미국 2위 자동차회사인 포드는 현지 시각으로 지난 26일, 자사의 주력 픽업트럭 ‘F-150′의 전기차 버전인 ‘F-150 라이트닝’ 양산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이 행사가 어떤 것인지 설명 드리고, 왜 이 행사에 주목해야 하는지, 왜 테슬라보다 포드의 행사가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전환하려는 한국 자동차산업에 더 큰 시사점을 주는지 등을 다섯 가지 포인트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 포드 F-150 라이트닝은 앞쪽에 엔진이 없기 때문에, 프렁크(프론트 트렁크)에 400리터의 공간이 마련돼 있다. 기내 반입 수하물 2개와 여행가방 1개, 또는 골프채 2개를 수납할 수 있는 크기다. 무게로 따지면 180kg까지 짐을 실을 수 있다. / 포드 유튜브 캡처
◇ 포드, 26일 전기차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 양산 이벤트... 자사 핵심 모델의 전기차 전환에선 테슬라·리비안 제치고 업계 선도... 기본가격 3만9974달러로, 아이오닉 5 미국 기본가보다 저렴
우선 이 행사를 설명 드려 볼게요.
‘F-150 라이트닝’은 포드의 간판 차종 F-150의 전기차 버전입니다. 작년 5월 공개됐기 때문에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만, 이 차량의 ‘양산’에 실제로 들어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미 연 15만대 생산 시설을 갖췄습니다.
아무리 멋진 차를 공개했더라도 양산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모든게 재앙으로 바뀌죠. 전기 픽업트럭인 테슬라 ‘사이버트럭’과 리비안 ‘R1T’는 시제품만 공개됐을 뿐, 실제 조립라인에서 차를 찍어내는 단계엔 이르지 못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테슬라가 지금쯤 사이버트럭을 잔뜩 찍어내고 있어야 하지만, 양산 시점을 내년 초로 늦춘 상황이죠. 그래도 테슬라는 문제없이 양산할 확률이 높아 보이긴 합니다. 작년에 94만대나 생산했고, 사이버트럭을 생산할 텍사스 공장(현재는 모델Y만 생산 중)도 이미 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 포드 홈페이지의 F-150 라이트닝 가격표. F-150 라이트닝은 기본형에는 98kWh, 고급형에는 131kWh의 대용량 배터리가 들어가는 풀사이즈 전기 픽업트럭이다. 기본 가격은 3만9974달러로, 미국에서 판매되는 아이오닉5 기본 가격(4만4000달러)보다도 저렴하다. 지난 26일에 연간 15만대 규모로 양산에 들어갔다. / 포드 홈페이지
◇ 100여년 포드 역사의 유물처럼 여겨졌던 ‘루지 콤플렉스’에 포드의 최첨단 전기차 공장 짓고 새 역사 만들겠다고 선언
하지만 리비안은 좀 심각해 보입니다. 자동차 양산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일정이 계속 늦어지고 있습니다. 올해 안에 양산을 못 하면 큰 위기에 빠지거나 양산으로 가지 못하고 회사가 주저앉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드의 F-150 라이트닝 양산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풀사이즈 전기 픽업트럭으로는 세계 최초 양산이기도 하고요. 포드가 전기차 전체에선 늦었지만, 전기 픽업트럭 보급에선 선두가 됐기 때문입니다. 현재로서는 포드 이외에 어떤 회사도 풀사이즈 전기 픽업트럭을 양산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 포드, F-150 라이트닝만 연 15만대 생산체제... 예약주문 이미 20만대 넘고, 예약자의 75% 이상이 포드 브랜드 구입해본 적 없는 신규 고객
이날 행사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요. 테슬라가 미래 자동차산업을 독차지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레거시 기업들도 이대로 물러나진 않는다는 겁니다. 지난 26일의 F-15- 라이트닝 양산시작 이벤트는 아래의 유튜브 링크를 클릭하시거나, 유튜브에서 ‘F-150 Lightning Launch’로 키워드 검색을 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40분 분량입니다. 자동차 산업에 관심이 많다면, 이 글을 읽지 않고 바로 동영상을 보셔도 좋고요. 자동차를 잘 모르시더라도, 이 글을 읽고 행사를 본다면 더 많은 부분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리하자면, 포드처럼 전기차에서 크게 뒤진 것처럼 보였던 기업도 자사의 핵심 제품을 전기차로 바꿈으로써 전세를 역전할 기회가 있을지 모릅니다. 왜 그런지를 다섯 가지 포인트로 설명 드려 보겠습니다.
▲ 포드 F-150 라이트닝의 프렁크(프론트 트렁크)는 방수 처리가 돼 있어 물청소도 가능하다. / 포드 유튜브 캡처
◇ 1. 기존 회사가 전기차 핵심 제품군을 장악하고 선도할 기회는 아직 충분하다
이번 행사에서 중요한 점은 포드가 자사의 핵심 중 핵심인 모델을 전기차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내연기관차 모델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고 수익성이 좋은 것은 일단 내연기관차 중심으로 놔두고, 다른 모델부터 전기차로 조금씩 바꿔보자’라고 수세적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 적극적인 공세로 나왔다는 게 중요합니다. 어차피 전기차가 대세라면, 우리가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차, 고객에게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모델을 전기차로 바꾸겠다는 자세입니다.
포드의 F-150이 어떤 모델입니까. 미국에서 지난 40년간 연속으로 가장 많이 팔린 차종입니다. 세단·SUV·픽업트럭 통틀어서 단일 모델로 가장 많이 팔린 모델, 포드를 먹여 살리는 효자 중의 효자 상품이죠.
게다가 풀사이즈 픽업트럭은 미국인의 생활양식을 대변하는 아이콘과도 같습니다. 매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3 차종은 포드 F-150, 쉐보레 실버라도, 닷지 램입니다. 즉 1~3위는 거의 항상 풀사이즈 픽업트럭 차지이죠. 한국에서 판매되는 쉐보레 콜로라도는 실버라도보다도 한 등급 작은 미드사이즈 픽업트럭입니다. 한국에서는 콜로라도조차 덩치가 너무 큰 것 같은데, 미국에선 콜로라도보다도 더 큰 풀사이즈 픽업트럭이 단연 인기입니다.
즉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인 F-150을 전기차로 바꾸는 것은 지금까지의 전기차 전환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테슬라가 모델3·Y 로 전기차 시대를 앞당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준중형 세단·SUV에 한정된 일이었습니다. 풀사이즈 전기 픽업트럭이 대량생산·판매된다는 것은 미국인의 카라이프가 전기차 중심으로 가는 제2의 전환점을 알리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내연차 중심의 기존 자동차회사인 포드가 테슬라·리비안 같은 신흥업체에 맞서서, 특정 영역(그러나 핵심 영역)의 주도권을 빼앗아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포드가 픽업트럭을 전기차로 바꾸는 것에서만큼은 신흥업체를 리드하기 시작했다는 거죠.
F-150이 지난 40년간 미국 자동차 판매 1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는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 업체도 도요타가 툰드라, 닛산이 타이탄 등의 풀사이즈 픽업트럭을 내놓으며 오랫동안 이 시장에 도전해 왔지만, 아직 미국 업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거든요. 미국사회의 정서와 연결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픽업트럭은 일반환경뿐 아니라 가혹환경에도 견뎌야 하고, 그러면서도 편의성으로도 어필해야 하기 때문에 포드 등의 노하우를 따라잡는 게 일본업체로서도 쉽지 않다는 겁니다.
즉 포드는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제품, 오랫동안 검증받으며 신뢰를 쌓아온 제품을 전기차로 만들어 이기겠다는 겁니다. 물론 내년 초에 테슬라가 사이버트럭을 내놓으며 파란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픽업트럭은 처음 만들어서 성능·신뢰도를 확보하기에 까다로운 부분이 있어서, 테슬라로서도 불안한 요인이 있지요. 설령 품질문제 없이 사이버트럭이 나온다 해도, 픽업트럭 시장 자체가 크기 때문에, 서로의 시장을 빼앗기보다는 전기 픽업트럭 시장 자체를 키우는 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F-150 라이트닝은 가격 경쟁력도 상당합니다. 기본가격이 3만9974달러, 즉 4만 달러도 되지 않거든요.(물론 최상급 모델에 고급 옵션까지 더하면 10만 달러까지 올라갑니다만). 리비안 R1T는 기본가격만 6만 달러대로 F-150 라이트닝보다 훨씬 비싸고요. 사이버트럭은 3만9900달러부터 시작한다고 하지만, 아직 양산 전이기 때문에 확정적이지도 않고, 고객이 차를 받으려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게다가 F-150 라이트닝은 기본형·고급형 할 것 없이 앞뒤 차축 양쪽에 각각 모터가 탑재되는 4륜구동 방식입니다. 다만 표준 모델은 최대출력 426마력, 상위 모델은 최대 출력 563마력으로 차별화되죠. 사이버트럭 기본형의 경우 기본가격은 F-150 라이트닝과 비슷하지만, (후륜에만 모터가 들어가는) 후륜구동 방식입니다. 기본형끼리 비교하면 포드 쪽이 우위입니다.
게다가 F-150 라이트닝에는 기본형도 98kWh, 고급형은 131kWh 용량의 큰 배터리가 들어갑니다. 차량의 덩치도 크고 배터리 원가만도 상당할 텐데, 기본형 가격을 3만9974달러로 묶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중간급을 6만 달러 내외로 구입한다 해도 꽤 매력적이지요. 포드의 경우 이미 내연기관차 F-150을 대량판매하면서 이 차종의 마진율을 충분히 확보했고, 픽업트럭의 개발 노하우가 쌓여 전기차 버전 개발비도 최소화함으로써 가격 경쟁력을 높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테슬라가 기술혁신 능력을 발휘해 내년 초 사이버트럭을 경쟁력 있는 가격·성능으로 내놓고 포드 등을 압박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포드의 독무대이고요. 내년에 테슬라 사이버트럭과 쉐보레 풀사이즈 픽업트럭인 실버라도 전기차 모델이 나온다 해도, 양상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현대자동차 ‘아이오닉5′ 미국 판매 모델은 77.4kWh 용량의 배터리를 탑재했고 크기도 훨씬 작지만, 미국 내 기본 가격이 4만4000달러입니다. 차량 성격이 많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기본 가격이 비슷할 경우 어떤 차가 선택받을지 생각해 볼만합니다. 현재는 전기차 공급이 모자라기 때문에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상황이지만, 시장이 성숙했을 때 포드가 F-150 라이트닝 같은 풀사이즈 전기 픽업트럭을 이 정도 가격으로 대량 공급할 수 있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요.
F-150 라이트닝은 차량 성능도 뛰어납니다. 상위 모델의 경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에 걸리는 시간이 4초대 중반입니다. 이는 현행 포르셰 911 기본모델, 10년 전의 포르셰 911 터보 가속력에 맞먹는 것으로, 고성능 스포츠카·수퍼카에서나 맛볼 수 있는 수준이죠. 또 전기차는 주행감이 부드럽고 조작에 대한 반응도 즉각적입니다. 기존 내연기관 풀사이즈 픽업트럭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성능이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큰 차별성과 만족감을 줄 수 있습니다.
최대 적재 능력은 표준 모델 기준 900kg이고요. 견인 능력은 상위 모델의 경우 4.5t입니다. EPA(미국환경보호국) 기준으로 1회 충전 주행거리는 370km에서 480km 정도입니다. 가정용 등의 충전시스템을 쓰면 배터리가 빈 상태에서 풀충전까지 8시간 걸리고요. 최대출력 150kW로 급속충전하면 40분에 배터리의 80%를 충전할 수 있습니다.
또 미국은 취미나 일상생활에서 전기로 작업할 일이 꽤 있는데요. 전기톱으로 합판을 자른다든지 할 때, 장소에 제약받지 않고 F-150 라이트닝의 배터리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실내에 2개, 차량 앞쪽에 4개, 적재함에 5개의 전기 소켓이 마련돼 있습니다.
이 차는 앞쪽에 엔진이 없기 때문에, 프렁크(프론트 트렁크)에 400L(리터)의 공간이 마련돼 있어 180kg까지 짐을 실을 수 있습니다. 기내 반입 수하물 2개와 여행가방 1개, 또는 골프채 2개를 수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픽업트럭이니까 뒤에 큰 적재함이 있지만, 앞쪽의 밀폐된 공간에도 따로 물건을 실을 수 있는 거죠. 적재함은 물론, 프렁크 내부도 방수 처리가 돼 있어 물기 있는 물건을 싣거나 물청소도 가능합니다. 이 밖에 15.5인치 대형 터치스크린이 달려 있는데요. 음성제어, 클라우드 접속 내비게이션, 애플 카플레이, 구글 안드로이드오토의 무선 접속, 아마존 알렉사 등과의 연결도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F-150 라이트닝은 기존 내연기관 F-150이 주지 못하는 매력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가격적으로도 장점이 있고요. 따라서 F-150 라이트닝이 큰 품질문제 없이 시장에 안착하기만 한다면, 소비자에게 상당한 만족감을 줄 것이고, 한번 F-150 라이트닝 같은 전기 픽업트럭을 맛본 소비자는 다시 내연기관차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이민자 집안으로 5대째 포드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메간 저거스키(Megan Gegeski)가 지난 26일 포드의 전기 픽업트럭인 F-150 라이트닝의 양산 이벤트에서 행사 담당자로서 무대에 올라 연설하고 있다. / 포드 유튜브 캡처
◇ 2. 내연차 시대의 유산을 마이너스로만 생각하지 말고, 스토리로 엮어 소비자를 감동시킬 플러스 요인으로 바꿔라
26일의 F-150 라이트닝 행사가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테슬라가 갖지 못한 포드만의 차별성과 강점을 잘 살려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슬라의 강점은 일론 머스크라는 인물이 가진 비전이죠. 전기차 보급을 통해 탈탄소화를 앞당긴다든지, 화성에 인류를 정착시키겠다든지 하는 원대한 꿈에 소비자들도 동화되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포드는 과거유산의 산물, 앞으로 사라져야 할 내연기관차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 행사에서 포드는 이런 부정적 인식을 바꾸는 데 일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포드의 지난 100여년 역사의 의미를 스토리로 잘 엮어 전달함으로써, 왜 포드가 존재해야 하는지, 왜 포드가 앞으로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테슬라를 따라가려고 한게 아니라, 테슬라가 갖지 못한 포드 만의 강점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선 F-150 라이트닝 행사가 열린 장소, ‘루지 일렉트릭 비클 센터(Rouge Electric Vehicle Center)’라는 전기차 공장 자체가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연간 15만대의 F-150 라이트닝을 생산할 예정인 이 시설은 그 유명한 포드 루지 콤플렉스(Rouge Complex) 안에 새로 지어졌습니다.
포드의 100여년 역사를 상징하는 루지 콤플렉스는 디트로이트 강과 루지 강 합류점에 있는 복합 생산시설입니다. 2.4㎢ 의 거대한 면적에 93개 건물이 들어차 있죠. 98년 전인 1924년에 전체 시설이 완공됐고요. 전성기 때는 10만명이 일하던 ‘자동차 왕국’이었죠. 제철설비까지 모두 갖춰 ‘철광석만 집어넣으면 자동차가 나오게 만든다’는 창업자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의 꿈을 실현한 곳입니다. 그래서 루지 플랜트(공장)가 아니라 콤플렉스(복합시설)이라 불렸죠. 공장이라기보다는 현대 자동차산업의 체계가 탄생한 하나의 세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 루지 공장은 강성노조의 득세로 생산성이 급감하는 등의 문제로 가동률이 크게 줄면서 폐허로 변했습니다. 2004년에 포드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일부 시설을 재가동했지만, 옛 영화(榮華)는 공장 옆 포드 박물관 내에 자취로만 남아있을 뿐이었죠. 저는 2008년에 루지 콤플렉스를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요. 고용인원 5000명 정도가 내연기관 픽업트럭 ‘F-150′을 만들 뿐, 공장시설 대부분은 방치돼 있었습니다. 전성기 때 인력의 20분의 1로 줄어있었던 겁니다.
루지 콤플렉스는 미국 자동차산업에 강성노조가 출현하게 된 계기를 만든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1937년 경영진이 동원한 폭력배와 노조 사이의 유혈 폭동이 일어나면서, UAW(전미자동차노조)의 권한이 크게 강화됐고, 이후 노조 요구가 도를 넘어서면서 경영을 압박하기에 이릅니다. 포드의 재정상황이 좋았던 1990년대까지는 문제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경영사정이 악화하면서 이런 노사관행이 회사 경쟁력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경영 개혁에 노조는 끝까지 저항했고 결국, 제품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면서 판매가 감소했고, 그것이 생산 감소, 고용감소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그곳에 포드의 미래를 책임질 최첨단 전기차 공장이 완공돼 지난 26일에 양산 기념 이벤트가 열린 겁니다. 과거의 영광, 그러나 암울한 역사로 점철됐던 그 루지 콤플렉스에 한복판에 말입니다.
게다가 이 공장은 불과 1년여 만에 완공됐습니다. 2020년 가을에 땅파기 작업에 들어가 불과 1년여 만에 공장 건물이 지어졌고. 올해 4월 말부터 양산에 들어간 것이죠. 기존의 포드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스피드입니다.
26일 이벤트에선, 시작과 동시에 전면 대형화면에 ‘Ford Rouge Center’의 정문을 드론이 날아가는 장면이 뜹니다. 포드의 원류이자 지난 100여년 역사를 함께 한 루지 콤플렉스를 비추며 시작한 것에서, 이미 스토리의 방향이 다 나온 것이죠. 그다음에 화면이 바뀌면서 ‘Rouge Electric Vehicle Center’ 건물로 연결되더군요. 건물 간판 아래엔 ‘Home Of F-150 Lightning’이라는 문구의 대형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고요. 포드의 100여년 역사와 현재, 미래를 연결해 보여주는 수법이 근사했습니다.
그리고 포드는 포드에서 일하는 ‘사람’의 사례를 통해 포드 패밀리와 역사의 가치를 보여줬습니다. 이날의 스토리 핵심으로 메간 저거스키(Megan Gegeski)라는 젊은 여성 노동자를 내세웠습니다. 메간 집안은 5세대에 걸쳐 포드에서 일해 왔습니다. 메간의 고조부가 1906년 미국으로 이민와 루즈 콤플렉스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공장에서 일한 이래, 5대에 걸쳐 포드 패밀리가 된 것이죠. 새로 만들어진 F-150 라이트닝 공장의 최종검사 파트에서 일하는 메간은 이번 양산 기념 이벤트의 책임자로 임명돼 영상에도 출연하고 무대의 첫인사 주인공으로도 발탁됐습니다. 그리고 헨리 포드의 증손자이자 현재 포드 이사회 의장인 빌 포드와도 대담하며, 자신의 가족에 있어서 포드가 갖는 의미를 얘기했습니다.
이것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포드의 100여년 역사가 담긴, 그러나 최근까지 사실상 버려져 왔던 공간에서 포드의 미래를 다시 만들어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엔 포드의 역사와 함께 한 포드 가족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스토리를 제대로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어쩌면 테슬라가 갖지 못한 매력을 전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전기차로 가는 길이 꼭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거죠. 테슬라에 비해 너무 많은 레거시 코스트를 안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위태로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모든 것은 구성원들이 얼마나 성심을 다해 일하고 숨은 능력을 발휘하느냐에 달린 것이니까요. 포드가 가진 레거시를,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승화시켜 구성원의 열정을 한 방향으로 모아 위기를 극복해 내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 포드 이사회 의장인 빌 포드가 지난 26일의 F-150 양산 이벤트 무대에 올랐다. 빌 포드는 포드자동차 창업자인 헨리 포드의 증손자이다. / 포드 유튜브 캡처
◇ 3. 전기차 전환을 결정했다면, 어렵더라도 아주 높은 수준의 목표를 세우고 구성원 모두를 이끌어야
포드 CEO인 짐 팔리는 지난 26일 행사에서 포드가 과거에 어떤 회사였는지 설명합니다. 100여년 전 포드의 창업자 헨리 포드가 세계 최초의 대량생산차 모델T를 만들면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해 오늘날의 자동차 산업을 만들어냈고, 2차대전 때는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를 만들어 세상을 구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것 등을 강조하죠.
그리고 그는 포드 F-150 라이트닝이 어떤 기믹(gimmick·관심을 끌기 위한 술책·장치)이 아니며, PR이나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을 위한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포드는 전기차를 타야 한다고 소비자에게 조금도 강요할 생각이 없고, 고객에게 정말 뛰어난 가치를 가진 전기 픽업트럭을 제공해 고객이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짐 팔리는 “F-150 라이트닝은 경쟁 트럭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제공하고, 또 경쟁 트럭보다 저렴하다. 경쟁자들이 언제 실제로 판매를 하게 되건 말이다”라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이끌어 냈습니다. 물론 포드가 여유 부릴 입장은 전혀 아니지만, 전기차 시프트에 올인하기로 했다면, 리더가 조급함을 내보여서는 안 되겠죠.
그러면서 짐 팔리는 “이미 포드는 연간 15만대의 F-150 라이트닝 생산 시설을 갖췄고, 내년 말까지 연 60만대의 전기차 생산 시설을 확보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4년간, 즉 2026년까지 총 200만대의 전기차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테슬라와 다른 모든 업체에 도전해 톱 전기차 메이커를 목표로 한다고 했죠. 당장 포드가 제시한 생산량으로는 물론 톱 전기차 메이커가 되기 어렵겠죠. 다만 장기적으로 톱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포드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자문했습니다. 과거의 과감하고 혁신적이고 전향적으로 생각하는 포드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기차라는 레이스에서 이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포드가 가진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2030년 세계 전기차시장 점유율 5%라든가, 테슬라·GM에 이어 미국 시장 3위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톱을 노리겠다’는 겁니다. 과거 유산이 많다고 해서 수세적으로 나서진 않겠다는 거죠. 레거시 업체일수록, 기존의 구성원들이 의기소침해 하거나 의욕을 잃지 않도록, 도전할 목표를 더 높게 세우고 그것을 달성해 나가겠다고 CEO가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 전미자동차노조(UAW) 포드 지부의 로라 디커슨이 지난 26일 세계 최초의 전기 풀사이즈 픽업트럭 대량생산을 기념하는 F-150 라이트닝 이벤트에서 연설하고 있다. / 포드 유튜브 캡처
◇ 4. 기존 멤버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테슬라처럼 백지상태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나가는 업체에 비해, 포드 같은 레거시 업체는 신경 쓸 부분이 한둘이 아니죠. 특히 내연기관차에 특화된 수많은 생산·기술인력을 어떻게 전기차 시대에 맞게 조정해 나갈 것인지가 큰 과제인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 인력을 부정해버리고 책망만 하거나 지나치게 배제하고 차별하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포드를 살펴보죠. 전기차 전환을 위해 기존 인력을 일부 퇴직시키거나 전환배치시키고, 전기차·소프트웨어 인력을 신규로 뽑는 작업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테슬라와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테슬라를 그대로 따를 수 없고, 포드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테슬라는 노조가 없지만, 포드의 인력은 UAW(전미자동차노조)에 속해 있죠. 또 딜러망 없이 온라인판매를 하기 때문에 거액의 판매수수료가 들지 않는 테슬라와 달리, 포드는 딜러들과의 관계도 잘 다뤄야 합니다. 생산인력뿐 아니나 연구개발 인력도 전기차·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큰 조정이 필요하죠.
하지만 이런 모든 것에 대해 기존 인력을 부정하고 몰아세우는 방식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 인력의 원한과 반발이 너무 커져서, 효과적으로 구조조정을 하지도 못하고, 남아있는 많은 인력도 마음이 떠나 당장 필요한 사업, 당장 돈을 벌고 안정을 기해야 하는 사업에서조차 균열이 일어날 위험이 커질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테슬라와는 다르니까요. 다른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잘 극복해나가고, 어렵지만 최선의 결과를 내는 것이 경영일 겁니다. 포드가 5대째 포드에서 일해온 저거스키 가족을 이번 행사의 스토리텔링 핵심으로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벤트를 총괄한 메간 저거스키의 아버지(그 역시 30년간 포드에서 일하고 은퇴했습니다)는 이렇게 얘기하죠. “당신도 당신의 자녀가 본인 직업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주길 바랄 것이다. 우리 딸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서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메간에 이어 등장한 포드 이사회 의장 빌 포드는 무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날입니다. 오늘의 결과를 내기까지 밤늦게까지 일하고 주말도 반납하며 가족과 함께 할 시간까지 희생하며 일해준 여러분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여러분은 전기차 제조에 관해 포드와 미국이 맞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그리고 루지 전기차 센터가 그것을 이끌 것입니다. 미국 제조업의 다음 혁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포드의 혁명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이날 행사에서 UAW가 협력의 파트너로 적극 참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UAW 포드 지부의 간부가 무대에서 연설할 때에는 무대 뒤로 비치는 영상엔 UAW 마크가 먼저 등장하고 그다음으로 포드 마크가 오른쪽에 나오더군요. 빌 포드 이사회 의장, 짐 팔리 CEO, 메간 행사 책임자 등이 연설 중에 모두 UAW의 기여와 협력에 대한 감사를 강조했습니다. UAW 포드 지부 간부도 이날 행사에 참석한 빌 포드 이사회 의장, 짐 팔리 CEO, 엔지니어, 딜러, 공장 가동을 불과 1년여 만에 가능케 한 UAW 포드 노조원들의 성과를 축하하고, 미국 땅에서 UAW 멤버들 손으로 만들어진 F-150 라이트닝의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물리적으로 당장 끊어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해결책을 찾는 수 밖에 없겠죠. 잘잘못을 따지자면 이야기가 한없이 이어지겠지만, 조직에서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다면 그다음에는 원한과 분노,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만 측정하고 그 가치를 돈으로 받아내야겠다는 오기밖에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만, 미래와 다음 세대의 발전을 위한 방향을 서로 이해해 가면서도 가능한한 빨리 길을 찾아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죠. 이 부분에서 GM이나 포드의 전략을 참고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짐 팔리 포드 CEO가 지난 26일의 포드 F-150 라이트닝 양산 기념 행사에서 무대에 올랐다. / 포드 유튜브 캡처
◇ 5. 전기차 전환을 새로운 고객, 미지의 고객을 끌어들이는 무기로 활용해야
자동차회사에는 고객 확보를 위해 중시하는 지표가 2개 있습니다. 하나는 재구매율(repeat purchase rate), 또 하나는 (타사 고객) 획득률(conquest rate)입니다.
한번 사준 고객이 다음 차 살 때 계속해서 그 브랜드를 구매해준다면, 그 브랜드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기존 고객의 충성도, 즉 기존 고객의 재구매율만 높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브랜드가 정체되고 결국엔 판매도 떨어질 수 있다는 거죠. 왜냐하면 기존 고객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게 되고, 나이가 들면 구매력이 점점 떨어지기 마련이니까요.
많은 브랜드가 젊음을 지향하려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새로운 고객, 젊은 고객을 계속 끌어들여야 생명력이 유지되겠죠. 그래서 중요한 것이 획득률입니다.
포드가 작년부터 F-150 라이트닝 사전 예약을 받으며 놀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작년 5월 처음 F-150 라이트닝을 공개한 이후 예약 대수가 20만대를 넘은 것입니다. 당초 포드는 F-150 라이트닝을 연간 8만대 정도 생산하는 시설을 지을 예정이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예약 규모에 깜짝 놀라 서둘러 생산 대수를 배로 늘려 연 15만대를 만드는 공장을 짓게 됐죠.
여기서 놀라운 것은 생산량을 2배로 늘리는 작업을 불과 반년 만에 완료했다는 겁니다. 과거의 포드답지 않은 빠른 대응력이 인상적입니다. 포드가 처음부터 전기차 신공장의 생산 유연성을 극대화했다는 것도 이유이긴 한데요. 그렇다 해도 이렇게나 빨리 생산능력을 2배로 늘릴 수 있었다는 것은 포드가 과거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테슬라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포드도 피나는 노력과 자기 혁신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첫 번째보다 더 중요한 두번째 사실이 있는데요. ‘F-150 라이트닝 예약자 가운데 75% 이상이 포드 브랜드 차량 구입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포드 같은 올드(old)한 회사로선 놀랍고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드 차량을 구매 리스트에 평생 넣지 않았을 사람들, 특히 테슬라의 본고장인 캘리포니아 주민, 혹은 젊은 고객이 F-150 라이트닝 예약에 몰렸다는 것에 포드 담당자들이 크게 고무됐다고 합니다.
포드가 차량을 제때에 생산해 고객에게 인도하고 만족시켜야 한다는 게 과제이긴 한데요. 밀려 있는 주문을 잘 소화만 할 수 있다면, 포드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크게 높일 수 있을 테고요. 테슬라에 끌려가기만 했던 기존 자동차회사들도 주력 전기차 제품군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SDV(Software Defined Vehicle·소프트웨어가 가치를 규정하는 자동차) 전환에서 테슬라가 앞서 있는 게 사실이지만, F-150 라이트닝 역시 인포테인먼트·배터리관리 기능을 OTA(Over The Air)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수준까지 차량 구조가 진화됐고요. 테슬라도 충분한 디바이스(테슬라 차량)를 시장에 깔아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기존 업체가 추격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특히 중요한 것이 소비자가 꼭 사고 싶어할 만한 전기차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일 텐데요. 미국에서 포드가 F-150 라이트닝으로 전기 픽업트럭 시장을 선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기존 자동차회사의 본격적인 반격과 경쟁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원석 국제경제전문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