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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족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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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스크랩 봉화.춘양일대의정자..소천리..사미정...
홍왕식 추천 0 조회 36 13.02.03 23: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왼쪽 측면 전경

왼쪽 측면 원경

사미정에서 내려다 본 풍경

올려다 본 정면 전경

뒷 담장 밖 설명 표지석

건축 이야기.

봉화읍 소재지에서 36번 도로를 따라 태백 울진 쪽으로 20km쯤 가면 35번 안동으로 가는 도로를 만난다.

35번 도로를 따라 1.5km를 가면 도로를 따라오며 흐르는 운곡천 오른쪽으로 마을이 보인다.

운곡천을 건너 마을 길로 들어서서 200여 m 가면 길가에 옥계정이 보이고 내쳐 잠깐 가다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왼쪽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도로를 따라 몇 걸음 걷다보면 왼쪽으로 운곡천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바로 그 앞에 사미정의 후면이 보인다.

사미정에서 보면 그 앞으로 맑은 물이 바위 사이를 굽이쳐 흐르며 그 물 건너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물은 저 위쪽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사미정 앞 큰 바위들 사이로 암반 위를 넘나들며 돌아나간다. 물은 맑고 하늘은 푸르다.


건축 배경

옥천 조덕린은 1727년 정미년에 귀양지 종성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집 뒤에 사미당을 짓게 하였다.

그것을 1730년대 중반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조덕린은 사미당의 기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종성에서 귀양살이를 한 지 3년째 정미년이었다.

그 해의 6월이 정미이고,

그 달의 22일이 정미이고,

그 날의 미시가 정미로 4미(未)가 합하는 날이었다.

이와 같은 날을 만나기도 어려운데다 이 때 [미년(未年) 미월(未月) 미일(未日) 미시(未時)]에 집을 지으면 거리낌이 없다는 음양가의 설과 『중용』13장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군자의 도가 4가지인데 나는 그 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

.[君子之道四 某未能一焉]”를 생각하고 이 도를 행하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겨, 3천 리 밖의 집안 아이들에게 편지하고 이날을 기해서 집을 짓도록 하였다.”

자손들은 조덕린의 편지에 적힌 뜻을 받들어 옥천산 아래 소라동(召羅洞) 별서(別墅) 뒤에 집을 짓고 사미당이라 하였다.

1730년 그는 낙동강 상류에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짓고 후학들을 지도하며 5, 6년을 보냈다.

그 후 사미당 뜯은 재목으로 소라동문 밖 암석 위, 즉 현 위치에 정자를 짓고 면가헌(眄柯軒)이라 이름 붙이고, 거문고 연주하고 글씨 쓰며 즐기고 주변을 산책하며 지냈다.

면가헌이 언제 사미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사미정 현판과 안에 걸린 현판 마암의 글씨가 채제공의 친필이라면, 채제공이 조덕린의 묘갈을 짓는 해가 1788년이므로 그 즈음해서 면가헌을 사미정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마암은 조덕린의 손자 조진도(趙進道)의 호이다.


건축 구성

사미정은 앞을 제외한 3면에 담을 둘렀다.

앞면은 바로 계곡을 마주하고 있다.

출입은 뒷담에 난 문이나 뒤에서 보아 왼쪽 담에 있는 옆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사미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어칸의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 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좌측의 온돌방과 마루방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칸을 두었으며, 우측방은 통칸 온돌방으로 꾸몄다.

어칸마루의 전면과 우측방 사이에는 4분합들어열개문을 설치하였다.

사면에는 퇴를 두었는데 전면과 양측 면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5량가인데 대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량을 받게 하였으며 귀에는 선자연을 설치하였다.


현판
사미정(四未亭)

채제공의 친필로 쓰여진 사미정 현판 ‘사미정(四未亭)’은 조덕린이 귀양지 종성에서 편지를 보내 짓게 한 것이다.

1727년 6월 22일 미시가 4정미(丁未)가 합하는 날인데 미년(未年) 미월(未月) 미일(未日) 미시(未時)에 집을 지으면 거리낌이 없다는 말과 『중용』13장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군자의 도가 4가지인데 나는 그 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

[君子之道四 某未能一焉]”의 뜻을 따라 처음엔 집 뒤에 지어 사미당이라 이름하였다.

10여 년 후 현 장소로 이건하였다.

‘마암(磨巖)’은 그 손자 조진도의 호이다.

현판인 ‘사미정’과 안에 걸려 있는 현판인 ‘마암’은 정조 때의 재상인 채제공(蔡濟恭)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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