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믿음과 헌신: 붓다와 보살 숭배
5. 붓다들
5.1 아촉불
『8천송반야경』과 『유마경』에 더 많은 정보가 있기는 하지만, 아촉불 (阿?佛, Ak?obhya)의
신화와 그에 대한 숭배의식의 중요한 문헌 자료는 『아촉불국경(阿?佛國經,
Ak?obhyavy?ha S?tra)』이다.
이 경전이 최초로 한역된 것은 2세기 말경이고, 한 종류 이상의 교정본이 있다. 그러므로
번역 연대로 보면 『아촉불국경』은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초기 대승경전의 하나이다.
그것은 정토학파의 발전에 대한 초기문헌의 단계를 잘 보여 주고, 그리고 다음에 아미타불에
중점을 둔 부파들과 관련해서 확장되고 정교해진 단계, 그리고 점차 쇠퇴한 극락과 관련된
단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Nattier 2000: 73, 79-80을 보라). 이 경전은 원래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쿠샨왕조의 지배 아래 있던 북서 인도 지방어인 간다라어로 쓰여졌던
것 같다(Dantinne 1983: 1).
『아촉불국경』에 따르면 환희(歡喜, Abhirati)라고 하는 불국토가 아주 멀리 동쪽에 있었다. 그
땅에는 오래전에 성불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승려가 있었다. 그 승려는 보살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이루기가 매우 어려운 커다란 서원을 세웠다. 이 서원은 불도를 따르는 도중에 결코
어떤 악의도 품지 않을 것이며, 결코 낮은 단계로 물러서지 않으며, 절대 계율을 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또 승려로서 불교 이외의 어떤 다른 가르침에도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여성 앞에서는 항상
금욕하고 감동을 주며 위엄을 지키고 사려 깊은 가장 완벽한 승려가 될 것이라고 서원하였다.
이러한 서원은 단지 현재의 삶뿐 아니라 신구의(身口 意)로 행하는 모든 삶에 적용된다. 그는
항상 벌받을 범죄자들을 구제할 것이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구제할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서원, 특히 계율의 완성은 중요하다. 첫째, 그것은 아촉불이 지닌 큰 서원의
범위를 의미한다. 둘째, 결과적으로 붓다인 보살은 자신이 지닌 강한 서원을 고수함으로써
위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쌓게 되며, 그 직접적인 결과로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무한한 힘을 지니게 된다. 마지막으로 경전 자체에서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보살이 지닌 청정한
계율로 인해 그는 마침내 청정한 불국토를 얻는다. 즉 환희국이라는 아촉불의 국토는 완전한
정토이다.
이 보살은 위대한 서원의 결과로 놀라운 신통력을 가진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수기를 받는다. 경이로운 시간 동안의 엄청난 노력 끝에 이제 모든 것은 완성되었고, 그는
실로 먼 동쪽의 환희라는 땅을 통치하는 아촉불이 된다. 아촉불의 깨달음에 대해 악마인
마라는 그를 괴롭히지도 않고 방해하지도 않는다. 경전에는 아촉불의 불국토의 즐거움이
약간 묘사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촉불에 대한 염불의 근거인 그의 위대함을 의미하며,
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기 때문이다. 그 정토에는 거대한 나무 아래 붓다의 좌대가
있다.
보리수 주변에는 종려나무와 자스민 나무가 줄지어 있다. 나무들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며 모든 세속적 음악을 초월하는 조화롭고 격조 높은 소리를 낸다. 게다가 … 그
불국토에는 중생들이 받는 세 가지 재앙이 없다. … 불국토 안에 있는 모든 중생들은 열
가지 선한 행위[십선업(十善業)]들을 완성하였다. 그 땅은 협곡, 가시나무 혹은 자갈 등이
전혀 없어 손바닥처럼 평평하고 빛난다. 그 땅은 마치 솜을 밟으면 바로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발을 들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처럼 푹신하다. (Chang 1983: 322;
Dantinne 1983: 189-90 참조)
환희국에는 고통, 거짓말, 추악함, 혹은 냄새나는 것들이 전혀 없다. 감옥과 같은 것도 없으며
또한 이교도도 전혀 없다. 나무들은 꽃과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며 또한 향기롭고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나무들도 있다. 음식은 원하는 만큼 나타난다. “그곳에는 … 청정하고 깨끗한
정원과 공원 휴식처가 많이 있다. 중생들은 모두 진리의 법(法) 안에서 환희하며 살아간다”
(Chang 1983: 322). 그곳에는 질투도 없고 여성들은 대단히 아름답고 모두 월경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앞의 책: 319, 323; Dantinne 1983: 97, 194 이하).
더욱이 그 땅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안전하며 임신에서 출산까지 전혀 오염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 이 모든 것은 아촉여래의 근원적 서원력 때문이다. … 그
불국토에는 이와 같은 평화와 행복이 존재한다. … 상업이나 상인도 없고 농장이나 농사일도
전혀 없다. 언제나 행복이 충만하다. … 그 불국토에서 노래 부르고 노는 일에는 감각적
욕망이 전혀 없다. 그곳의 중생들은 오직 법에서 나온 환희를 만끽할 뿐이다.
(Chang 1983: 325; Dantinne 1983: 201-2 참조)
티베트본에 따르면 환희국에는 육체적 성교란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인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서 바라보자마자 성적인 생각은 멈추어지고 그는 불순함으로부터 벗어나
사마디에 들어간다. 한편 여자는 단지 한 번 힐끗 바라보는 행위로 임신하게 된다. 임신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Dantinne 1983: 196).87)
분명 환희국은 행복에 찬 놀라운 세계이다. 그곳은 모든 위험이 사라진 곳이며, 비참하게
죽어가고 노동에 대한 보상은 적어서 결국 기아와 빈곤,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오염된
세계와 전혀 상반되는 세계이다. 이 모든 훌륭한 것은 아촉불의 위대한 서원과 자비심의
결과이다. 환희국에는 태양과 달도 있지만 이들은 아촉불의 광명에 완전히 가려져 있기
때문에 빛을 내지 못한다 (Chang 1983: 324).
탐욕스러운 갈망으로 이 정토에 태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욕망과 집착을 가진 사람은
그 불국토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선근(善根)을 심고, 청정한 행위로 선근을
자라게 한 사람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앞의 책: 323; Dantinne 1983: 199). 사실
환희국에 태어나고자 하는 주된 이유는 아촉불 앞에서 불도(佛道)를 따르는 것이 수행에
가장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토에서도 모두가 대승의 길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문승과 아라한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러한 조건 속에서는 깨달음을 빨리 얻을 수 있다.
환희국에서는 “좌선하면서 자신들의 더러움을 모두 없애지 못하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한다.”
어떻게 이 환상적인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그런 윤회는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 분명했다. 계율을 지키고 정신적인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다. 첫째, 수행자가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그들은 보살의 길을 따라야 하며 환희국의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둘째, 선한 행위들을 통해 얻어진 모든 공덕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어서 ‘전 세계를 밝히기’
위해서다(Chang 1983: 332). 수행자는 명상을 배우고 성스러운 사람들과 자주 만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또한 불국토에 있으면서 법을 설하는 붓다를 염불하는 것도
중요하며 그들처럼 되겠다는 서원도 중요하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미래에 아촉불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촉불의 가피(加被)라는 간접적인 상황 아래서
이루어진다(앞의 책: 332-5).
아촉불과 그의 정토에 대해 주목할 만한 한 가지는 석가모니가 미륵불을 수기하는 것처럼
아촉불도 자신의 후계자에게 수기를 주면서 반열반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아촉불은
마지막에 선정의 힘으로 발생하는 자신에서 나오는 불길로 스스로를 화장(火葬)한다.
아촉불이 가르친 법은 그의 열반 후 오랜 겁 동안 지속될 것이지만 결국 소멸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환희국에 있는 사람들의 공덕이 쇠퇴할 때 일어난다. “그때는 사람들이 정법을
배우는 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법을 설하는 사람들도 그들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Chang 1983: 332). 사람들은 기꺼이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수행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학식 있는 승려들은 은둔할 것이며 결국 정법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보면 환희국의 정토와 아촉불 여래는 석가모니와 이 세계를 모델로
하였지만 모든 측면에서 자비와 영성을 보다 높은 차원까지 고양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되어야만 하는’ 우리의 세계, 즉 꿈의 세계이다. 비록 아촉불 숭배의 확실한 형태는 모르지만
이 사실은 아촉불 숭배의식이 오래되었음을 의미한다.
현재는 아촉불 숭배의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또 숭배의식이 다른 불교국가들의 독립적인
의식 속에 녹아 들어갔을지라도, 기원후 초기에 아촉불 숭배의식을 중시한 지역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은 인도에서 다른 형태의 불교에 의해 초기에 퇴색되었고,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무량수불의 극락정토 숭배가 발달했기 때문에 쇠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촉불은 다른 배경, 즉 후기 인도불교의 탄트라학파(9-12세기)에서
중요한 붓다가 되었다. 이러한 학파를 통해 그는 네팔과 티베트 불교에서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탄트라불로서의 아촉불은 종종 탄트라 의식과 명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만다라의
중심불로 나타난다. 그 속에서 그는 파란색을 띠며, 네 명의 다른 붓다들 즉, 대일(大日)여래,
보생불(寶生佛, Ratnasambhava), 무량광불 그리고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
Amoghasiddhi)과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