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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송송례의 군사활동과 그 결과
1. 제주 삼별초 토멸을 위한 전투지원 활동
송송례는 출륙환도 이후 삼별초봉기로 위기에 처한 개경조정을 구하고 몽골과의 돈독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3차례에 걸쳐 대몽외교를 활발히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별초항전 진압을 위한 군사 활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송송례의 제주 삼별초군 진압 준비와 연관된 군사활동과 관련해서는 아래의 사료가 주목된다.
라-1. 을미일에 원이 제주를 토벌하려고 (고려의) 왕에게 조서를 보내 군사 6,000명과 수수(水手) 3,000명을 선발하라고 하였다.40)
39) 고려시대 원나라 복식문화 수용 및 開剃辮髮 변천에 대해서는 김윤정, 2017, 고려・원 관계 추이와 복식문화의 변천,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을 참조
40) 高麗史 권27, 元宗 13年 12月 乙未. “乙未 元以攻討濟州 詔王 簽軍六千 水手三千”
라-2. 기해일에 초군별감(抄軍別監)을 각 도(道)에 파견하였다.41)
라-3. 신축일에 추밀원부사 송송례와 상장군 서유(徐裕)에게 명하여 군사를 검열하게 하였다.42)
라-4. 경술일에 송송례를 충청도지휘사로 삼았다.43)
위의 사료 라-1을 보면, 1272년(원종 13) 12월 11일(을미일)에 원이 제주를 토벌하고자 고려왕에게 조서를 보내 군사 6,000명과 수수3,000명을 선발하라고 엄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이 토벌하려 하였던 대상은 제주도에 웅거하고 있는 삼별초 잔여세력이었는데, 원나라 황제는 고려군 6,000명과 수수 3,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 징발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원나라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하여 사료 라-2를 보면, 개경 조정에서는 같은 해 12월 15일(기해일)에 각 도에 초군별감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초군별감은 전란이 있을 때 지방에서 효용(驍勇)한 군사를 모집하는 임시적 성격의 관리였다고 생각
되는데, 고려사에서 최충헌집권기인 1217년(고종 4) 1월에 전라초군별감(全羅抄軍別監) 사례가 맨 처음 보이며,44) 고려시대 전체를 통틀어 2번밖에 발견되지 않는다.45) 1272년 12월에 각 도에 분견된 초군별감은 양광도・서해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5도 중심으로 파견되었을 것이다.46) 5도에 나아간 초군별감은 각기 자기 임지에서 과거에 주현별초군(州縣別抄軍) 출신이었던 자들을 우선적으로 모집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41) 高麗史 권27, 元宗 13年 12月 己亥. “己亥 分遣抄軍別監于諸道”
42) 高麗史 권27, 元宗 13年 12月 辛丑. “辛丑 命樞密院副使宋松禮 上將軍徐裕點兵”
43) 高麗史 권27, 元宗 13年 12月 庚戌. “庚戌 諸王・宰樞 享王于新殿 召柳璥・皇甫琦・崔瑛・宋松禮・邊胤等致仕宰樞 侍宴”
44) 抄軍別監은 高麗史에서 崔忠獻執權期 말엽인 1217년(고종 4) 1월에 처음 등장한다. 高麗史 권22, 高宗 4年 1月 庚寅. “庚寅 全羅抄軍別監洪溥馳報 全州軍馬 年前十二月二十六日 催發 行五日 而還州作亂 殺逐長吏 因留住 由是 羅界軍亦不發”
45) 抄軍別監은 高麗史에서 1217년(高宗 4)과 1272년(元宗 13) 2번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 高宗대 契丹遺種의 침입을 막기 위해, 그리고 元宗대 제주도에 할거한 삼별초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초군별감이 任地로 나아갔다.
46) 1272년(원종 13) 12월 당시 北界에는 몽골의 직할령인 東寧府가 설치되어 있었고, 東界 북부 和州 일대에는 雙城摠管府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각 道에 분견된 抄軍別監은 楊廣道・西海道・忠淸道・全羅道・慶尙道 등 5도 중심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사료 라-3을 자세히 살펴보면, 초군별감이 각 도에 파견된 지 2일 후인 12월 17일(신축일)에 추밀원부사 송송례와 상장군 서유가 왕명을 받아 군사를 검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송송례와 서유가 검열한 대상은 지방의 주현군(州縣軍)이 아니라 개경에 있는 중앙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47) 송송례와 서유는 우선 급한 대로 개경에 있는 군사들을 끌어 모아 군사의 수효와 병장기 등을 점검했다고 판단된다.
개경의 군사들을 검열한 이후 송송례는 같은 해 12월 26일(경술일)에 충청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사료 라-4). 송송례가 충청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충청도 지역으로 파견된 초군별감이 충청도 권역에서 어느 정도의 병력을 모았음을 암시해준다.48) 충청도지휘사에 임명된 송송례는 충청도 권역에서 선발된 군사들을 직접 지휘하는 권한을 가졌음에 틀림없다.49) 그 당시 충청도지휘사 송송례 이외 에도 전라도지휘사, 경상도지휘사 등이 추가적으로 임명되었는지는 사료 상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50)
47) 본문의 사료 라-3에서 樞密院副使 宋松禮와 上將軍 徐裕가 1272년(원종 13) 12월 17일(신축일)에 검열한 군사는 5道의 州縣軍(혹은 州縣別抄軍)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는 같은 해 12월 15일(기해일)에서야 각 도에 抄軍別監이 파견되어 지방에서 군사 징집을 겨우 시작했으므로 송송례와 서유가 검열한 군사는 당연히 中央軍 소속의 군사들이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對蒙戰爭期에 고려 중앙군인 2軍6衛는 형식적으로 존재하였고 軍額이 크게 모자라 別抄軍(三別抄・州縣別抄軍) 중심으로 軍制가 재편되었기 때문에 송송례가 검열한 기존의 중앙군인 2군6위의 수효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48) 抄軍別監이 1272년(원종 13) 12월 15일(기해일)에 楊廣道・西海道・忠淸道・全羅道・慶尙道 등 5도 중심으로 파견되었고, 송송례가 忠淸道指揮使에 임명된 것은 같은 해 12월 26일(경술일)이다. 충청도에 파견된 초군별감은 송송례가 충청도지휘사에 임명되기까지 약 10여일 동안 충청도 권역 내에서 날쌔고 용감한 군사들을 어느 정도 끌어 모았다고 판단된다.
49) 忠淸道指揮使 宋松禮가 1272년(원종 13) 12월 26일에 충청도에 내려가서 향후 그 지역에서 모집된 군사들을 직접 지휘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그는 충청도에 파견된 抄軍別監이 충청도 권역에서 군사들을 충분히 모집한 후에 그들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아서 좋다.
50) 1272년(원종 13) 12월 당시 忠淸道指揮使 이외에도 全羅道指揮使, 慶尙道指揮使가 동시에 파견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高麗史・高麗史節要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그 당시에 전라도지휘사와 성격이 유사한 全羅道防護將軍 文景秀가 이미 전라도에 파견되어 있었음이 포착된다(高麗史권27, 元宗 14年 1月 丙子. “丙子 全羅道防護將軍文景秀報 賊船十艘 侵樂安郡”).
사료 라-4에서는 송송례가 충청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고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충청도지휘사 송송례가 담당했을 군사적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아래의 사료를 통해 추론해보기로 하자.
마-1. 임오일에 마강(馬絳)과 대장군(大將軍) 송분(宋玢)이 가까운 도의 전함을 순시하였다.51)
마-2. 임진일에 수로감선사를 파견하여 전함을 인솔하고 남하하게 하였다.52)
마-3. 계묘일에 중군행영병마원수(中軍行營兵馬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정예 기병 800명을 인솔하여 힌두[忻都] 등을 따라 탐라(耽羅)에 삼별초를 토벌하러 가자 왕이 도끼를 주어 파견하였다.53)
마-4. 계축일에 대장군 김백균(金伯鈞)을 경상도수로방호사(慶尙道水路防護使)로, 판각문사(判閣門事) 이신손(李信孫)을 충청도방호사(忠淸道防護使)로 임명하였다.54)
위의 사료 마군에 충청도지휘사 송송례가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제주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한 고려 군부의 활동 및 수로감선사・수로방호사 등의 동태를 알려주고 있어서 그 당시 송송례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지 짐작하는 작업은 가능하다고 본다.55) 고려사에서 송송례가 1272년 12월 충청도지휘사에 임명된 이후 그의 행적이 묘연하다가 1273년(원종 14) 윤6월 9일(기미일) 기사에서야 다시 등장하므로56) 1272년 12월부터 제주 삼별초가 여원연합군에게 최종 진압되는 1273년 4월 이전까지 충청도지휘사로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51) 高麗史 권27, 元宗 14年 1月 壬午. “壬午 馬絳與大將軍宋玢 巡視近道戰艦”
52) 高麗史 권27, 元宗 14年 2月 壬辰. “壬辰 遣水路監船使 率戰艦南下”
53) 高麗史 권27, 元宗 14年 2月 癸卯. “癸卯 中軍行營兵馬元帥金方慶率精騎八百隨忻都等 討三別抄于耽羅 王授鉞遣之”
54) 高麗史 권27, 元宗 14年 2月 癸丑. “癸丑 以大將軍金伯鈞爲慶尙道水路防護使判閣門事李信孫爲忠淸道防護使”
55) 宋松禮가 1272년(원종 13) 12월 26일에 忠淸道指揮使에 임명되었으므로 그는 해를 넘겨 1273년(원종 14) 1~2월까지 충청도 권역에서 일정한 군사활동을 하였으리라 판단된다.
56) 高麗史 권27, 元宗 14年 윤6月 己未. “己未 遣順安侯悰・同知樞密院事宋松禮如元 賀冊封”
먼저 사료 마-1을 보면, 1273년(원종 14) 1월 28일(임오일)에 마강과 대장군 송분이 가까운 도의 전함을 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강은 이익(李益)과 더불어 당시 고려에 파견된 몽골의 다루가치[達魯花赤]이었으며,57) 대장군 송분은 송송례의 친아들이었다.58) 마강과 송분이 가까운 도의 전함을 순시하였는데, 여기서 가까운 도란 개경에서 멀지 않은 서해도와 양광도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서해도의 경우 삼별초항전을 진압하기 위하여 전함을 건조한 사실이 확인되므로,59) 마강과 송분은 아마 서해도 지역에서 급조한 전함을 순시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양광도의 경우 1272~1273년 당시 전함을 건조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나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하여 아산만 일대에서 전함을 건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산만 일대는 충청도와 인접해 있으므로 충청도지휘사 송송례는 자신보다 먼저 충청도에 파견된 초군별감에 의하여 그 지역에서 선발된 군사들을 지휘하여 아산만 일대에서 전함을 건조했을 가능성이 있다.60) 그게 아니라면 송송례는 충청도 권역에 존재하는 전함들을 모조리 끌어 모아 아산만 일대에 결집시키는 역할을 담당했을 수도 있다.
다음으로, 사료 마-2를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해 2월 9일(임진일)에 개경 조정에서 수로감선사를 파견하여 전함을 인솔하고 남하하게 하였음을 포착할 수 있다. 수로감선사는 그 명칭으로 보아 서해도 방면에서 건조한 전함들을 인솔하여 수로를 따라 전라도 방향으로 나아갔던 임시적인 관리였을 것이다. 1273년 2월 당시 누가 수로감선사에 임명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로감선사는 서해도에서 건조한 전함들을 인솔하여 바닷길로 남하하면서 양광도・충청도에서 건조한 전함들도 인계받아 계속 전라도 방면으로 내려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수로감선사의 임무와 역할을 고려한다면,
충청도지휘사 송송례는 충청도 권역의 전함들을 수로감선사에게 인계하였을 것이 자명하다.
57) 高麗史 권27, 元宗 13年 9月 甲子. “九月 甲子 宴達魯花赤李益及馬絳”
58) 高麗史 권125, 列傳38, 姦臣 宋玢. “宋玢礪良縣人 中贊致仕貞烈公松禮之子”
59) 高麗史 권27, 元宗 14年 3月 辛酉. “三月 辛酉 李益以西海道戰艦多敗沒 囚按察使禹天錫” 1273년 3월 8일(신유일)에 몽골 達魯花赤 李益이 西海道의 전함이 많이 침몰하자 그 책임을 물어 按察使 禹天錫을 수감하였던 것을 통해서, 1273년 초반에 서해도에서 많은 전함이 건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6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도지휘사” 항목에서는 都指揮使 및 指揮使가 군사력 징발, 외적 방어 및 군량・전함 조달 업무를 맡았다고 설명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도지휘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판 ; http://encykorea.aks.ac.kr/2022년 6월 30일). 그러므로 충청도지휘사 송송례는 아산만 일대에서 충청도 권역 군사들을 지휘하여 전함을 건조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한편, 사료 마-3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같은 해 2월 20일(계묘일)에 고려군의 중군행영병마원수 김방경이 정예 기병 800명을 인솔하여 몽골군 원수 힌두[忻都]를 따라 삼별초를 토벌하러 갔음이 발견된다. 김방경이 인솔하였던 기병 800명은 어떻게 모집된 것일까?
이는 앞에서 이미 논의하였던 사료 라-3과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앞의 사료 라-3에서, 추밀원부사 송송례는 상장군 서유와 더불어 1272년 12월 17일에 군사를 검열하였는데, 송송례가 검열한 군사에는 김방경이 직접 인솔한 기병 8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송송례가 충청도지휘사로 파견되기 이전에 개경의 군사들을 점검하여 정예 기병 800명을 추려내서 고려군 중군행영병마원수 김방경에게 인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사료 마-4에서는 1273년 2월 30일(계축일)에 대장군 김백균이 경상도수로방호사에, 판각문사 이신손61)이 충청도방호사에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충청도지휘사 송송례와 연관해서 특히 충청도방호사를 이때 임명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에 충청도지휘사를 임명했는데 새롭게 별도로 충청도방호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충청도지휘사 송송례가 자신의 역할을 다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즉, 송송례는 충청도지휘사로서 관할 지역인 충청도 내에서 초군별감에 의해서 모집된 군사들을 전라도 방면으로 내려 보내 중군행영병마원수 김방경의 휘하에 맡기고, 충청도 권역의 전함들을 수로감선사에게 인계하는 작업을 모두 끝마쳤다고 본다. 이러한 중요한 두 가지 임무를 순조롭게 마친 후에 송송례는 충청도 권역의방어책임을 충청도방호사 이신손에게 맡기고 자신은 개경으로 돌아왔다고 생각된다.
사료 마군의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서, 충청도지휘사 송송례가 수행한 역할은 대략 3가지였다고 판단된다. 첫째, 충청도 초군별감에 의해 모집된 군사들을 모두 전라도 방면으로 내려 보내 여원연합군에 합세하게 하였다. 송송례가 내려 보낸 충청도 군사들은 향후 고려군 원수 김방경의 지휘통제를 받았다. 둘째, 충청도 권역의 전함들을 끌어 모아 수로감선사에게 인계하였다. 셋째, 있을 수도 있는 제주 삼별초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충청도 권역의 방어책임을 충청도방호사에게 맡기고 해당 방어 업무를 인계하였다.
61) 高麗史 권26, 元宗 11年 6月 己巳일조 기록에 의하면, 본래 李信孫은 그 벼슬이 尙書左丞으로 1270년(원종 11) 6월 장군 裵仲孫 등이 삼별초봉기를 일으켰을 때, 삼별초정부의 右承宣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본문의 사료 E-4에서처럼,이신손이 1273년(원종 14) 2월 30일(계축일)에 개경조정에 의해 忠淸道防護使에 임명되는 것을 볼 때, 그는 1271년(원종 12) 진도의 삼별초정부가 고려와몽골의 연합군 공격으로 붕괴되었을 때 스스로 개경조정에 귀순하였고, 이후개경조정을 위하여 봉직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충청도지휘사 송송례의 역할은 그 자신이 직접 제주 삼별초를 토벌하러 나간 여원연합군 장수에 임명된 것이 아니라 군사력 징발, 전함 건조 및 인계, 군량 제공 등 전투지원 업무를 수행하였던 것에 국한되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고려군 원수 김방경, 몽골군 원수 힌두의 전투수행을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충청도지휘사 송송례가 수행한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충청도 군사를 고려군 원수 김방경에게 인계하고, 충청도 권역의 전함을 수로감선사에게 인계하여 향후 여원연합군이 제주 삼별초를 토벌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2. 제1차 일본원정을 위한 전투지원 활동
1272년 12월에서 1273년 2월까지 충청도지휘사 송송례가 행한 군사적 역할은 제주 삼별초군을 토벌하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자 전투지원 작업이었다. 이외에도 송송례는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과 연관하여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다음의 사료를 살펴보기로 하자.
바. 병신일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송송례와 추밀원부사 기온(奇蘊), 응양군(鷹揚軍) 상장군 김광원(金光遠)에게 명하여 일본원정군[征東軍]을 더 뽑으라고 하였다.62)
위의 사료 바를 살펴보면, 1274년(원종 15) 5월 21일(병신일)에 원종이 지추밀원사 송송례, 추밀원부사 기온, 응양군 상장군 김광원에게 명하여 일본원정군을 더 뽑으라고 명령했음을 알 수 있다. 원종이 직접 지추밀원사 송송례 등에게 일본원정군을 더 뽑으라고 명한것으로 보아 애초 목표로 했던 군액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이해하여 볼 수 있다. 같은 해 10월 3일(을사일) 경상도 합포에서 제1차 여원연합군이 출발하였을 때, 몽한군(蒙漢軍) 25,000명, 고려군 8,000명, 초공(梢工)・인해(引海)・수수 6,700명, 전함 900여 척의 규모였다. 제1차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원나라는 힌두를 都元帥, 홍다구(洪茶丘)를 右副元首, 유복형(劉復亨)을 左副元首로 하고, 고려는 김방경을 都督使, 김신(金侁)을 左軍使, 김문비(金文庇)를 右軍使로 한 이른바 삼익군(三翼軍)으로 이를 돕게 하였다.63)
62) 高麗史 권27, 元宗 15年 5月 丙申. “丙申 命知樞密院事宋松禮・樞密院副使奇蘊・鷹揚軍上將軍金光遠 加僉征東軍”
63) 高麗史 권28, 忠烈王 즉위년 10月 乙巳. “冬十月 乙巳 都督使金方慶將中軍 朴之亮・金忻知兵馬事 任愷爲副使 金侁爲左軍使 韋得儒知兵馬事 孫世貞爲副使 金文庇爲右軍使 羅裕・朴保知兵馬事 潘阜爲副使 號三翼軍 與元都元帥忽敦 右副元帥洪茶丘・左副元帥劉復亨 以蒙漢軍二萬五千・我軍八千・梢工・引海・水手六千七百・戰艦九百餘艘 征日本”
이때 고려군의 규모가 8,000명이었던 것인데, 같은 해 5월을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고려군의 숫자가 8,000명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원종이 일본원정에 참여하는 고려군을 더 선발하라고 엄명하였던 것이다. 지추밀원사 송송례는 추밀원부사 기온, 응양군 상장군 김광원 등과 더불어 같은 해 5월 21일 이후부터 10월 이전까지 일본원정에 참여하는 고려 군사를 추가적으로 선발했다고 생각된다. 송송례 등이 추가로 선발한 군사 규모는 제주 삼별초군을 토벌하러 편성된 고려군이 6,000명이었다는 점과 제1차 여원연합군에 편성된 고려군이 8,000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약 2,000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64) 송송례 등이 추가적으로 군사 2,000명을 선발하여 10월 3일 이전에 고려군 8,000명이 갖추어졌다고 보면 합리적이다. 그 당시 송송례는 자신이 일본원정군의 고려 측 지휘부에 포함되지는 않았더라도 국왕의 명을 받들어 고려군을 추가적으로 선발하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1272~1273년 충청도지휘사로서 활약했을 때처럼 고려 군사를 더 뽑아 여원연합군에 인계하는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송송례는 제1차 일본원정에서 출정군 장수로 나아가지는 못했더라도 왕명에 의해 고려군을 추가 선발하는 전투지원 업무를 수행하여 고려군 8,000명이 몽한군과 더불어 차질 없이 일본원정에 나서는데 공헌하였다.
64) 1274년(원종 15) 5월 21일(병신일) 이후 知樞密院事 송송례, 樞密院副使 奇蘊,鷹揚軍 上將軍 金光遠 등이 추가적으로 선발한 고려군 규모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본문의 사료 라-1에서 제주도의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고려군 규모가 6,000명이고, 앞의 각주 63)에서 제1차 여원연합군에 포함된 고려군 규모가 8,000명임을 감안한다면, 송송례 등은 애초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고려군 6,000명에다 2,000명 정도를 추가로 선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Ⅳ. 맺음말
이 글에서 필자는 고려 원종 치세 후반부에 고려무인정권을 종식시킨 무신 송송례가 펼친 대몽외교 및 군사활동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그러한 활동이 지니는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 조명해보았다. 그러면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송송례는 원종 치세 후반부에 개경조정의 문・무 관료를 대표하여 몽골(원)에 총 3차례 파견되어 활발한 대몽외교를 펼쳤다. 먼저, 상장군 송송례는 1270년(원종 11) 8월에 첫 번째 대몽외교를 펼쳤는데, 무인집정 임유무를 직접 제거한 장본인으로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몽골 사행에 포함되었고 고려 세자의 대몽외교를 보필하였다. 1270년의 대몽외교는 몽골 세조의 생일을 축하하고, 삼별초봉기의 전말을 몽골 황제에게 알리는 한편 동녕부 반환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의 외교에서 송송례의 외교적 역할은 삼별초 봉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몽골 황제에게 알리면서 몽골군 원수 파견을 요청하는 일이었다고 판단해보았다. 특히 1270년의 대몽외교에서 동녕부 반환 요청은 몽골에게 거부되었지만 송송례에 의한 진도 삼별초정부 토멸을 위한 몽골군 원수 파견 요청은 몽골에 의해 즉각적으로 수용되어 송만호 등이 거느렸던 1천명의 몽골군이 훗날 고려에 파견된 아카이[阿海]에게 인계되어 여몽연합군 편성의 시초를 이루었다고 이해하여보았다.
다음으로, 송송례는 1271년(원종 12) 5월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 진도의 삼별초정부가 붕괴되자 추밀원부사로 승진하여 이듬해인 1272년(원종 13) 1월에 정사인 제안후 왕숙과 더불어 부사로서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1272년에 펼친 송송례의 외교는 몽골이 ‘대원’으로 국호를 정한 것을 하례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때 고려 재상인 추밀원부사 송송례가 원나라 조정에 확실하게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송송례는 동지추밀원사로 관직을 옮겨 1273년(원종 14) 윤6월에 정사인 순안후 왕종과 더불어 부사로서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1273년에 펼친 송송례의 외교는 원나라 황후와 황태자
책봉을 하례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그는 제주 삼별초군 토멸의 정황을 원나라 조정에 보고하였을 것으로 생각해보았다. 1272~1273년의 외교는 국호를 대원으로 바꾸고 황후・황태자를 책봉하는 등 중국식(한식) 조의 정비를 완료한 원나라 황실을 받들고 원나라와의 돈독한 대외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송송례는 1274년 10월에 몽골복식 수용과 관련하여 국내에서 원나라에 대한 외교를 펼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충렬왕은 몽골에 입조할 때 이미 몽골식 변발[케쿠르]을 시행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 관료들을 크게 책망하였다. 이에 송송례가 정자여와 더불어 고려 관료를 대표하여 맨 먼저 변발을 시행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변발하는 것에 따랐다. 이로써 송송례는 정자여와 더불어 고려 대신들 중에서 최초로 변발을 시행한 인물이 되며, 송송례가 솔선수범해서 변발을 시행한 것은 원나라와의 원만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충렬왕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송송례는 원종 치세 후반부에 제주 삼별초 토멸 및 제1차 일본원정을 위한 군사활동을 펼쳤다. 먼저, 추밀원부사 송송례는 1272년 12월에 상장군 서유와 더불어 왕명을 받아 군사를 검열하였는데, 그가 검열한 군사는 주현군이 아니라 개경에 있는 중앙군이었을 것으로 생각해보았다. 특히 제주 삼별초를 토멸하기 위해 고려군 원수 김방경이 친히 이끌고 갔던 기병 800명은 송송례가 이때 검열하였던 군사였을 것으로 추정해보았다.
다음으로, 송송례는 같은 해 12월 26일(경술일)에 충청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 그가 충청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충청도 지역으로 파견된 초군별감이 충청도 권역에서 어느 정도의 병력을 모았음을 방증해준다. 충청도지휘사 송송례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였을 것으로 분석해보았다. 첫째, 충청도 초군별감에 의해 모집된 군사들을 모두 전라도 방면으로 내려 보내 여원연합군에 합세하게 하였다. 송송례가 내려 보낸 충청도 군사들은 향후 고려군 원수 김방경의 지휘통제를 받았다. 둘째, 충청도 권역의 전함들을 끌어 모아 수로감선사에게 인계하였다. 셋째, 제주 삼별초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충청도 권역의 방어책임을 충청도방호사에게 맡기고 해당 방어 업무를 인계하였다. 이러한 충청도지휘사 송송례의 전투지원 임무는 이후 여원연합군이 제주도의 삼별초군을 진압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마지막으로, 1274년(원종 15) 5월에 지추밀원사 송송례는 왕명을 받아 추밀원부사 기온, 응양군 상장군 김광원 등과 더불어 일본원정에 나설 고려군을 추가적으로 선발하였다. 이때 송송례 등이 추가로 뽑은 군사 규모는 사료 상에서 나타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추가로 선발한 고려군 규모는 제주 삼별초군을 토벌하러 편성된 고려군이 6,000명이었다는 점과 제1차 여원연합군에 편성된 고려군이 8,000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약 2,000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보았다. 송송례는 제1차 일본원정에서 왕명에 의해 고려군 2000명을 추가 선발하는 전투지원 업무를 전개하여 차후 고려군 8,000명이 몽한군과 더불어 일본원정을 수행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처럼 원종 치세 후반부에 송송례가 펼친 대몽외교와 군사활동은 몽골[원] 제국의 중국식 조의 정비에 따라 그들의 국제적인 위상을 인정하고 그들의 삼별초 토벌, 일본원정 등 대외정복사업에 최대한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은 출륙환도 이후 몽골[원]에 복속된 고려와 개경조정이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출륙환도 이후 송송례가 보여준 외교・군사적 행보는 진도의 삼별초정부가 지향했던 바와는 정반대의 것으로써 몽골[원]에의 복속을 앞당기는 결과를 배태하였던 것이다.
투고일 : 2022. 07. 25 심사완료일 : 2022. 08. 29 게재확정일 : 2022. 08. 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