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2장 통일교가 세상에 태어나다 그 출발부터 통일교는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단, 사이비라는 공격과 비난을 줄기차게 받았다. 온갖 괴소문이 난무하고 감옥에 갇히는 수난을 겪었지만 통일교는 들불처럼 거세고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교회가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문선명은 세계로 진출할 것을 결심했다.
1. 고난은 그의 숙명이었다
1945(25세)년 광복은 되었지만 혼란의 연속이었다. 문선명은 광복 직후 상도동으로 집을 옮겼고 10월부터 1946년 4월까지 '예수교 이스라엘 수도원' 상도동 집회소에서 신도들을 이끌었다. 이때 큰아들 성진(聖進)이 태어났다. 그 시절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쌀을 가지러 황해도 백천(白川)으로 가다가 파주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 "38선을 넘어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 즉시 너덜너덜해진 성경책 하나만 들고 평양으로 향했다. 첫 아들이 태어난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5월 27일 무렵이었다.
6월 6일 평양에 도착해 경창리 나최섭 집에서 전도생활을 시작했다(이것이 단순한 전도인지 목회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내용으로 보아 목회로 볼 수 있다. 그러면 평양에서의 목회는 문선명의 첫 번째 목회이자, 교회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동네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차츰 찾아오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났다. 밤을 새워가며 새로운 말씀을 가르쳤으며, 세 살배기 어린애든 허리가 굽은 노인이든 하늘같이 섬겼다. 매일 와서 조용히 듣던 청년 김원필(1928~2010)은 첫 번째 신도가 되었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는데 평양 성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다가 문선명을 만났다. 그는 "하늘의 계시를 받아 문 총재를 만난 것을 평생의 행복으로 삼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문선명은 열정으로 가르쳤고, 예배를 드렸으며 차츰 신도 수가 늘어났다. 지승도(1895~1988) 할머니와 옥세현(1898~1998) 할머니는 꿈속에서 "젊은 선생이 이남에서 올라와 만수대 건너편에 있으니 가서 만나라"는 말씀을 듣고 찾아왔다 한다. 누가 전도하거나 인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알려준 주소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전철이나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새겨진 십자가 팻말을 들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또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전도를 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또 사탕과 명함이 담긴 작은 비닐봉투를 무작위로 나눠주며 "예수 믿으며 행복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전도하는 사람도 만난다. 그런 사람들은 다양한 종교에 걸쳐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 사람들 중에 통일교인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이는, 신앙은 다른 사람이 권하거나 깅요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에 입각한다. 문선명은 이를 평양의 목회 시절에 체험했다. 전도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제발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평양에서 제일 유명한 장대제 교회(장대현 교회, 1893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에서 15명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바람에 큰 항의를 받았다. 여신도 한 명이 시댁에서 다니던 교회를 다니지 않고 문선명의 교회로 왔는데 그 때문에 시댁 사람들이 몰려와 폭행을 저지르는 일도 벌어졌다.
북한에서 문선명의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1945년 10월 어느 날 과일을 샀는데 느닷없이 위조지폐 사용으로 고발 당해 곽산 지서에 일주일 가량 유치됐다. 보통학교 때 담임이었던 정주경찰서장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1946년 8월 11일에 다시 잡혀 들어갔다. 그해 6월부터 북한 공산당국은 종교단체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허호빈(이일덕의 아내)의 복중교(腹中教)가 종교를 사칭한 사기죄목으로 입건됐을 때 문선명도 그와 유사한 단체 지도자이며, 이승만의 첩자라는 협의로 구금되었다. 유동보안서를 거쳐 대동보안서에 수감되었다. 두 번째 감옥행이었다. 역시 무수한 고문을 받았지만 자백할 죄가 없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버텼다. 그때 생긴 흉터가 여러 군데 남아 있다 한다. 결국 석 달만인 11월 21일에 거의 죽은 몸으로 풀려났다.
본격적인 수난은 1948년 2월 22일부터 시작되었다. 1년이 넘으니 교세가 부쩍 커졌는데 평양 기독교 지도자 83명이 공동명의 투서로 문선명을 고발했다. 죄목은 '이승만의 스파이, 부녀자 재산 갈취, 사회질서 문란'등이었다. 공산 당국은 옳다구나 하고 잡아들였다. 20여명의 신도들도 취조와 가택수색을 당해 교회는 상가(喪家)가 되었고, 심한 감시로 인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선명은 평양 내무서로 끌려가자마자 모진 고문을 받았다. 4월 7일에 공판이 있었는데 구금된지만 40일이 되는 날이었다. 공판을 보러온 신도들은 한쪽에서 구슬프게 울었다. 법정에는 기성교인들과 공산당원들이 몰려와 "왜 면류관을 쓰고 있지 않느냐!", "저런 것은 돌멩이로 때려 죽여야 한다!"는 등 고함을 치며 온갖 험담과 욕설을 퍼부었다. 재판장은 '사회질서문란죄'로 단심 5년형을 언도했으며 그날 바로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세 번째 감옥행이었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경찰서와 감옥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에 감옥살이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갇힌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45일 후인 5월 20일 오후 3시 흥남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차로 17시간이나 걸리는 먼 길을 가면서 가만히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니 설움이 복받쳤다 한다.
흥남감옥(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 본궁리)은 흥남 질소비료공장의 특별 노무자 수용소였다. '생지옥의 표본이요, 죽음의 예비학교와도 같은 감옥 중 최악의 감옥'이라 일컬어지는 그곳에서 2년 8개월간 고된 강제 노역을 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앞마당에 죄수들을 정렬시키고 불법 소지품이 있는지 몸수색을 했다. 옷을 모두 벗기고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털어가며 샅샅이 뒤졌기에 두 시간은 족히 걸렸다. 몸수색이 끝나면 형편없는 아침을 먹고 10리 길을 걸어 비료공장으로 향했다. 줄이 느슨해지거나 손을 잡지 않으면 탈출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가차 없는 매질을 했다.
눈이 한 길이나 쌓인 겨울날, 추운 새벽길을 걸어가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늘 배가 고팠고, 노동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비료공장에는 암모니아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것을 가마니에 퍼 담는 노동을 했다. 10명이 1조가 되어 하루에, 1,400가마니씩 퍼 담았다. 그곳에서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학질에 걸려 24일이나 고생했고, 유산을 청소하다가 독성 때문에 죽은 사람도 여럿이었고, 하루에 작은 밥공기로 두 그릇(1.7공기)이 채 못 되는 잡곡밥을 받았다. 반찬은 아예 없었고 국은 무청이 된 소금물이 전부였다. 밥그릇을 받으면 모두들 순식간에 통째로 입속에 털어 넣었다 한다.
"나와 함께 지내던 어떤 목사는 "나한테 콩 한 알만 주면 밖에 나가서 소 두 마리를 주겠소" 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죽은 사람의 입속에 있는 밥알까지도 끄집어내 먹을 정도였으니 그때의 배고픔은 그만큼 처절했다."
통일교 자료는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어쩌다 콩밥을 해주는 날은 콩 한 알이 황금덩이보다 더 귀하게 느껴졌다. 생쥐라도 발견하면 돌로 때려잡아 날것으로 먹었다. 입술연지 바르는 날이라고 하며 모두 부러워했다. 또 새끼 쥐를 잡으면 키워서 잡아먹기도 했다."
아우슈비치 수용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지옥이라 할만 했다. 36명이 한 방에서 살았고, 그 안에 변기통이 있어서 냄새가 심했다. 죄수들은 걸핏하면 설사병이 났는데 그들이 갑작스레 내지르는 대변 때문에 감방은 늘 아수라장이 되었다. 문선명의 수감번호는 596번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구륙이라 불렀다. 그것을 빨리 발음하면 '오구륙'이 '억울'로 들렸다 한다. 그는 정말 억울한 죄인이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몇 번이나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정주에서 곧바로 흥남으로 오는 차가 없어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경원선을 타고 20시간 넘게 와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그렇게도 강인하신 분이 감옥의 아들을 보자마자 목이 메어 얼굴도 들지 못하고 계속 울었다. 어머니가 가져온 명주 바지는 다른 죄수에게 주고 미숫가루도 모두 나눠주었다.
"어머니, 나는 문 아무개의 아들이 아닙니다. 문 아무개의 아들이기 전에 대한민국의 아들입니다. 대한민국의 아들이기 전에 세계의 아들이요, 하늘과 땅의 아들입니다. 그들을 먼저 사랑하고 나서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 도리임을 압니다. 나는 졸장부 아들이 아니니 그 아들의 어머니답게 행동해 주십시오."
이러한 당부는 어머니에게는 매우 서운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문선명은 자신의 미래 운명을 예견하고 그렇게 냉정하게 말했던 것이다. 날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흥남감옥이었다. 이후 헤어진 후 살아서는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감옥은 엄격한 곳이었고 죄수들 사이에도 밀정이 있어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지만 문선명을 따르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 24명이나 되었다 한다. 그들이 신도인지 아닌지 규정할 수는 없으나 박정화는 지극정성으로 문선명을 모셨다. '원화원 이상'을 주제로 상당량의 원리말씀을 받아 기록했다고 하는데 그토록 열악한 감옥에서 기록을 한다는 것은 보통의 신념과 열성이 아니면 어려웠을 것이다.
흥남감옥에 갇혀 지내는 동안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난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곧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유엔군이 참전했다. 인천상륙 작전으로 교두보를 마련한 미군은 38선을 돌파해 북한의 대표적인 공업도시 흥남으로 진격했다. 흥남감옥은 자연히 미군의 폭격 목표가 되었다. 폭격이 시작되자 간수들은 죄수를 버려둔 채 전부 방공호로 피신했다. 죄수들이었기에 죽어도 관계가 없었다. 폭격이 심해지자 간수들은 죄수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10월 12일, 형기 7년 이상된 죄수들부터 산 속으로 데려가 처형했다. 당초 5년을 언도받은 문선명은 1948년 9월 북한정부 수립 기념 조치에 따라 3년 4개월로 감형이 되었었다. 따라서 3일 후는 문선명의 차례였는데 흥남감옥 위로 폭탄이 장맛비처럼 쏟아졌다. B-29를 앞세워 총공격을 감행한 미군은 그날 흥남 전체가 불바다가 될 정도로 밤새도록 폭탄을 퍼부었다. 높이 솟아 있던 감옥의 담벼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자 간수들은 모두 줄행랑을 쳤다. 새벽 2시 무렵 문선명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당당히 걸어서 흥남감옥을 나왔다. 유엔군이 문선명을 석방시킨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통일교는 1982년 「오, 인천」(Oh, Inchon)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거금 460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340억원)를 일본 기업가 사카구치 마츠사부로와 문선명이 절반씩 투자했다. 감독은 테렌스영, 맥아더 역활은 로렌스 올리비에가 맡았고, 재클린 비셋, 데이비드 잔센 등이 출연했으나 흥행은 실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