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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인사할 때 오늘은 자본주의 인사를 하겠습니다. 뭔가를 많이 기대하는 듯 혹시 용돈을 받는 듯한 그런 약간 느끼하면서도 뭔가 간절히 바라는 그런 느낌으로 옆사람과 함께 안녕하세요. 인사하겠습니다. 시작
여러분 돈 벌기는 글렀네요. 자본주의 얼굴이 아니에요. 그 얼굴로는 아무도 안 도와줘요.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 31절에는 예수님께서 두 명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머무르고 계시다가 그리고 떠나시고 계시다는 것을 두 명인이 알았고, 그것을 알아차린 맹인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크게 소리 질러 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호소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모든 신경을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란 정말 어려운 거예요. 사람의 소리 발자국 이런 걸 막 분위기를 눈 외에 다른 감각으로 파악해야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떠나신 것을 알게 되자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까 싶어서 정말 큰 소리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고, 또 따라가면서 기회를 놓칠까 봐 또 부르짖었고, 예수님의 집에 들어가시자 그곳에서도 또 고쳐달라고 기회를 놓치지 않게 부르짖는 모습을 봅니다. 27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7절 시작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세. 두 명인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갔을 때도 이 두 명인은 따라 들어가서 소리를 질렀고 자기 자기의 불쌍함을 좀 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런 두 명인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참 이상한 물음이죠. 낫고자 하는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이 두 명인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라고 물었어요. 되물은 거죠. 그랬더니 이 두 명인은 주저하지 않고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명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고치실 줄 확신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집에 있을 때도 또 떠나가실 때도 머물렀을 때도 계속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는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지만 믿음은 보이는 거예요. 믿음이란 단어 자체는 형이상학적인 단어예요. 규정하기가 어려워요. 믿음은 십자가다. 믿음은 돌리다 믿음은 나무다. 이렇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믿음은 눈에 보인다는 거예요. 이 윗 맹인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보시고 난 이후에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졌어요. 믿음대로 된 거예요. 그 사람이 믿음대로 뭐였어요? 예수님이 나를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믿음대로 되라고 하자마자 그들의 눈이 고쳐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명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두 명인에게 있는 믿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쳐주셨던 거예요.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 말은 되게 막 행복한 말인 것 같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되게 무서운 말이에요.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했는데 안 고쳐주면 내가 믿음이 없는 거잖아요. 너희 믿음 되라 되라고 했는데 부흥이 되지 않으면 내가 부흥에 대한 믿음이 없는 거잖아요.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했는데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내가 믿음이 없는 거잖아요.
이 말씀은 가볍게 들을 말씀이 아니라 정말 무서운 말씀이에요. 믿음대로 되라. 그 믿음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답처럼 보여지지만 인간의 무게가 인간이 가져야 될 믿음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잘 알려주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두 맹인의 안타까운 사정 때문에 그들을 고치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맹인이기 때문에 고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들의 믿음을 보고 두 사람을 고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의 안타까움을 보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럼 우리가 무엇을 보고 도우시는 분이에요? 우리의 믿음을 보고 도우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 때문에 우리를 돕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무엇을 보고 우리를 도우실까요? 우리의 믿음을 보고 우리를 돕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만약에 안타까운 형편 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를 도우신다면 여러분과 저는 이미 이전까지 지금까지 수많은 도움과 은혜와 기적을 경험했을 것이에요.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이 매일 일어났을 거예요. 그런데 현실적은 아니잖아요. 여러분 너무 잘 아시잖아요. 그런 일이 우리 인생에 별로 일어나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여러분과 저에게 다가오셔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예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부르짖는 우리에게 오셔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여러분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매일 기도하잖아요. 새벽마다 기도하잖아요. 울며 기도하잖아요. 부르짖으며 기도하잖아요.
그런 여러분을 향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하셨을 때 과연 여러분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가 있을까요? 아니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여러분 말씀은 선포된 말씀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속 선포되고 있는 말씀이에요. 그게 말씀의 역사예요. 이미 선포된 말씀이지만 지금도 계속 선포되고 있는 말씀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오늘은 저의 입술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여러분이 묵상을 할 때는 성령을 통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여러분이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성령의 화자를 통해서 또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끝없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결국 응답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인 거죠. 예수님이 분명히 여러분과 저에게 지금도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는데 응답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응답받을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기적을 바란다면 하나님의 도움을 바란다면 여러분과 저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날마다 믿음이 있는지를 물어야 됩니다. 나는 지금 믿음으로 기도하는가? 나는 믿음으로 이 말을 하고 있는가 내가 믿음으로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믿음으로 사역을 하고 있는가 내가 믿음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가 내가 믿음으로 가정에서 살고 있느냐를 늘 물어야 됩니다. 그래야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실 때 기적이 일어나고 응답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35절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정리해 놓은 구절입니다.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고 예수님이 하신 이 일들은 우리도 해야 되는 일이에요.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을 정리하셨어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친 일을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도 이 일을 부탁하셨어요.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쳐라.
그런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믿음인 거예요. 가르치는 데도 복음을 전하는 데도 사람을 고치는 데도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복음 전파도 믿음으로 해야 하고, 가르치는 것도 믿음으로 해야 하고 질병을 치유하는 것도 믿음으로 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은 늘 여러분과 저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선포하실 때 믿음대로 되는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만약 우리 공동체가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이 음성을 매일 듣는다면 정말 행복한 공동체일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믿음을 보시고 이 말씀을 하시는 거잖아요. 만약 예수님이 저에게 다가와서 일주일아 내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이 저에게 믿음을 보신 거예요. 그리고 믿음대로 되는 일이 일어나겠죠.
이 일은 이 말씀을 듣는 건 큰 행복한 일인 거예요. 두 명인은 비록 눈으로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이 이들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들 믿음대로 그들이 눈이 띄어졌던 것입니다. 너희의 믿음대로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인 거예요.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있는 공동체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것이 축복의 생명의 메시지인 거예요. 이 메시지가 우리 교회에는 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할 때 부흥이 일어나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할 때 복을 받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형편을 보고 교회를 돕지 않아요.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과는 조금 차이가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4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주시니라.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병을 고쳐주셨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기본적으로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에요. 그렇다면 오늘 말 모든 병자가 다 고쳐져야 되잖아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니까.
근데 모든 병자가 실제로 다 고쳐지지 않아요. 좀 더 말씀을 볼게요. 로마서 9장 15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긍 휼히 여기시는 분이고 불쌍히 여기시는데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이 말은 긍휼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여호와의 불쌍히 여기심이 모든 백성에게 다 임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기준이 있는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기준은 믿음인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믿음이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세요. 그러니까 기준 중에 하나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기준 중에 하나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을 보고 응답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우리의 환경을 보고 예수님이 응답하신 분이라면 여러분과 저는 이미 수없이 많은 응답을 받았어야 정상인 거예요.
근데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서 그렇게 응답이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아요. 특별히 간절한 기도 제목들 중에 정말 매번 반복해서 확실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 때도 많아요.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신 분이시기 때문인 거예요. 그 환경을 보고 응답하신 분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응답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크다고 응답하지 않고 교회가 작다고 응답하시는 분도 아니에요. 이미 많이 응답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 분도 아니고 응답을 한 번도 안 했기 때문에 응답하시는 분도 아니라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은 믿음에 의해서만 응답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아무리 응답하지 않으셔도 여전히 믿음이 없으면 응답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수천 번 응답하셔도 믿음이 있으면 계속 응답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병이 심각하다고 해서 응답하신 게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응답하시는 거예요. 문제가 많아야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작아도 믿음이 있으면 응답하시는 분이 예수님인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있어야 응답하시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거예요. 믿음을 보셨거든요.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간절함을 응답하기로 마음먹으셨고 그래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보고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응답을 받으려면 여러분과 저에게 믿음이 있어야 돼요. 그런 의미에서 너의 믿음대로 되라는 선포를 우리가 듣는다면 축복된 공동체고 축복된 성도인 거예요. 제가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할 때 여러분이 큰 소리로 한번 아멘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렇게 이 음성이가 음성이 우리 교회 들려지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보셨다는 거잖아요. 가난하다고 응답을 더 많이 하지 않으셔요. 예수님은 부자라고 해서 돈이 많으니까 더 이상 응답하지 않으신 게 아니에요. 믿음을 따라서 믿음을 보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우리의 신경과 관심이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두 명인은 가장 중요한 감각인 시각을 잃어버렸어요. 여러분 아셔야 될 게 장애를 가진 분들은 한 가지 감각이 없잖아요. 그럼 나머지 감각이 되게 발달돼요. 그래서 집중이 잘 안 돼요. 그러니까 이 시각을 잃게 되면 이게 청각이 발달하겠죠. 그래서 청각이 너무 예민해져서 너무 많은 소리를 너무 세밀한 소리를 잘 듣게 돼서 오히려 집중이 더 어려워져요. 크고 반드시 들어야 될 소리만 들으면 되는데 예민해지니까 이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여러분과 저에게는 정말 작은 소리인데 그분들에게는 큰 소리로 들리는 거예요.
왜요? 모든 신경을 거기에 쏟아넣고 있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집중이 더 어려워요. 집중을 잘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집중을 아주 방해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맹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한 집중력을 놓지 않았어요. 이게 믿음이에요. 아무리 방해하는 것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게 믿음인 거예요. 설령 내가 어떤 감각이 없다 할지라도 사람의 감각이 많잖아요. 이 감각 중에 한두 개가 내가 없어도 예수님에 대한 집중력을 놓치지 않는 것이 믿음인 거예요.
두 맹인은 이 집중력을 잃지 않았어요. 그래서 비록 눈은 보이지는 않지만 소리와 사람의 움직임들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리고 계속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도 알았고요.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는 것도 알았어요. 예수님 주변에 사람이 많을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어요. 따라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분주해도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게 믿음이에요. 인생에 문제가 일어나도 믿음을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게 믿음이에요.
이 두 맹인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자기의 감각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시각이라는 감각이 없었잖아요. 그래도 예수님에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았어요. 왜요?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주한 중에도 관심을 빼앗는 것들이 있는 중에도, 집중력을 방해하는 것을 있는 중에도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에 대한 집중력을 빼앗겨요. 조그만 문제가 등장해도 집중력이 곧 사라지게 되는 거예요. 정말 집중해야 될 공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두 맹인에게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러분 요즘 SNS는 빅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정보를 여러분과 저에게 이렇게 제공을 해줘요. 내가 많이 하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는 내가 관심 있는 것을 계속해서 나에게 제공을 해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어떤 것을 구독하거나 아니면 뭐 좋아요를 누르거나 어떤 정보를 클릭을 하면 그와 관련된 정보들을 여러분에게 더 많이 지속적으로 보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AI가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인 거예요. 이게 정확한 말인지 잘은 모르지만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 딥 러닝의 기술이 되게 발달이 돼서 이 AI는 사람의 관심사를 쉽고 아주 정확하게 파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두 명인의 간절함을 보셨습니다. 보시고 그들의 믿음대로 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여러분 예수님이 아셔요. AI도 아는데 예수님이 모르겠어요. 기계도 우리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우리에게 그것을 계속 공급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예수님은 아시고 우리에게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거예요.
여기에는 정말 약간 슬프기도 하고 함정과 같은 게 들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전도가 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다는 거죠. 교회가 막 전도라는 구호를 외치지만 전도는 안 돼요. 그러면 교회가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예수님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공급해 주지 않는 거예요. 말은 영혼 구원을 외치지만 정말 영혼에 대한 관심이 교회가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고 공급해 주시는 분이에요. 특별히 믿음이 있는 걸 보시면 더 기쁘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영혼 구원을 외치는데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면 그 교회에는 정말 영혼에 대한 관심은 없는 거예요. 되게 무섭죠.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 들켜도 좀 괜찮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의미냐 하면 예수님 내가 예수님을 내가 정말 영혼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예수님이 내 마음을 보셨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나를 보시고 기뻐하셔서 나에게 영혼을 맡겨주는 거예요.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요? 내 마음이 들켰는데 들킨 그 마음이 너무 멋진 마음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AI도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공급합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고 올바른 거라고 여기시면 그것을 공급해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보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아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멋진 공급자가 되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가끔 가족들에 대해서 품었던 마음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킬 때가 있어요. 여러분 그럴 때 없었나요? 가끔 가족에 대한 품었던 마음이 되게 부끄러운 마음이 있는데 이게 들켜요. 정말 창피해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일이 있는데 제 마음이 들키면 저는 립서비스 일을 엄청 많이 해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게 정상이고 아빠가 자녀를 사랑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근데 이 마음이 가끔 온전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내가 느낄 때가 있어요. 물론 아내나 우리 아이들이 알았는지 모르지만 제가 양심적인지 잘은 모르겠어요. 아직 양심이 조금 사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마음이 들키면 그때부터 립서비스를 되게 많이 해요. 내 마음이 들킨 게 되게 부끄럽더라고요.
여러분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들켰을 때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들켜요. 근데 이 마음이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어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 보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교회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들켜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영혼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들켜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어요. 성도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들켜도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를 예를 든다면 제가 어떤 열심히 일을 하잖아요. 새벽에 일찍 내려와서 청소도 하고 기도도 하고 나름 제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참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해요.
근데 제 마음이 과연 다 온전할까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마음이 들었어요. 내 마음이 내 마음을 혹시 하나님을 아시면 내가 부끄럽지는 않을까 내가 우리 교회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혹시 들키면 내가 부끄럽지 않을까 막 이 생각이 계속 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마음 찔리라고 이 소리 하는 거예요. 여러분 칭찬받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나나 여러분이나 교회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들켰을 때 부끄럽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도을 향해서 향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들켜요. 당연히 들키죠. 하나님이 아시니까 그때도 그 마음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대한 마음과 성도에 대한 마음, 사역에 대한 마음이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핑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집중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해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들키면 부끄러운 마음이기 때문에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할 때 아무 일이 안 일어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여러분과 저에게 너희 믿음 데려오다 했는데 우리가 아멘 했는데 아무 일이 안 일어나요.
여러분 난리 난 거 아닌가요? 제가 그동안 어쨌든 막 교회 부흥을 위한 마음이 거짓인 거죠. 제가 여러분을 사랑한다 했던 고백도 거짓인 거고, 내가 막 성도의 병 낳기 위해서 막 기도했던 것도 거짓인 거고 그 너의 믿음대로 되라고 했는데 아무 일이 안 일어나요.
어쩌면 지금 이 땅의 교회 모습이 이게 아닐까 싶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그래 그러니까 늘 부르짖잖아요. 막 새벽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부르짖고 울면서 부르짖고 막 통곡을 하고 방언을 하고 막 부르짖잖아요.
그런데 그런 우리를 보고 예수님이 너희 믿음대로 되라 했는데 아무 일이 안 일어나요. 아마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마음이기 때문일 거예요. 어쩌면 지금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오셔서 지금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거 언제 내가 이걸 외쳐줄까 남일출 네가 마음만 합당하면 내가 너희 믿음대로 들어갈 텐데 저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지라고 저를 보고 계실지도 몰라요.
여러분 제 이름 불렀다고 여러분을 막 피해갔다고 막 안심하지 마시고 똑같아요. 하나님 여러분 보면서 저거 언제 내가 믿음대로 되라 할 수 있을까 몇 년이 지나면 믿음대로 되라고 내가 외쳐줄 수 있을까 10년이 지나면 20년이 지나면 30년이 지나면 믿음대로 되라고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했을 때 부흥 일어나고 할렐루야 예수님이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했을 때, 막 병이 고쳐지고 예수님이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했을 때 용서가 일어나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했을 때 영혼이 구원해진 역사가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맹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칠 수 없다는 객관적인 현실 앞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경우도 눈 뜰 일이 없는 거예요. 이 두 맹인은 그래도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믿음을 보시고 너희 믿음 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확신하십시오. 할렐루야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할렐루야 그분이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후에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창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