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申采浩/1880~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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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사상가, 사학자, 언론인.
호는 단재(丹齋).
신민회 활동.
저서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등
한국 고대사 체계화.
신채호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신광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채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10세 때 이미 역사책인
<통감>과 사서 삼경을 읽었다고 한다. 또 시와 글에도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신채호는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 연구에 힘썼고, 22세에 고향으로 내려와 문동 학원에서
강사로 있었다. 이어 25세 때에는 산동학원을 세우고 신교육 운동을 벌었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 신채호는 관직의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기자가 되었다.
이듬에 해는 <대한매일신문> 주필(논설 위원)이 되어 논설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며 항일 언론 운동을 펼쳤다.
1907년 신채호는 안창호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 단체 신민회를 만들었고,
신문의 논설을 통하여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한일 합방이 된 1910년 신채호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그곳에서 광복회를 만들어 부회장으로 활약하였고, 그 뒤 상하이, 베이징 등을 넘나들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쳐 활동하던 신채호는1928년 폭탄 제조소의 설치 자금을
마련하다가 대만에서 체포되었다.
신채호는 1930년 대련지방 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인중근 의사가 사형 당했던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살이를 하던 1936년 신채호를 뇌출혈로 옥중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신채호는 죽으면 화장에서 그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도 일본인들의 발굽에는 짓밟히지 않겠다는 뜻이였다.
한평생 민족을 위해 몸 바쳤던 신채호는 한국사 연구를 통해 민족 운동에 앞장섰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문>에 역사애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최용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등 우리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한 영웅에 대한 전기를 썼다.
우리민족 영웅들의 삶을 통해서 민족 의식과 독립 정신을 복돋아 주기 위해서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한 신채호는 만주에 있던 광개토대왕릉비을 비롯해 고구려와
발해의 옛 유적지를 돌아보는 등 본격적으로 우리 고대 역사를 연구했다.
그 결실로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조선연구초>등을
저술하여 한국 고대사를 체계화하는 업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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