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佛家)의 사랑 (1), 자비(慈悲)와 연기론(緣起論)
불(佛)자는 부처라는 의미가 있다. 부처는 깨달은 자이다. 그러면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가? 자신이 대단히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대단히 존귀한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큰 사랑을 지닌 존재이다. 대자대비의 큰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자비(慈悲)에서 자(慈)는 남에게 기쁜 일이 있을 때 자기 일처럼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이고, 비(悲)는 남에게 슬픈 일이 있을 때 자기 일처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자대비는 남에게 기쁜 일이 있을 때 그 사람보다 더 크게 기뻐하는 것이고, 남에게 슬픈 일이 있을 때, 그 사람보다 더 크게 슬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크다(大)는 것은 감정의 깊이뿐만 아니라 넓이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대자대비는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감정(感情)을 느끼는 모든 존재에까지 미치게 된다. 불교에서는 정을 느끼는 유정(有情)의 존재와 정을 느끼지 못하는 무정(無情)으로 존재를 구분한다. 그러고는 모든 유정(有情)의 존재와 정을 함께 나눈다.
불가(佛家)에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육식을 하지 않고, 불살생(不殺生)을 계율(戒律)로 지킨다. 일반 재가 신도들조차 방생(放生)의 덕을 쌓기도 한다. 그런데 방생을 하면서 그 대가(代價)로 공덕(功德)을 쌓아서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경우도 있는데, 방생을 통해 자비의 마음이 커지지 않으면 오히려 욕심만 키우게 된다.
불교에서의 공덕은 공들여서 덕을 쌓음 인데, 자비의 마음이 커지면서 저절로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공덕이 쌓인 결과로 좋은 환경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말한 좋은 환경이란 건강한 마음과 몸을 지니게 되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하는 사업이나 일이 수월하게 잘 풀려서 복운(福運)이 넘치는 상황에 놓이게 됨을 말한다. 수도자가 아닌 일상인이라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게 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게 된다.
복운이 넘치는 상황에 놓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절에 가서 시주(施主)를 하거나 방생이라는 수단을 사용해도 소용이 없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자비의 마음을 키우려는 수도(修道)를 해야 한다. 자비의 마음이 커지면 공덕이 쌓이게 되고, 그 결과로 복운이 넘치는 환경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비의 마음을 키우지는 않고 부처님께 복을 비는 사람은 욕심만 키우게 되니 오히려 재앙이 넘치는 환경에 처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나의 밖에 있는 부처님께서 나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닌 외도(外道)이다. 이것에 비해 불교는 내도(內道)이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자비의 마음을 가지면 그에 따른 몸과 환경을 갖게 된다는 이치를 가르쳤을 뿐이다.
부처(佛)의 마음인 자비(사랑)를 가지면 복운이 넘치는 인생이 된다고 가르친(敎) 것이 불교(佛敎)다. 불교는 단순히 도덕, 윤리를 가르쳐 착하게 살아라는 것이 아니다. 행복하게 되는 길을 가르치고. 불행한 길을 가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대로 하면 행복한 길과 불행한 길을 분명히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된다. 눈을 뜨지못하면 어두운 무명(無明)이고, 눈을 뜨면 밝은 법성(法性)이다.
무명과 법성의 갈림길은 자비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느냐, 일어키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면 반야(般若, 부처의 지혜)를 지니게 된다. 자비의 마음은 모든 유정(有情)의 생명이 느끼는 슬픔이나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하면 지닐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해 불교는 연기(緣起)에 대해 제대로 알면 저절로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럼 연기(緣起)가 무엇이길래 연기를 제대로 알면 저절로 자비(사랑)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인가?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약자이다. 인연생기(因緣生起)는 인(因)과 연(緣)이 만나서 모든 존재가 생긴다는 말이다. 이때 인(因)은 주체의 내부에 있는 원인이고, 연(緣)은 그 주체를 둘러싼 환경이다. 이것은 주체 내부에 그러한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맞는 환경에 처해진다는 말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그러한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인연생기론에 의하면, 내가 이런 몸을 지니게 된 원인은 나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고, 내가 이런 환경에 처하게 된 원인은 나의 생명 속에 있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라는 것(색심불이[色心不二])이며, 나와 내가 처한 환경이 둘이 아니라는 것(의정불이[依正不二])이다.
우리들은 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거울을 본다. 나의 눈이 바깥을 향해져 있기 때문에 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반사가 되는 거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이라는 거울을 보고, 자신이 처한 환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과 거울을 보고 있는 자신이 같다고 생각하면서, 왜 자신의 마음, 몸, 환경을 같다(不二)고 생각지 않는가?
나는 왜 이런 몸을 가지게 되었는가?, 나는 왜 이런 부모를 만났고, 배우자를 만났고, 자식을 만났는가? 나는 왜 가난하거나 부자이고, 나는 왜 머리가 나쁘거나 좋은가? 나는 왜 이런 곳에 살고 있는가? 나는 왜 이런 일에 종사하는가? 나는 왜 친구나 지인들이 이러한 사람들인가? 등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일들이 전개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환경에 처해져 있든지, 그것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라면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즐겁지 않으면 내가 즐거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즐겁지 않는데도 내가 즐겁다는 것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기론을 부정하는 것이며, 무명(無明)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내 자식이 좋은 일이 생겨서 기쁨에 넘쳐 있는데도 그 기쁨이 나의 기쁨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자(慈)가 없는 것이댜. 자식이 아파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비(悲)가 없는 것이다. 즉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내 안에 이러한 자식을 만나야 할 인(因)이 있고, 그것에 합당한 연(緣)으로 그 자식을 만나 부모자식이 되었다는 인연(因緣)을 생각한다면 그 자식의 즐거움과 고통은 바로 나의 즐거움과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식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나 동물들도 연기론(緣起論)을 적용해서 함께 즐거워하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부모에 대해서는 연기론을 적용해서 함께 즐거워하고 괴로워하기가 쉽지 않다. 즉 자식의 일은 곧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부모의 일은 곧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어리석어서 자기 자신을 너무 작게 보기 때문이다.
사실은 연기론에 입각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도 자기 자신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자식 정도까지만 자기 자신으로 보고 나머지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욱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자식까지도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자식을 버리거나 이용한다. 이런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만 자기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까지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연기론을 제대로 알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 모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자신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된다. 연기론를 제대로 알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도 알게 된다. 이 세상에는 나와 나의 환경밖에 없다. 나의 환경도 나이기 때문에 결국 이 세상에는 오직 나밖에 없다. 나는 세상의 괴로움을 줄이고 즐거움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이다.
이 존귀한 사람은 자비의 마음이 가득찬 큰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지 모든 존재가 즐겁게 되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의사라면 환자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되고, 환자의 즐거움이 자신의 즐거움이 된다. 교육자라면 피교육자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되고, 피교육자의 즐거움이 자신의 즐거움이 된다. 사업가라면 소비자들의 즐거움이 자신의 즐거움이 되고, 소비자들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