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관논총
국사관논총 國史館論叢 第16輯
小白山脈地域의 交通路와 遺蹟
Ⅱ. 小白山脈의 諸路와 開通問題
2. 鷄立嶺路
2. 鷄立嶺路
계립령도 삼국시대에는 죽령과 비슷한 입지조건으로 중시되었다. 계립령의 개통은 죽령보다 2년 일찍 이루어 졌다.
즉 阿達羅王 3년(156) 4월에 비로소 계립령로가 개척된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 소백산맥을 넘는 교통로는 東路에 竹嶺路, 西路에 尙州와 報恩 사이의 化嶺路가 있고 中路는 鷄立嶺路이다. 계립령로는 문경의 동북쪽 계류인 身北川을 따라 布巖山으로 오르는 길목의 唐浦里-龍淵里-葛坪里와 觀音里의 ‘황정’·‘사점’·‘관음’·‘포암’ 마을을 지나 소백산맥의 주 능선이며 경북과 충북의 경계인 高度 525m의 속칭 ‘하늘재’를 넘는 길이다. 그리고 ‘하늘재’에서 충북쪽으로는 彌勒里―松界里―洑坪里―上老里―驛里―黃江나루로 이어지는 길과 彌勒里-지릅재-寺門里-安堡里로 통하는 두 길이 있는데, 결국은 모두 驛里에서 합쳐져 충주로 통한다.
게립령은 鳥嶺의 設關 이후 거의 폐로가 되었던 관계로 그 위치를 비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혼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미륵리와 수안보 사이의 속칭 ‘지릅재’가 音似하여 계립령으로 보기도 하였으나 미륵리 동쪽의 속칭 ‘하늘재’가 계립령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註 043 그러나 미륵리는 嶺路上의 작은 盆地이기 때문에 미륵리의 동서쪽에 있는 하늘재와 지릅재는 크게 보아서는 하나의 嶺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굳이 구분하여 어느 한 쪽만을 계립령으로 단정지으려는 것도 합리적이지 못하다.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에서 송계계곡을 따라 남한강 줄기에 이르는 길이 훨씬 순탄한 길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는 충주로 통하는 가까운 길만을 생각하고, 계립령의 개척 당시에 槐山과 延豊에 접근하고 있던 백제세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백제는 多婁王 36년(63) 10월에 이미 娘子谷城(淸州)까지 국토를 넓히고
그 다음해부터는 報恩과 沃川에서 130년 간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또한 古爾王 22년(255)과 45년(278)에는 槐谷城(槐山)을 공격한 사실이 있다.
이로써 볼 때 계립령은 충주쪽은 물론 연풍-괴산-청주로도 향하는 교통로의 역할도 겸한 것으로 보이며 미륵리에서 지릅재를 넘어 연풍쪽으로 향한 길이 바로 그러한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남한강의 수로만을 중시하여 길이 열린다면 문경에서 계립령을 넘는 길이 편리하다.
그러나 수로의 이용가치가 보다 커진 후대에는 계립령을 폐하고 괴산쪽에 더 가까운 鳥嶺路를 중시하고 있다.
이것은 충주와 함께 연풍·괴산방면을 배려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계립령은 미륵리 동쪽의 하늘재에서 수안보방면의 지릅재에 이르는 전구간을 凡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릅재나 하늘재(또는 大院嶺·寒暄嶺) 등 현재의 지명은 고려시대 이후에 변천된 것으로서 미륵리에 石窟寺院이 조성되면서 중간지점이 생겨 동서의 고개이름이 분리된 것으로도 보여진다.
계립령은 麻木峴註 044·麻骨岾註 045·麻骨山註 046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하늘재에서 미륵리를 거쳐 송계계곡으로 향하는 길목이 지릅재보다 더 중시되면서 고려 때에는 大院嶺이라는 명칭으로 문헌에 나타난다.註 047 대원령은 곧 하늘재이고 삼국시대의 기록에 등장하는 계립령의 일부이다.
삼국초기 신라와 백제가 이웃의 小國들을 병합한 뒤 소백산맥이라는 자연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직접적인 대결이 이루어지자 신라측에서 처음 계립령로를 개척하였다.
그 후 고구려의 남하로 4〜6세기 초에는 고구려세력이 신라지역에 깊숙히 침투하여 盈德·蔚珍까지 차지하였을 때는 소백산맥 동북쪽 즉 죽령은 고구려가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계립령은 계속 신라의 방어선이 되었고 眞興王代에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면서 6세기 중엽에는 계립령 이북까지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고구려는 재차 남하하여 청주 娘臂城까지 진출하였으며 소백산맥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溫達의 출병이 결행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史料에는 상세한 내용이 보이지 않으나 이 지역이 軍事要路요 關防으로서 크게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실례로 미륵리 동쪽의 하늘재 서쪽의 神仙峰, 북쪽의 月岳山에 삼국시대의 石城遺址가 남아 있다.
고려 高宗 41년(1254) 9월에 蒙將 車羅大가 忠州山城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뒤 남하하여 10월에 尙州山城을 공격하는 바, 이때 남하하는 길에 계립령을 넘어 갔을 것으로 보이며 다음해 10월에는 몽고군이 大院嶺을 넘자 충주에서 精鋭軍士를 내어 천여 명을 격살했다고 하는데註 048 이 大院嶺은 곧 오늘날의 하늘재이며 삼국시대 鷄立嶺路上의 일부이다. 조선중기 특히 壬辰·丁酉倭亂과 丙子胡亂을 통해 鳥嶺路가 그 험준한 지세로 인하여 군사의 요충으로 중시되자 계립령의 군사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은 적어지고 있으나 조선말기에 와서 이곳에 關防을 설치하여 대비해야 한다는 方略이 제기되었고註 049 실제 月岳山 아래의 계곡에 북문·남문·동문의 城門과 城壁이 축조되기도 하였다.
계립령은 개척된 이래로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의 北進·南下의 중요한 軍事路였으며 통일신라 이후 남북을 오가는 교통로가 되어 신라 폐망시 麻衣太子가 金剛山으로 가면서 머물렀다는 전설이 현지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미륵리의 石窟寺院은 바로 이러한 교통의 요지에 세워진 사찰로서 裨補와 護國의 측면에서 국가적인 발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註) 043
: 주 12) 참조.
註) 044
: 《三國史記》권41, 列傳 1 金庾信 上條에 “善德王十一年壬寅春秋公…(高句麗)王謂曰麻木峴與竹嶺 本我國之 若不還則不得歸….”
註) 045
: 《世宗實錄》권149, 地理志 延豊條에 “麻骨岾 在縣北 東進聞慶炭項西進周井.”《新增東國輿地勝覽》延豊縣 山川條에 “鷄立嶺俗云麻骨岾.”
註) 046
: 《新增東國輿地勝覽》聞慶縣 山川條에 “鷄立嶺俗號麻骨岾.”
註) 047
: 《高麗史》권24, 世家 24 高宗 42年 10月條에 “蒙兵踰大院嶺忠州出精銳擊殺千餘人.”
註) 048
: 《高麗史》권24, 世家 24 高宗 40∼43 年條 참조.
註) 049
: 高宗 19년(1882) 경에 鄭混이 쓴《進齋集》권3에 〈寒暄關防方略〉이 실려 있다
(《月岳山地表調查報吿書》,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3, p.32).
13809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Copyright ©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