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 몽중작(夢中作) - 이황
霞明洞裏初無路 하명동 안에는 애초에 길이 없었는데 春晩山中別有花 늦은 봄 이 산중엔 기이한 꽃들 피었네 偶去眞成搜異境 우연히 갔다가 참으로 좋은 선경을 찾았으니 餘齡還欲寄仙家 늘그막에 돌아가 신선같은 집을 짓고 살리.
애초에 길이 없었다니 평소 인간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다. 알고 보니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데, 그처럼 좋은 선경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아직은 현실과 거리를 두고 살기에는 젊지만, 늙은 후에는 거기에 돌아 가서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다. 지성구세(至誠救世)를 목표로 하는 유학자인 이황이 늘그막이나마 신선처럼 살고자 한 것은 의외다. 사실 이황의 삶은 한마디로 신퇴(身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은일적 요소가 많았다. 이 같은 삶은 당시 현실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몸부림이었다. 합리성과 이타성(利他性)을 강조하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볼 때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허황되고 또 개인주의적이다. 이런 점에서 이단(異端)이라 하여 배척하기도 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년)가 장생하여 구시(久視)하는 술법이나 껍질을 벗고 뼈를 바꾸는 기술이 있을 리 있겠는가? 대낮에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없다. 신선이 되게 하는 영약은 있지도 않으며, 황금은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장생구시설과 신선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보충자료 - 이황과 신선 사상 최치원과 같이, 혼탁한 세상에서 신선 같은 삶을 살고자 한 지식인은 역사적으로 매우 많았다. 그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인물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학자라 일컬어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년)이다. 이황은 42세 때 어느 늦은 봄날 꾼 꿈을 소재로 「몽중작(夢中作)」이란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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