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요양부터 압록강까지의 지역을 직접 밟아 본 선학들이 남긴 감상문이다.
최부 <금남표해록>1488
해주.요동 등지의 사람들은 반은 중국인이고, 반은 우리나라 사람이고, 반?은 여진 사람이었다. ... 석문령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 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과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대개 우리 나라 사람과 같았다.
荷谷 허봉 선조 원년(1567) 진하 부사
동팔참의 땅은 산동에 예속되어 요동의 외요가 되며, 산천은 우리나라와 꼭 같아서 준엄한 영과 큰 하수가 많다.
김정중 <연행록>
회령령, 회정길, 여기부터 마을 모양과 물맛이 자못 우리 나라와 같은 느낌이 든다.` `연산관은 옛 鵝골關이다. 원발점에 들어가 말을 쉬게하고 좌우의 가게를 찾았다. 가는 곳마다 가게 주인이 한 잔의 차를 내어 들기를 권하니, 제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예절이 있다. 문 위 춘첩자가 있는데, 문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복을 받고 호는 동.서.남.북의 재물을 들이다`는 글귀가 우리 나라의 저자문에 붙은 축어와 비슷하다.
권협 <연행록>
분수령 이북의 지세는 북쪽에서 내려와 골짜기의 여러 물이 모두 태자하에 모여서 서쪽 혼하로 들어가고, 분수령 이남의 물은 모두 팔도하로 모였으니, 분수령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김창업 <노가재연행록>
분수령은 평탄하며 서쪽 물은 요하로 들어가고 동쪽 물은 중강으로 들어가므로 이렇게 이름지였다. 금주.복주.해주.개주 등 요동의 모든 산은 여기에서 나아간 산맥이다.
김순협 <오우당연행록>
대개 송참부터 이 곳(분수령)까지의 120 리 사이는 비록 봉교나 골수와 같이 높고 큰 산들은 없어도 여러 험한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연이어져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도 마을을 열 만한 곳이 없다.
홍대용 <당헌연기>
책문은 변방의 황폐하고 궁벽한 지방으로 습속이 유치하고 사나우며, 입고 먹는 것을 오로지 조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행이 도착할 때마다 땔나무 같은 모든 물건의 값이 때를 틈타서 마구 뛰어오르고 방세도 매우 비싸게 받는다. 의주 사람들과는 이웃처럼 친숙하게 지내며 우리 나라 사정을 잘 알고 있어, 이해 타산에 밝고 교활한 것이 모두 우리 나라 풍속 그대로다. ... 북쪽 풍속은 사람을 비켜 세우는 법이 없는데, 오직 봉성 사람들만은 우리 나라 사정을 익히 알고 있어서 성장이 자나갈 때면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소리질러 길 아래로 비켜 세웠다. ... 책문을 열자 수백 명의 청인과 산서 상인이 몰려 나왔다.
유득공 <연대재유록>
책문의 호인은 사납고 거세어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매우 무례한데, 이 두 사람은 사람을 대접할 때에 예의가 매우 정성스럽고 도타우니, 풍속이 변방과 크게 다름을 알겠다.
김경선 서장관 <연원직지> 1832
책문에서 영수사까지로 하루 2 참씩 합하여 8 참이 되어 이름지은 것이다. 팔참 사이는 높은 산과 험한 고개, 큰 내와 깊은 숲이 많아 길이 매우 험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수레를 뒤집을 염려가 있다. 대개 그 난립한 산 중간에 널려 있는 들판이 많다. ... 고려촌은 요동들 첫머리에 있는 촌으로 촌가 수십 호가 있다. 동녕위의 옛터로 고려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崔認齋(이름은 晛 1563~1640)의 기록에는 `고려촌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고려말을 하고 차차 자라면서 의상과 관복은 고려 것을 많이 쓴다.`고 했는데 지금 보기에는 촌락이 매우 쇠잔하여 그 사람들이 아직도 고려의 후손인지 알 수 없다. 대개 동서로는 여기서(신요동)부터 산해관까지 이르고 남북으로는 의산醫山에서 시작하여 바다 가까이 이르러 그 길고 넓게 뻗친 것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천지가 큰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요양부터 압록강까지 사이의 동팔참 지역은 비록 청국 영역에 속하게 되었으나 고려 말까지만 하여도 고려 강역이였기 때문에 최부의 기록과 같이 요동사람들 까지도 중국인이 반 조선인이 반일 수가 있었다.
그 근거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요양에서 동남쪽으로 450 리 떨어진 압록강과 서기전 2 세기 초의 준왕 조선의 왕검성이였던 이조선 시기의 평양부까지는 대략 1000 리였고 이 영역은 서기전 108 년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중국 2 번째 정사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요동군 지역을 흐른 대요수와 염난수 위치가 아래 모사도 표시와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양 동쪽 지점부터 압록강 의주까지의 450 리 로정은 <후한서/군국지> 낙랑군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졌다는 낙랑군 영역의 서쪽 반半에 해당한다.
또 요동군 동쪽 끝에 있는 새塞 바깥 지역을 흐르는 패수는 당연히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에 설치된 패수현을 흐른 패수이고 이 패수는 1910 년 대 일본이 청국과 조선 사이의 국경 지역 지리를 변조.이동한 후의 란하 곧 지금의 란하 중류의 동쪽 작은 지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신채호는 `고대의 요수는 란하`,`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라고 정확하게 인식하였고 계연수는 비록 패수를 변조.이동된 란하 본류라고 잘못 인식했지만 큰 틀에서의 패수 위치를 짚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평대군이 요양을 떠나 의주를 거쳐 도착한 평양까지의 로정도 한 시기 설치된 낙랑군 전 영역을 관통했음을 알 수 있고 <한서/지리지> 낙랑군 탄열현에 주석된 분려산에서 발원한 820 리 길이에 이르는 열수도 낙랑군 중앙 지역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 이조선 시기의 압록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