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아리랑 고개 순담
이태 전, 미국에서는 유수한 음악가들이 모여 세계에서 아름다운 민요곡을 골라보기로 했다. 각국의 민요들이 소개되는 중에서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라는 우리의 민요 아리랑 가락이 리듬을 타고 흐르자 장내가 묘한 분위기에 술렁이더니 참석자의 최다수 지지표인 82%를 받아 아리랑이“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선정되었다.
사실 아름다운 선율로 치자면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세계적인 애창 민요가 많이 있음에도, 더구나 한국대표가 참석하지 못한 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더없이 귀한일이였다. 미루어 보건데 그간 전 세계에 넓이 알려진 우리 아리랑은 인생의 희노애락이 애잔하게 흘러 영혼에 파고드는 가락이라서 누구에게든 거부 할 수 없는 감동과 친근감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는 민초들의 애환을 그리는 아리랑 고개가 도처에 있다. 나는 요즘 북한산에 오르느라 돈암동아리랑고개를 넘을 때면 부산영도에 있는 아리랑 고개를 떠올리게 된다. 영도 아리랑 고개는 봉래동 조선소造船所앞 큰길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가파른 고갯길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영도에 살던 1954년, 희망했던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게 된 나는 그해 여름 돈을 벌기 위해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영도아리랑 고개를 넘어 다녔다.
영도 아리랑 고개는 영도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고갈산자락에 부채 살처럼 펼쳐져진 산마루 고갯길이다. 낙동강 하류에서 몰아치는 갯바람을 맞고 있는 제2송도와 신선동3가로부터 동쪽으로 복천사를 지나 부산항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영도시내의 목이 좋은 곳은 덕대가 크고 장사에 이력이 붙은 이들의 차지여서 어린초보자인 나는 변두리를 찾아 다녀야 했다. 그들이 100개 정도를 가지고 나갈 때 나는 30∼50개정도를 가지고 뒷골목으로 해서 산동네를 찾아다니다가 아리랑 고개를 넘어 다니게 됐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군용천막이 줄지어있는 청학동피난민촌을 찾아 ‘아이스케키∼아이스케키∼시원하고 달콤한 얼음과자∼아이스케키 사이소’를 외친다. 경쟁자가 없는 곳이라 한 번에 보통 2-30개를 쉽게 팔고 점심때는 아랫마을 청학동시장에 들려 국수를 사먹으면서 나머지를 다 팔았다. 이렇게 낮에 두 번 팔고 밤에도 한차례씩 팔러 다니다 어느 날 밤 봉래동 으슥한 골목길에서 불량배들을 만나 아이스케키를 빼앗기지 않으려다 두들겨 얻어맞았다. 하지만 한 개를 팔면 300환이 남아 세 번을 팔면 3만환을 넘게 벌수 있어서 날이 좋을 때면 하루에 두어 번 씩 아리랑고개를 넘어 다녔다.
어느덧 고개 너머에는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단골도 생기고 천막촌과 시장에서는 부지런한 학생 아이스케키 장사라고 알아주는 이가 생겨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오래전 영도는 사람은 살지 않고 국마장만 있어 이곳 말들이 그림자가 끊어진 것처럼 빨리 달린다 해서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에 섬도島를 붙여 절영도라고 불렀다. 1881년 동삼동 중리에 수군절영도진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거주하고 중리로부터 청학동바닷가 사람들이 뭍으로 생선을 팔려 나가기위해 넘기 시작했던 고갯길이 지금의 영도아리랑 고개다.
영도 산동네에는 미군C레이션 박스로 지붕을 한 판자 집들이 즐비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바람이 많은 곳이라 꾸불꾸불한 돌담 길가 채소밭 모퉁이에는 걸름으로 쓰기 위해 인분을 모아둔 웅덩이들이 군데군데 있어 캄캄한 밤에는 나쁜 사람들과 인분웅덩이를 조심해야 했다. 아이스케키는 여름한철 장사인데 비오는 날이면 대개들 장사를 접고 극장에 가거나 화투를 쳤지만 나는 비가 개이기를 기다렸다가 곧장 장사를 나가곤 했다.
아이스케키 공장에서는 열심히 장사를 하는 나에게 50개를 팔 때마다 덤으로 몇 개를 더 주어서 먹고 싶을 때 한두 개를 꺼내 먹으면서 이를 남겼다. 밤에는 두세 시간 만에 30개를 이상을 팔아야 했는데 잘 팔릴 때는 두어 시간 안에 50개를 팔기도 하고 갑자기 비가 내릴 때면 반도 못 팔았다. 몇 천원이라도 번 돈으로 남항동시장에 들려 ‘나마까시’라는 생과자를 한 봉지 사들고 가 어머님께 보이고 누이동생들과 같이 먹을 때가 즐거웠다.
어느 날 밤은 일찍감치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갔다가 열 개도 못 팔고 돌아오는 길에 봉래동 ‘중고부’라는 조선소 앞을 지나다 운 좋게 담 너머로 아이스케키 열 개를 팔았다. 일만 원짜리 지폐를 받아들고 밝은 곳으로 와 펴보니 교묘하게 그린 가짜 돈이라 하루 밤 장사를 공치게 될 판이었다.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그럴 수 없어서 그 돈을 찢어 없애버리고 말았다. 깡패들한테 얻어맞으며 아이스케키를 빼앗기고 가짜 돈을 받기도 하면서 돈 벌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왕에 시작한 것이니 내년도 중학교 진학을 위해 돈을 모으려는데 그 때까지 영도에는 우체국이나 은행이 없었고 예금하는 방법도 잘 몰랐다. 매일 번 돈을 집에 맡기면 될 텐데 그 때 생각으로는 급하면 집에서 누가 써버릴까 바 내 스스로 목돈을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에 집중하게 되었다. 마침 합천에서 온 등치 큰 청년이 나랑 장사를 같이 하다 실적이 부진하자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아이스케키 만드는 일을 하게 되어, 그를 믿을 수 있다 싶어 매일 번 돈을 예금하듯이 그에게 꼬박꼬박 맡기게 되었다.
나는 무슨 일이건 재미가 붙으면 정신없이 몰입하는데 집에서도 간섭을 하지 않아 아이스케키 장사로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져 들었다. 돈을 모아야지라는 일념으로 어깨뼈가 으스러지도록 무거운 통을 매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 다니는데 추석이 지나자 아이스케키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맡겨 둔 돈을 찾고 장사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내 돈을 가지고 있는 청년을 찾았다. 그런데 청년은 태도를 바꾸어 위협적인 자세로 돈을 다 써버렸다고 배짱을 부리는데 돈을 맡겼다는 증서나 내세울 증인이 없어 떼이고 말았다.
억울하고 분해서 청년을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인데, 일본에서 나와 조선말이 서툴던 유년시절 밖에서 놀림을 당하고 애들에게 얻어맞고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얘야, 너를 놀리고 때린 애들은 밤에 웅크리고 잔단다. 하지만 얻어맞고 온 너는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단다.”라고 위로해주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심하게 얻어맞은 것 이상으로 마음에 멍이 들었지만 몸을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듬해 원래 희망했던 대로가 아닌 미션계인 덕원중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등교하면 먼저 예배를 드리고 매주일 한 시간씩 성경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의 방침에 따라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드렸다는 담임목사님의 도장을 받아 성경시간에 교목에게 제출해야 했다. 나는 1학년 3반 급장이라서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부득이 동네에 있는 명신교회를 찾게 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지금도 그 때를 회상하면 아리랑 고개를 넘나들던 나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고 교회생활을 같이하던 또래들이 그리워진다.
(2010년 10월 2일 수원샘내마을에서 최 건 차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