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해지려면 돈이 아니라 목숨을 걸어라
- 람잔 카디로프
2004년 2월 13일, 카타르 수도 도하를 지나던 승합차 한대가 폭발했다. 이슬람 사원에서 300미터 떨어진 교차로였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사람은 병원에 옮겨져지만 곧 죽었다. 51살의 체첸인이었고, 그 옆에는 13살의 아들이 타고 있었다. 앞에 타고 있던 경호원으로 보이는 2명의 체첸인은 죽었지만 아들은 중상을 입고 살아 있었다.
차량 폭발 현장
카타르 경찰은 최초에는 이를 차량 사고라고 생각했지만 죽은 자의 신원이 밝혀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뒷좌석의 시신은 체첸 2대 대통령 젤림한 얀다르비예프였다. 그는 2차 체첸전이 발발한 직후에 체첸 전권 대사로서 아프간에 갔지만 9.11 테러로 인해 아프간이 미국의 전장이 되자 카타르로 이동하고, 그곳에 3년을 거주하면서 중동의 무슬림들에게 체첸 독립의 대의에 대해 호소하고 체첸군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그를 송환할 것을 카타르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특히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이후로는 강한 압박을 가했다. '내란기'의 체첸 강경파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아프간에서 탈레반 수뇌부와 면담을 했던 경력으로 인해 그는 알카에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로 간주되었으며, 미국의 정보부 측에서도 그의 이름을 FBI 명단에 올려놓고 인터폴에도 테러 지원 혐의로 수배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카타르 정부는 그의 테러 지원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며 얀다르비예프에 대한 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카타르에서 기도하는 얀다르비예프
카타르 측의 협력을 얻기 힘들다고 생각한 러시아는 2003년의 일련의 테러가 발생한 이후로 보다 확실한 수단을 찾기를 원했다. 2004년 2월 13일에 발생한 폭발은 이런 정황 중에 발생한 일로 러시아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없었다. 그러나 카타르 정부는 사건 다음날인 2월 14일에 얀다르비예프를 암살한 혐의로 3명의 러시아인을 체포했다. 주 카타르 러시아 대사관의 수석비서인 알렉산더 페티소프와 러시아 정보총국 (GRU) 소속 요원인 아나톨리 야블로츠코프, 바실리 푸가초프였다. 이중 고위급 외교관인 알렉산더 페티소프는 간단한 조사후에 바로 석방되었다. 그를 오래 붙잡기에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너무 껄끄럽기 때문이다.
푸틴이 카타르 수장(emir)인 하마드 빈 칼리파를 만나는 장면. 2007년도
하지만 GRU 요원 2명에 대해서는 조사를 계속하였다. 러시아측은 이들의 감금이 불법이라고 외교적으로 항의하였고, 푸틴 대통령은 그의 레닌그라드 주립 대학 시절의 친구이자 유능한 변호사였던 니콜라이 예고로프의 법률회사(로펌)에게 위의 2사람에 대한 변호를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카타르는 2004년 6월 30일 위의 2사람에 대해 젤림한 얀다르비예프를 암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한다. 카타르 법정의 선고에 의하면 러시아 국방부 장관인 세르게이 이바노프가 직접 암살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 뒤에도 러시아의 외교적인 압력은 지속적으로 가해졌고 결국 카타르 정부는 2004년 12월 23일에 죄수들을 러시아로 이송하여 남은 형기를 마치도록 하는데 동의한다.그러나 2005년 1월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에 나타난 두명의 '죄수'들은 성대한 환영을 받았고, 러시아 감옥에는 물론 수감되지도 않았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해외에 암약하는 거물급 테러리스트를 사살한 영웅들이었기 때문이다.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체첸 2대 대통령은 카타르에서 폭사당했다.
'영웅'들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러시아 측의 다음 목표는 하타브의 후계자이자 체첸 동부전선 사령관인 아부 알 왈리드였다.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왈리드는 아프간 전쟁부터 참여하여 보스니아, 타지키스탄 내전에도 참가한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이븐 알 하타브가 1995년 최초로 체첸 땅을 밟을 때 동행했던 무자헤딘 중의 한명이며 하타브가 수행한 주요 전투를 거의 모두 참전하고 다게스탄 침공과 2차 체첸전에서도 보좌로서 전투 지휘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 유명한 우르스 케르트 전투를 하타브와 같이 지휘하기도 했다.
아부 알 왈리드. 하타브와 달리 외부 노출을 꺼린 편이었다.
2002년 3월 20일에 하타브가 러시아 FSB의 비밀 공작에 의해 죽은 뒤에 그의 후계자가 된 이븐 알 왈리드는 자신이 직접 이글라 미사일로 Mi-24 하인드 헬기를 격추시켰다. 당시 왈리드는 3명의 승무원을 포로로 잡고 있다며 러시아측이 포로로 잡고 있는 20명의 체첸인과 교환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교섭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승무원들은 결국 처형되었다고 발표된다.
아부 알 왈리드가 직접 헬기를 격추하는 장면
이 외에도 2003년도의 '검은 과부' 테러에 깊숙히 관여했던 아부 알 왈리드는 2004년 4월 16일에 타스 베데노의 숲속에서 죽었다. 정확히 어떻게 죽게 됬는 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공군의 폭격에 의해 죽었다는 설과 기도 중에 러시아 저격수에 의해 저격당했다는 설, 심지어 술림 야마다예프가 이끄는 친러시아 '보스토크' 부대의 기습에 의해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죽음으로 체첸군은 하타브 못지 않던 유능한 지휘관을 잃었다.
아부 알 왈리드와 샤밀 바사예프
그의 후계자로 2명이 물망에 올랐는데, 아부 오마르 알 샤리프와 아부 하프스 알 우르드니 였다. 오마르는 와하비 이론가였으며 하프스는 왈리드의 보좌관이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뒤에 후계자는 아부 하프스로 결정되었다. 요르단 출생의 사우디 국적을 갖고 있던 아부 하프스는 타지키스탄 내전 부터 하타브의 부대에 참전하여 전투 경험을 쌓았다. 하타브가 1차 체첸전에 앞서 현장을 방문했을 때 동행했던 사람으로 체첸군의 군사 교관 역활도 담당하였다.
아부 하프스
러시아는 2004년을 들어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체첸군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당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갚아줬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샤밀 바사예프는 위의 두사람을 잃은 것에 비견될만한 큰 타격을 러시아와 친러시아 체첸 진영에 가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런 결과를 만들어냈다.
2004년 5월 9일,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 있는 디나모 축구장에는 러시아 최대의 기념일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조국 전쟁(독소전쟁) 승전 기념식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아흐마드 카디로프도 참석하였다. 지난 2003년 10월 5일에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서 82퍼센트의 지지로 당선된 카디로프는 체첸 초대 대통령의 자격으로 연단에 섰다. 연단 위에는 자리를 빛내기 위해 참석한 친러시아 체첸 진영의 핵심과 러시아 주둔군 수뇌부가 모여 있었다.
연단 위의 수뇌부들. 맨 좌측이 아흐마드 카디로프
오전 10시 반, 행사가 시작되었고 친러시아 체첸 진영의 국가인 "나의 체첸"의 연주에 앞서 모두 연단에서 일어섰다. 체첸 여자 가수인 타마라 다다체바의 노래가 끝나고 모두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아흐마드 카디로프가 일어선 자리 밑에서 152mm 포탄이 폭발했다.
폭발 순간
행사를 위해 내외의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연단 위는 피범벅이 되었다. 체첸 국회 의장 후세인 이사에프, 안보위원회 의장인 아담 바이술타노프, 재무부 장관인 엘리 이사에프가 현장에서 죽었고, 대통령 공보 비서인 압둘벡 바하에프, 내무부(MVD) 수장인 알루 알하노프는 부상을 당했다. 북코카서스 군관구의 러시아군 사령관인 발레리 바라노프와 체첸 주둔군 사령관인 그리고리 포멘코도 중상을 입었다. 특히 바라노프는 다리 한쪽을 잃었다. 24명이 죽고 60명이 부상을 당했다.
어느 하나 할것없이 친러시아 체첸 진영과 러시아 측에는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폭발의 중심지에 있었던 아흐마드 카디로프는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시체를 제대로 수습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러시아에 의해 선출된 체첸 1대 대통령은 불과 7개월만에 체첸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2차 체첸전 시작 이래로 러시아측이 입은 최대의 타격이었다.
아흐마드 카디로프.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아흐마드 카디로프의 사망으로 인해 체첸 대통령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현장에서 부상을 입었던 내무부 장관인 알루 알하노프가 2004년 8월 30일의 보궐 선거를 거쳐 체첸 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7년도에 카자흐스탄에서 출생했던 알루 알하노프는 소련군을 복무한 뒤 로스토프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체첸-잉구쉬 공화국의 교통국장을 거친 뒤에 1차 체첸전에서 러시아군과 함께 체첸군과 싸웠다. 1996년도의 그로즈니 전투 당시 자력으로 포위망을 탈출했던 전공을 기리기 위해 러시아군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알하노프는 2차 체첸전 이후 카디로프 정부의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과거의 경찰 경험을 높이 산 것이다.
알루 알하노프. 친러시아 진영의 체첸 2대 대통령이 된다.
알루 알하노프가 체첸 대통령이 됬을 때, 27살의 젊은 체첸인이 부총리의 자리에 앉게 된다. 아흐마드 카디로프의 아들이자 카디로프 가문의 사병인 '카디로비치'의 수장이었던 람잔 카디로프였다. 아직까지는 아버지를 대통령으로 둔 애송이에 지나지 않던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훗날 체첸 내 반러시아 진영에게 공포의 상징이 된다.
아흐마드 카디로프가 암살되고 푸틴과 만난 람잔 카디로프.
이미 2004년 4월에 "카디로프의 목을 마스하도프 대통령의 발 아래 바치겠다"고 공언했던 샤밀 바사예프는 자신이 원했던 '작지만 중요한 승리' 를 얻어냈다. 체첸군은 폭파됬던 연단 아래의 예비용으로 1개의 폭탄을 더 묻어뒀지만 이를 터트리지 않았다. 아흐마드 카디로프가 죽은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최고 사령관과 친러시아 체첸인 수뇌부가 참가하는 자리에다 폭탄을 이외에도 2개나 더 반입할 수 있었다. 적의 깊숙히 내통자와 협조자가 있음을 과시했던 바사예프는 아슬란 마스하도프에게 "카디로프의 목을 경기장에서 들고오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라고 말했다.
샤밀 바사예프와 아슬란 마스하도프
그러나 단순한 요인 암살로는 군사적으로 확실한 성과를 얻어내기는 힘들었다. 적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적의 부대에 타격을 가하고 적의 거점을 공략해야 했다. 샤밀 바사예프와 체첸군이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를 수행하기에 앞서 체첸군은 큰 타격을 입는다.
체첸 독립선언 이후 현재까지의 주요 전장을 모두 참전했던 핵심 지휘관 1명이 2004년 초에 전사한 것이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Alu_Alkhanov
http://en.wikipedia.org/wiki/Akhmad_Kadyrov
http://news.bbc.co.uk/2/hi/europe/3160962.stm
http://en.wikipedia.org/wiki/Abu_Waleed
|
첫댓글 저 사건 모두 뉴스에서 보던 기억이 나네요.
하인드 헬기 격추는 동영상도 보았고 저 폭탄테러도 뉴스에서 방영하던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때라 그냥 지나쳤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헬기를 격추시켰죠.
인질극, 폭탄 테러와 요인 암살. 테러전의 모든 형태가 다 나왔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친러시아 진영에 상당한 타격이었습니다
람잔 카디로프, 그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동족에게 총을 겨누겠군요. 복수의 악순환.
한번 기세에서 밀리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복수를 하게 됩니다
점점 혼란속으로 빠져든다고 해야겠군요.
사실 그 전에도 요인 테러는 존재했지만 일일이 서술하기는 너무 많았죠
점점 체첸전이 진흙탕으로 변하는 느낌입니다..
그런 양상이 강합니다
통합되기보다는 내분되어 같은 민족끼리 싸우게 만드는 러시아의 전술에 넘어간 느낌입니다.
체첸 내부에도 엄연히 친러시아 진영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좀더 힘을 받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