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35대 경덕왕은 통일신라시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이며 문화적으로 가장 전성기이며 최고로 전제왕권이 확립되었던 시기의 임금이다. 규모와 조각 솜씨로 보아 잘 만들어진 왕릉인데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매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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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덕왕릉>
현재 능 주위에는 원성왕릉이나 흥덕왕릉에 있는 석인상이나 석사자도 없고 오직 능만이 있는데 그 까닭을 현재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정치적인 이유일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경덕왕의 능으로 알려진 이 무덤은 영조 때까지는 이름 없는 무덤이었으나 1730년대 경주 김씨가 족보를 제작하게 되면서 일반적인 무덤보다 규모가 크고 장식이 있는 무덤을 왕릉으로 지정하면서 경덕왕릉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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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덕왕릉 십이지(뱀)>
『삼국사기』에는 「경덕왕의 능이 모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葬毛祗寺西笭)」고 하였으며 『삼국유사』에는 능의 위에 관하여 「처음에는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를 하여 돌을 깎아 능을 만들었더니, 뒤에 양장곡 가운데로 옮겨 장사하였다(初葬頃只寺西岺鍊石爲陵後移葬楊長谷中)」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능 동쪽에는 어떠한 절터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직 언덕 잠(岑)자라는 한 글자에 맞춰서 경덕왕릉으로 지정한 것뿐이다. 한편 강우방은 십이지신상 조각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 800년대인 소성왕이나 애장왕대의 조각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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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덕왕릉십이지(양)>
한편 정신문화연구원이 강인구 선생은 남산 동록의 전헌강왕릉을 경덕왕릉으로 비정한 바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의 능묘제도 발달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신라의 능묘는 발달하는 과정과 쇠퇴해 가는 과정이 너무나 흡사하여 성덕광릉에서 시작하여 경덕왕, 혜공왕,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까지의 왕릉은 능 주위에 호석을 두르고 바깥쪽에는 돌기둥 40개를 세워 돌난간을 세우고 기둥사이에는 돌살대를 끼우는 형식의 인도의 산치대탑을 모방한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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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덕왕릉십이지(원숭이)>
신라인들은 왕릉을 건립할 때 풍수와는 상관없이 장지(葬地)를 결정하였다. 신라인 나름대로의 독특한 지리관(地理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들은 주로 낮은 지역 내지 평지를 장지로 택한 것 같아 보인다. 문무왕 대에서 원성왕 대까지는 주로 경주에서 울산을 잇는 방향에 왕릉이 있었으나 경덕왕만은 예외의 경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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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덕왕릉십이지(개)>
신라시대의 유적 가운데 목조 건축물들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파괴되었다. 주로 몽고의 침입과 왜구의 침입에 의한 것이다. 불상이나 탑들은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무덤만은 전혀 손상이 없이 20세기를 맞았다. 그것은 사람들이 조산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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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덕왕릉십이지(말)>
그러나 일제시대에 그 무덤들도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낙동강 쪽의 무덤이 가장 먼저 발굴되었는데 그것은 임나일본부설의 증명을 위한 것이었다. 해방 후에는 개발 사업에 의하여 도시유적이 파괴되었는데 이때 수많은 토광묘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오늘날까지 통치권 차원에서의 유적에 대한 보호조치는 없는 실정이다. 하루 빨리 보호조치가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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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덕왕릉십이지(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