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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10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11:25-26
<나사로의 죽음>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베다니’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나사로,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그 남매가 어떻게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까요?
눅10: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 이후로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실 때면
늘 그 남매의 집에 가셔서
쉬시기도 하고 음식을 잡수시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일주일,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에도
그들의 집에 유하시기 위하여 다시 성 밖으로
나오시기도 하셨습니다.
마21: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중한 병이 들었습니다.
나사로가 중한 병이 들자 두 자매는
급하게 예수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계셨습니다.
이유는 자신을 선한목자라고 말씀하신 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긴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피하여서
'요단강 저편'으로 피신하셨습니다(10:40참조).
그 거리는 베다니에서 하루길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전갈을 받은 예수님은
“이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4절)라고
말씀하신 후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틀 후 예수는 베다니로 출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15절).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으로
‘하나님께는 영광, 제자들에게는 믿음,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위로'를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나사로의 죽음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랑하는 자에게 병이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고 죽게 되었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병이 있고 죽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내가 병들고
고통당하고 심지어 죽는 것이
주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어떤 때에는 병과 죽음이
있음으로서 주님이 나를 더욱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또 하나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지고 죽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꼭 죽을 뻔하다 살아나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병도 죽음도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 순교자들의 순교도 죽음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죽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듯이 성공하고
건강하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병들고 실패하면 저주받은 것처럼
말하는 것은 성서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1:20에서 말하기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보다 ‘어떤 삶이냐
어떤 죽음이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비유 -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나사로가 이미 죽은 것을 아신 예수님은
베다니로 출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11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말씀을 오해한 제자들이 답합니다.
12-13절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반대가 극심한
유대로 가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당연히 깰 테인데
굳이 깨우러 가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어이가 없는 오해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비유가 아닌
직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4절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성경에는 죽었다는 표현을 대신하여
잠들었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마9:24에서 예수님은 한 소녀의 죽음 앞에서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으며,
눅8:52에서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울고불고 할 때에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고전15:20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컬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표현하고 있으며,
살전4:13-14에서도 죽음을 두고
잠을 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서는 죽음을 잠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첫째, 잠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잠을 자면서 아주 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깰 것을 소망하면서,
아니 당연시하면서 잠을 잡니다.
다시 깨어날 수 없다면 자려고
눕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깰 것을
기대하기에 그리 행복하게 잠드는 것입니다.
예> 어떤 분이 자신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이부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예> 아이들이 잠자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잠이 영원한 것이 아니듯
죽음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살리러 가신면서도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주안에서 잠든 모든 사람들도 함께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살전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이 영원한 것이 아니듯 죽음도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우리도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잠은 쉼을 의미합니다.
병중에서도 잠을 자지 못하는 병은
참으로 괴로운 병입니다.
불면증은 그 자체가 병일뿐더러
다른 병을 유발합니다.
잠을 자지 못하면 신경쇠약에 걸려
하루 종일 피곤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잠을 쉼을 의미합니다.
잠을 잘 자야 피곤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죽 잠이 소중하면 시편기자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노래했겠습니다(시127편).
죽음도 그렇습니다.
인생의 고단함을 잠시 쉬는
잠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매일 노는 사람에게 안식이 필요 없듯이
인생을 허랑방탕한 사람에게는
쉼의 가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말론적인 삶을 치열하게
산 사람만이 죽음을 참된 안식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부지런히 순종하며 산 사람 만이
죽음을 앞두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 예수님 ;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하신
마지막 말씀 - “다 이루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사명을 완수한 자가
누리는 안식의 의미입니다.
잠이 생의 결론도 중단도 아닌,
다만 쉬면서 기다리는 일일 뿐이듯,
죽음도 생의 결론도 중단도 아닌
다만 쉼과 기다림뿐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최후의 순간이 아니라
자기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 경주자에게 골인과 같은 것
<예수님의 자기 선언(비유의 목적)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결국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벌써
나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17절).
유대 랍비들의 전통에 의하면
죽은 사람의 영혼은 육체와의 재결합을 위해
3일 동안 그 육체의 주위에 머무른다고 합니다.
따라서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 사망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중나간 마르다는
예수님께 원망 섞인 말을 했습니다.
21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확신 있게 대답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
이에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대답합니다.
마르다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마지막 날에 모든 이가
부활할 것이라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사로의 부활 시기는
현재, 곧 지금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는데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참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예수님의 자기선언 - 5번째).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내가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니(h` avna,stasij kai. h` zwh,)
나를 믿는 자를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믿는다는 마지막 날의
그 부활과 그 영생이 바로 현재 여기에 와 있는
예수님 자신이다 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마지막 부활과 생명을 현재 와 있는
예수님 자신이 주관한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에 와 계시는 자신이 마지막 날의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자신을 확실하게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믿음 속에는 현재 이생에서
살고 죽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죽는 것도 문제 될 것이 없고,
사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곧 죽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영원한 부활 생명을 현재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원한 부활 생명을
이미 가진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이라
생각 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돌로 무덤을 막아 놓은 것을 보시고는
'돌을 옮겨 놓으라'라고 하셨습니다(39).
그것을 본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했습니다.
돌문을 열 것까지 없다는 뜻입니다.
죽은 채로 미래의 부활 때까지
그냥 두자고 한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래가 아니라
당장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40).
즉 하나님이 자기들 중에 와 계심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고,
돌을 옮겨 놓자, 나사로를 불러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43절).
나사로는 수족이 베로 동인 채로,
얼굴이 수건에 싸인 채로 살아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을 제자들을 위시하여
둘러 선 무리들이 믿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42).
곧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드러내는
목적에서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중에 오셔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증명하는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여기 이 땅에서의 삶이
다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부활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죽음을 잠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바로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죽음관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것도
절망적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안에서의 참된 안식이며
부활을 기대하는 기다림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깊은 잠에 빠지듯이 잠시 쉬는 것뿐입니다.
삶의 과정이요, 자아 완성입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는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