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윌슨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스케치북과 물감을 새로 샀다. 여러 가지 빛 고운 물감을 팔레트에 짜 놓았다. 황홀하다. 나는 좋은 물감을 칠할 때의 느낌을 좋아한다.
그림 공부는 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이 전부였었다. 미술 선생님이 없어서 음악 선생님이 미술도 가르치던 시절에 미술을 배웠으니, 나의 미술 실력은 참으로 형편없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거리 두기 때문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딸아이가 번호에 맞게 색을 칠하면 되는 명화 그리기를 알려 주었다. 그림 재주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지만 번호 매겨진 도안에 맞추어 같은 번호의 물감을 칠하다 보면 조금씩 그림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완성했을 때는 뿌듯했다.
색칠만 하는데도 마치 학창 시절 소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잠을 줄여 가면서 명화 그리기에 빠져들었다.
한 가지에 빠지면 진력날 때까지 해야 하는 나의 성격 탓에 수십 장의 명화 그리기를 하고야 멈추었다. 붓으로 캔버스에 칠하는 것은 자신이 생겼는데 왠지 표절의 마음이 들어서 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선 듯 사람들에게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명화가 우리 집 거실에 몇 점 걸려 있고 명화가 갖고 싶다는 지인 몇 명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나마 지난가을에 이사하면서 버리기도 하고, 아까워 버리지 못한 그림은 창고에 넣어 두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기는 하지만 그림 선생님을 선 듯 찾아가기에는 끈기 있게 할 용기가 없다. 너 튜바에서 가르쳐주는 초보자용 해바라기를 몇 시간 그렸다.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애벌 칠을 하며 명암을 넣었다. 아주 초등학생 수준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가끔 시골 어른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TV 영상으로 보여 주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분들의 그림이라고 하기에 너무 훌륭해 보여서 나도 그림을 그려 볼까 생각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끈기 있게 그려야 하는데 며칠 반짝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사람이 멋져 보여서 흉내를 내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윌슨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영화‘CAST AWAY’주인공 남자가 조난 사고로 남태평양 무인도에서 혼자 남게 되어 우연히 발견한 배구공에 그린 그림이 윌슨이었다.배구공에 그려진 윌슨과 매일 대화를 하고 싸우기도 하고 지낸다.뗏목을 타고 무인도에서 탈출하려다가 그만 배구공이 바다에 떠내려가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나에게 윌슨은 어떤 것이 있을까?
나이 차이 크게 나는 오빠들이 있었지만,나는 집에서 늘 혼자였다.글쓰기는 나에게 윌슨이었다.끼적이기는 나에게 글로 그리는 그림이었다.
밤마다 잉크를 찍어서 일기를 쓰고 친구에게 편지도 보내고 가끔은 동시를 짓기도 하였다. 나에게 또 다른 윌슨은 자전거다.
오늘도 나는 자전거를 탔다.외로움이라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누구나 외로움은 있겠지만 일찍부터 나는 윌슨 으로 인해 외롭지 않았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소소한 이야기에도 공감해 주면 좋겠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이 있어도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 나의 윌슨 자전거를 타고30km를 달렸다.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집 근처에는 신호등이 많아서 차에 자전거를 싣고 자전거 도로로 나가서 라이딩을 즐긴다. 바람도 좋고 앞서 사이클을 타고 가는 젊은이도 참 멋지다.
지나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진지하다.그리고 그 시간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처절한 발자국을 옮겨 놓는 사람도 있다.가끔 만나는 사람 중에 한쪽 다리와 팔에 마비가 와서 겨우 한 걸음을 옮겨 놓는데도 안간힘을 써야 하는 사람이 있다.나는 그 발걸음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는 생명력을 느낀다.그리고 아쉬움도 느낀다.좀 더 일찍 운동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광산촌에 살던 나의 어린 시절 추억 때문이다.광산촌 아버지들은 아내가 저녁밥을 짓는 동안 아기를 태우고 동네를 몇 바퀴씩 돌며 밥이 되기를 기다렸다.아빠에게서 나는 어른 냄새를 맡으며 쭈쭈바라도 얻어먹게 되는 날은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다.
앞 냇가가 놀이터였던 나는 지금도 물을 좋아한다.
일주일에3~4번 정도는 수영장에 가서 수영한다.수영장에 가면 운동을 해서 좋기도 하지만,수영장에서 만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도 나에게 위안을 주는 윌슨이다.
여러 가지를 배워 다방면으로 잘하면 좋겠지만 성격상 한 가지를 오래 하는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나는 외롭지 않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것에 재미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오늘 자전거 도로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연둣빛이 도는 야광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오래된 옛날 휴대용 녹음기에 트로트를 큰소리로 틀고 자기만의 윌슨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었다.
외로움에 갇혀서 지내기보다 남의 눈 신경 쓰지 않고 자기만의 윌슨과 달려가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