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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의 연애> 겉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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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 | 심윤경은 이색적인 작가다.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달리 장편소설을 고집한다는 것이 그렇거니와 젊은 작가임에도 다루는 내용이 광범위하다는 것도 그렇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과 <달의 제단>, 단 두 작품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정도로 심윤경은 세대를 뛰어넘는 놀라운 역량을 선보였다.
최근에 나온 세 번째 장편소설 <이현의 연애>는 어떨까? 전작 <달의 제단>에서 가문과 위선을 파헤쳤던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 절대적 사랑을 탐미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예상 외로 플롯이 간단하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미친' 남녀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미쳤다고 불리는가? 이진은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다. 그녀를 낳아준 이가 그랬듯, 그녀는 운명적으로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영혼을 기록한다는 말은 독특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영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것뿐이다. 이진은 그 역할을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것은 역시 세상의 눈이다. 누구보다 그 처지를 이해해줘야 할 아버지만 하더라도 이진을 미쳤다 하여 폭정으로 대한다.
이진은 어린 시절부터 감금된 생활을 했다. 그래서일까. 사회적으로 무능력하다. 돈을 버는 기술도 없고, 사회적인 의사소통도 평균 이하다. 영혼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데 그녀로서는 방법이 없다. 고작해야 매점에서 거스름돈 거슬러 주는 일처럼 단순한 것만 가능하다. 영혼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럴 리가 없었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것이 이진의 운명이고 그래서 세상은 이진을 두고 미쳤다 한다.
그렇다면 이진을 사랑한 이현은 왜 미쳤다고 할까? 유망한 정치인이 될 기질이 다분한 이현은 결혼생활에 싫증을 낸다. 그래서 결혼과 이혼을 세 번씩 했다. 호사가들의 입을 심심하지 않게 해주는 남자인 셈이다. 그런 이현이 매점에서 거스름돈을 제대로 주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이진을 사랑하게 된다.
이현은 이진의 사정을 듣고 놀라운 제안을 한다. 3년만 같이 살자는 것이다. 이현은 안정된 생활을 보장할 테니 이진에게 아내가 돼달라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제안이다. 하지만 이진은 승낙한다. 운명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이 시작된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그녀의 존재로 <이현의 연애>는 환상성을 지니고 있다. 소재만 본다면 판타지라고 분류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저자가 그려내는 환상성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 의해 기록되는 영혼들의 내력 때문에 <이현의 연애>가 지닌 환상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진이 아니면 말할 기회를 잃은 영혼들의 목소리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길 것이 없다. 판타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묵직함이 <이현의 연애>를 관통하고 있다.
언젠가는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남자! 그의 존재가 등장하면서 <이현의 연애>는 환상의 영역에서 애달픈 사랑이야기로 넘어오고 있다. 물론 이현처럼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들은 문학 속에서 수없이 존재해왔다.
때문에 오직 영혼을 기록하는 것에만 열중하는 여자가 언젠가는 돌아봐 줄 것이라는 믿음만 갖고 노력하는 남자의 마음은 통속적인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현의 사랑은, 심윤경이 그린 그 사랑에는 통속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절대적이라는 단어에는 조건이 있다. 희생과 부활이다. 통속적이라고 한다면 희생에 그치고 만다.
이현은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을 흔들리고 말았기에 소중한 것을 잃지만, 그 안에서 부활한다. 말로만 하는 '영원한 사랑'이 아니다. 행동하는, 누구도 못했던 것을 실천하는 사랑이고 그래서 그것은 '절대적'이라는 수식어를 감싸 안을 수 있다.
이런 절대적인 사랑이 또 있었을까? 비슷한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사랑은 투명에 가까울 만치 순수하고 절대적이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 사랑을 탐미적으로 그려내 독특한 미학으로 점철된 심윤경의 <이현의 연애>, 아름다운 사랑의 기록이 소설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