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에서 오는 모든 것들 [권은숙]

# 결핍에서 오는 모든 것들 나는 구정물이오 발버둥 칠 수도 없이 도무지 알 수도 없이 뒤뚱대며 어른이 되었소 밤마다 비 오는 방에선 책과 이불과 외투가 흐느끼오 모든 흐느낌은 욕된 기억의 하혈을 하고 조금씩 미치게 숨막히게 하오 사랑의 벽은 일렁이오 벽 속에 하얀 여인들이 유령처럼 뜨거운 춤을 추고 뜨거운 병을 흘리오 나약한 에고이스트의 병 정서불안 욕구불만인 자의 습관된 병 신경쇠약 강박편집증 허기 우울 온갖 정신병증후군은 비 오는 방에서 출산되오 조심하오 이 방면에 나는 전과자 통달한 전문가 당신도 중독되기 전에 깨어 있으오 여유 있으오 고통의 정열로 사막을 밀쳐내는 태양숲과 푸른 말을 찾으오 어쨌든, 비 오는 방 - 신현림 * 되바라진 개나리도, 지랄 같은 성질머리의 목련도, 제 풀에 꺾여, 나무 꼬댕이에서 꾸벅꾸벅 졸음 쏟듯 떨어진다. 꽃뱀 허물 벗듯 진탕 몸살을 앓고 났더니, 푸석푸석 살 비듬이 온 몸 구석 진을 치고 있다. 산발한 머리 휘익 잡아 틀고, ‘잘 살아보자’ 우직` 어금니 깨물어 보건만, 빈 속 신물 게워내듯 목구멍만 고역을 치른다. 삶이 어찌 이리 삶은 계란마냥 퍽퍽하더냐. 내게는 어찌 물 한 모금도 금쪽 같더냐. 이 퍽퍽한 살이 치뤄내는 동안, 폼 나게 사랑질 한 번 해봤음 좋겠다. 발정 난 암캐라도 좋다. 혓바닥 늘어트리고 헥헥대는 꼬락서니라도 좋다. 내게 결핍된 한 알의 비타민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질`이란다. 첨언컨대, 결핍은 내 안에서의 거부에 의한 철저한 단절임을 알아주길. 쥐뿔도 없는 자존심 세우기라는 것도. 난, 어쩜 아궁이에 밤새 다독거려 놓은 불씨이길 바라는지도...... 새벽녘, 부지깽이 뒤적뒤적, 훅` 입김 불어넣어 되살아 나 당신에게 따듯한 밥 한 그릇, 국 한 사발로 채워지고 싶은. 뭐든 꿈꿀 때 행복하다지 않던가. 아` 이 어설픈 또 수작 걸기다. 우연찮게 ‘이게 나였구나’하는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 새롭다기보다, 잊고 있었다는 게 맞을 듯. 종종 이 곳에 신현림 시인의 시를 올려놓는 걸 보면, 그녀의 시를 시발시발` 읊조리고 다니는 걸 보면, 분명, 골수팬이라 하여도 좋을 듯하다. 글쎄, 한 대형서점에서 신현림의 시집을 산 구매층을 조사하였더니, 문학소녀라 착각하고 있는 20대 여자들과 창비 매니아, 거기에 혼기를 놓친 30대 후반의 늙은 노처녀들이 대다수라고 하지 않는가. 즉, 이제 막 여자로서의 자아 형성을 이루어가고 있는 젊은 여성에서부터 시인의 신경정신과 출입 병력이란 센치멘탈한 이력을 예술성의 광기로 동경하는 영원한 문학소녀 취향의 늙은 미혼 여성들이 그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다. 결론인즉슨, 난 철없는 센치멘탈 취향의 늙은 노처녀라는 것. 그것도, 거리낌 없이 내적 욕망을 시와 사진으로 배설해내는 시인과는 달리, 방광염 걸린 여자처럼, 방사하지 못하여 배앓이 하는, 요실금 걸린 여자처럼, 문고리잡고 찔끔거리며, 대리 만족하는 히스테리의 여자라는 것. 히스테리(hysteria)의 어원이 자궁(hystero)에서 비롯됐다고 하드만. 주저앉은 자궁, 달고 다님 무엇하나. 채울 것이 없다지. 내 살아가며, 채워지지 않을 것들로 인한 결핍. 결핍은 우울을 부르고, 우울은 죽음을 붙잡는다. 조카의 자살시도, 아버지의 폐암재발, 어느 연애인의 자살, 도처에 널부러진 결핍으로인한 결과물들. 아` 채워줘. 채워줘. 채워줘...... # 비겁하다 욕하지마소. 나, 이번 生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中古品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中 - 황지우 * 첨벙` 가슴에 무덤을 파대던 한 여자가 몸을 던진다. 심청이의 심정으로 내 한 몸 던지면, 울 애비 일평생 호강하려나. 어여쁜 꽃 띠면 애련하다, 가련하다 쯔쯔` 혀라도 차주지. 제 살만 깍아 먹다 훌러덩` 세월만 좀먹고, 빈 거죽만 저리 질질거리니. 한심타, 미련타 가는 길 구박만 꽂히네. 나 여기 머물다 가노라 미련덩이 신발 두 짝 다소곳이 벗어 논다. 퍽` 세상살이 진저리 치던 한 남자가 17층 아파트 난간서 몸을 날린다. 처자식은 제비처럼 입만 벙긋거리건만, 물어올 먹이조차 없으니. 싫다 싫어 내 몸에 붙어 사는 밥벌레들이여. 무수한 날을 반짝`반짝` 속만 태우던 반디족 삶이었구나. 가노라 손가락 빨던 내 어머니 자궁 속으로. 천원짜리 시퍼런 슬리퍼가 두 눈 부릅뜨고 남자의 뒷길에 흔적 하나 박는다. 살아남은 자의 몫이던가? 가끔, 태엽 한번 되돌려 주소마! # 소리가 떨어진다 둘이다가 하나가 되면 그또한 벅찬 현실이 되나 보다. 행복되려는 꿈을 쫓다 지쳐 쓰러진 자리 따스한 사랑의 말은 잃어버리고 눈물만 녹아 내린다. "구두 닦어유, 구두 닦어유" 허이허이 흩어지는 소리 여자가 굽을 고치고는 "왜 이리 비싸요?" 어떤 남자는 내 앞에 동전을 돌맹이처럼 던진다. 봄은 아름다운데 꽃들은 활짝 피었는데... 멀리 극장 간판은 '개 같은 내 인생' 봄은 아름다운데 - 정지운 * 봄날이 오는 건가. 추녀 끝에서 겨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몇 해, 몇 십해를 소리를 받아 먹고, 가슴을 파대고 있는 댓돌. 법당의 어둠은 소리를 우수수 쏟아낸다. 나뭇가지가 자지러지면, 눈(雪)마저 덜컹` 소리를 낸다. 달빛에 찔려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 그 옆에 애기보살의 눈물이 땅바닥에 뚝` 떨어지고 있었다. 애기보살의 눈물 떨어지는 소리...... 밤새, 소리는 간간히 숨을 몰아 쉬며, 툭` 뚝` 떨어지고 있었다. 골이 패인 댓돌엔 손톱자국 물고 있는 목 부러진 복수꽃, 코끝이 자근자근 짓이겨진 무늬 없는 운동화가 어지럽다. 그 눈물은, 한 여자가 남자의 가슴에서 힘겹게 떨어지는 소리...... 툭` 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