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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까?
성경본문: 잠언 25: 13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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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기 목사
북 유럽의 입헌군주국 노르웨이 왕국이 있습니다. 면적은 38만 6919㎢로서 남한의 약 4배이고 인구는 약 453만 명(2002년) 정도 됩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북쪽 북극권은 여름에는 백야(白夜) 현상으로 인해 한 밤중에도 대낮처럼 밝은 반면 겨울에는 낮에도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며칠이고 계속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환경이라면 생활 리듬 무너지기에 딱 알맞은 것 상황 아닐까요?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아간다고 하는 군요?
그래서 사람은 어떤 환경을 만나도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이라 논하면서 살기 좋은 나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 그런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나라도 한 없이 불편한 곳입니다. 장마철을 만나 보십시오. 얼마나 습도가 높고 생활하기가 불편합니까? 거기에다 여름에 태풍 한두 개 정도 지나가면 전국이 비바람 속에 벌벌 떨어야 하고.
홍수가 나서 물난리가 일어나 수재민이 수없이 발생하고 겨울에는 강원도 쪽엔 폭설로 인해 교통마비 되기가 일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좋은 나라라고 합니다.
그 좋은 나라이지만 요즘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아마 올 여름 나기가 그리 쉽지 않을 전망이라고 하네요. 뭐 백년 만에 찾아오는 더위라고도 하고요? 그래서 올 여름에도 냉장고, 선풍기, 에어컨 등 가전제품이 성수기를 이루겠지요.
저도 지난 해 큰 방에 에어컨을 들였는데 올 해는 제대로 시원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울수록 스트레스 안 받고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마음 편히 시원하게 살 수 있도록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올 여름이 대단히 무더울 것이란 예보인 만큼 여러분에게 시원한 환경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교회 안에서 말로 기도로 인품으로 물질로 시원한 청량음료와 같은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이 시간 어떻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이웃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원케 하는 가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 성도를 시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16: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시원케 하였으니. 여기서 시원케 하였다는 말은 원기를 회복하여 쉼을 얻는 것으로서 단순히 육체적인 쉼이나 회복보다는 영적인 위로와 기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에 물질적으로 후원해 준 몇 사람의 이름을 들면서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알아주라. 진가를 충분히 인정하라, 정확히 이해하고 도와주라는 뜻입니다. 시원케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귀한 분이지요. 분명 산소(酸素)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걱정을 덜어주고 마음을 시원케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목회자와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며 이러한 성도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그 교회는 낙원이 될 것입니다.
물질이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그 사랑과 배려가 사람을 시원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기적인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다려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거부감을 주는 사람입니까?
혹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까? 기다려지는 사람, 내가 속한 공동체의 회원을 시원케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에밀 다킨슨의 “헛되지 않으리” 라는 아름다운 시(詩)가 있기에 한 구절 소개합니다.
만일 내가 한 사람의 상심을 건질 수 있다면
내가 사는 것은 헛되지 않으리.
만일 내가 한 사람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고
그 고통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다면,
한 마리의 허덕이는 안락 새를 구하여
그 둥지 속으로 돌려 보내줄 수 있다면
내가 사는 삶은 헛되지 않으리.
성도 여러분!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내가 사랑해 줄 수 있고 또한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시원함이 주어질 수 있다면 비로소 내 삶은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김해삼일교회 성도들은 항상 유쾌하고 시원함을 제공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원함을 줄 수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가치 있
는 삶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주변을 보면,
①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만나고 싶은 기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는 헤어지면 아쉬워서 날마다 전화통을 잡고 있게 마련입니다.
②반면 만나도 좋고 안 만나도 좋은 사람,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별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전화 한 통화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③함께 있으면 답답하고 안 보면 오히려 더 좋은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을 만나면 공연히 스트레스만 받게 되고 전화가 걸리어 오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지지요.
성도의 삶이란 상대방을 시원케 하는 삶이어야지 혹 성도 간에 불화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고, 성도 간에 마음을 무겁고 상하게 한다면 이는 바람직한 삶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외로움이 있는 곳에 위로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교회에 좋은 소식을 가져옴으로 시원케 하는 사람이 됩니다.
잠 25:25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 당시에는 우편 제도나 전신환이 발달하지 못했던 관계로 멀리 있는 소식을 전해 듣기란 여간 쉽지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좋은 소식이 왔을 경우 소식을 받는 자는 상당한 새 힘을 회복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 말씀은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소식을 가지고 오는 사람의 모습보다는 중요한 사실에 대한 소식을 오랫동안 안달하며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범주에서 볼 때 우리는 잠 25:25절의 좋은 기별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good news)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솔로몬 왕이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을 얼음냉수와 같다고 표현한 것처럼 복음의 소식 영혼구원의 소식을 들을 때는 우리 모두가 다 영적 시원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 52:0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 고."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 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런 면에서 우리가 매주일 교회를 나올 때 남들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는가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복음의 좋은 소식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 금년의 표어가 무엇입니까? 영혼의 일일구 운동입니다(요 01:41~46). 한 사람이 한 영혼을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운동, 한 영혼을 구원하는 운동이기에 이 일에 우리 모두가 진력질주 하여야 하며 김해삼일교회 성도인 이상 누구라도 예외는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 15:30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좋은 소식을 들을 때에 척추가 윤택해지고 건강해지며 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좋은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고도(잠 16:24) 말합니다.
병들었던 사람도 좋은 기별을 들으면 치유가 된다는 명약 처방의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일 난 지가 언제인데 밤낮 큰일 났다고만 합니까? 이런 사람을 만나면 솔직히 답답하고 괴로워요.
성도 여러분! 좋은 기별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일을 시켜도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며 그 결과는 항상 좋기 마련입니다.
누가 나를 시원케 해 주지 않는가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누구를 시원하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좋은 소식을 창출하는 아이디어를 짜 내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생각해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움직이는 것이요 특별히 하는 게 아니라 항상 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딤후 04:0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주님의 마음을 맞추는 자가 시원케 하는 사람입니다.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그를 보낸 이에게. 이 말은 사자에게 심부름을 보내는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솔로몬의 경우, 왕이신 자신을 뜻합니다.
솔로몬 왕에게는 국내외를 위시하여 여러 분야에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수행하는 사자들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성된 사자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충성된 사자를 보낸 이가 누구입니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나의 생명이신 하나님, 나의 삶의 전부가 되신 하나님입니다.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주인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가 바로 충성된 자 아닙니까?
이러한 충성 된 자, 하나님을 시원케 해 드리는 자는 먼저 다음의 몇 가지를 알고 신조로서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①첫째가 자신의 정체성 파악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겁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 확실해지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들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이 시원치 않기 때문에 사느니 죽느니, 조금 뭘 됐다고 해서 교만했다가 좀 안 된다고 해서 자살한다고 야단하는 겁니다. 정체성이 뚜렷해야 충성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두 번째는 자신의 위치 파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 앞에서, 성도와 이웃 앞에서, 모든 관계 속에서 내 위치가 어디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위치를 몰라서 사고가 일어나고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섬겨야 하는 위치인지 섬김을 받아야 하는 위치인지를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③세 번째는 사명 파악입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에 나를 냈으며 내 일생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기를 원하시는가를 알아차리는 것 이것 정말 중요합니다.
이 절대적 사명, 생명을 바칠만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런 확실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교회에서 그다지 불만이 없습니다.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사명을 인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로 만족함을 누립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을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분들은 사명의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의식으로 일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목사와 성도들이 위로해 주어야 하고 칭찬도 곁들여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교회 전체가 좀 시끄러워 집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의 그 진행과정은 즐거움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할 일이기 때문이죠. 하나 명예를 바라며 일하는 사람의 그 진행과정은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짜증입니다. 이는 억지로 하거나 마지못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벧전 05:0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된 사람은 마땅히 하여야 할 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합니다. 충성된 사람은 일을 하되 해서는 아니 될 일은 하지를 않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때는 후회가 따르지 않으며 피곤함도 없는 것은 그것이 곧 일에 대한 행복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것만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일을 잘 해도 비난이요, 일을 못해도 비난이요, 일을 한 해도 비난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함께 당나귀를 팔러 시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나귀를 끌고 아버지와 아들이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아니 나귀를 타고 가면 될 것을 둘 다 힘들게 걸어가다니 저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나 하면서 놀려대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나귀에 태우고 아버지는 앞에서 고삐를 잡고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이번엔 노인네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만 버릇도 없이 아들놈이 나귀를 타고 아버지를 걷게 한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들과 자리를 바꾸어서 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아들이 고삐를 잡고 한참을 가다 빨래터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자들이 뭐라고 한 마디씩 하기를 어른이 아이를 학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말이 되고 저렇게도 말이 되자 이번에는 아예, 아버지와 아들 둘 다 나귀에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저 조그만 나귀에 두 사람이나 올라탔으니 나귀가 너무 불쌍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고민하던 아버지와 아들은 마침내 나귀를 막대기에 앞 뒤발을 묶고서는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이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만 넘어지는 바람에 나귀는 다리가 묶인 채 냇물에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하나남 앞에서의 나름대로의 자신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아닌 스스로의 원칙에 충실 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신실한 일꾼이 귀하게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김해삼일교회가 일꾼을 찾기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섬김의 자리, 충성의 자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시원한 얼음냉수 같은 사람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각양의 직분을 받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섬기는 일이며 봉사하는 일입니다. 충성은 주인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은 사람을 대할 때 시원함을 주고 신앙의 매력이 넘치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진정 산소 같고 비타민 같은 사람 마냥 즐거움을 선사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