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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다윗 11 (삼상 25:1-44)
영적적용 : 지혜와 미련
요약
여기 나발은 미련을, 아비가일은 지혜의 예표이다. 나발의 몸이 굳어짐과 10일 후에 죽음은 미련은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 말씀과 연단을 통해서 죽게 됨을, 다윗이 아비가일과 결혼함은 지혜란 사모하고 구하고 품지 않으면 얻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날마다 보혈로 자기를 씻어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다.
설명
우리가 미련을 버리고 지혜롭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 지혜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1절 "사무엘이 죽으매 ‥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1) 사무엘의 죽음 - 가장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2) 바란 광야 - 지혜의 유무는 운명과 관계된다(잠3:13-18).
2. 우리에게 지혜와 미련이 존재한다.
3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1) 두 종류 사람- 우리에게도 지혜와 미련이 거한다.
2) 지혜란 여호와를 경외함이요(시111:10) 미련이란 불신과 악함이다(시14:1).
3. 미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리된다.
13절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1) 칼 - 말씀의 상징이다.
2) 아비가일의 말로 죽음 - 성령으로 전해진 말씀이다.
4. 미련은 연단을 통해 버리게 된다.
38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여기 열흘은 고난을 통하여 미련을 버리게 됨을 보여준다.
5. 지혜를 사모하고 결혼해야 한다.
39-42절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이처럼 지혜는 사모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 특성이 있다.
강해
지난 시간에 다윗과 사울을 통해서 은사의 역할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리 완악한 사울도 다윗의 선행 앞에서 감동되듯 우리의 육신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큰 감동에 휩싸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의 죽음과 다윗이 갈멜 사람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부 당하자 나발을 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 그 내용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하면 다윗이 나발을 죽이려고 400명의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갔으나 나발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을 만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발을 처리하시고 결국은 다윗이 지혜의 여인인 아비가일과 결혼한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지혜와 미련에 있어서 성도는 미련을 버리고 지혜와 결혼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오늘 이 말씀 들으시고 모두 지혜와 결혼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지혜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1절에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했습니다.
여기 1절의 다윗이 처한 상황은 심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무엘이 죽었으니 이제는 사울이 보다 본격적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 동안 사울이 가장 무서워했던 존재가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동안 한 번도 피신한 적이 없는 바란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이 전에는 이스라엘의 황무지나 요새지가 그의 피신처였지만 이제는 광야입니다. 이 바란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
년 동안 방황하던 시내 반도 동쪽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가 중심에 위치한 본격적인 광야입니다. 그가 이곳에 피신한 것은 그 만큼 상황의 악함을 잘 암시해 줍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전에도 다윗은 지혜로 행함으로 사울의 시험을 잘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데스는 더욱이 믿음의 유무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되던 장소였다는 점에서 지혜의 중요성에 좋은 배경을 제공합니다. 왜 성경이 이 지혜를 말씀하면서 이 가데스가 중심에 있는 바란 광야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처럼 지혜의 유무는 생사유무 흥망성쇠 인간의 운명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대왕 솔로몬은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3:13-18) 라고 교훈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이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여(약1:5-8) 모두 얻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 마음속에 지혜와 미련이 존재합니다.
3절에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한 가정에 이렇게도 아주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결혼하여 살 수 있었는가 의아스럽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주관적 구속사의 방향에서 이해할 때 그것은 대부분 내 안에 여러 성향들을 가리킴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나발과 아비가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지혜와 미련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지혜와 미련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지혜와 미련은 학식이나 지식이나 기억력이나 탐구력이나 이해도 등과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란 대부분 신앙의 유무와 선악을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성화된 성도가 성경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신약적인 차원에서는 예수 믿고 성령에 충만한 삶이 곧 지혜입니다(엡5:15-20).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형통하게 허락해 주십니다. 즉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과 그가 예비하신 모든 것을 다 누리게 하시니 이것보다 더 큰 지혜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발이 미련하다고 해놓고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혹은 17절에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또 36절에 이렇게 악하고 술에 크게 취하여 방종한 것을 보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그를 갈멜 족속이라고 했는데 갈멜족이란 문자적으로는 갈렙의 자손이지만 히브리어 독법으로 해석하면 '그는 자기 마음대로 소욕대로 사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발은 가장 미련한 자였습니다.
당시 양털을 깍는 날은 축제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양털을 깍는 일군들 만이 아니라 이웃과 은혜를 베푼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여 온갖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나 당시 블레셋 치하의 안정되지 않은 정치적 상황에서 목축의 기쁨을 누리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이 지켜준 연고로 양들을 빼앗기지 않고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은망덕했습니다. 이는 다윗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수하지 않게 하시므로 살육은 면했지만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미련함에는 심판밖에는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시 111:10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했고, 시 14: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잠 2:18에 미련한 자의 결과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 안에 지혜와 미련 즉 신앙과 불신앙, 선과 악, 충성과 불충성, 거룩과 세속 등의 두 성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련을 버리고 지혜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3. 미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13절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강조점을 무심코 넘겨서는 안됩니다. 다윗의 기사 중에 다른 곳에서의 더 크고 큰 전쟁에서는 무장에 관하여 자세한 서술이 없는데 왜 하필 단 한 사람의 어리석은민간인을 멸하려 가는데 이렇게 칼을 차는 무장을 상세히 서술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세력가들은 가족과 노비로 구성되는 상당한 무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서술이 왜 그러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미련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
이 처리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딤후 3:15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성경 만큼 지혜를 주는 책은 세상에 다시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서 깨달아야 합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을 때 그 말씀은 놀라운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나발은 지혜의 사람인 그 아내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는 몸이 굳어져서 열흘 만에 죽습니다. 여기 아비가일이 한 말은 다름 아닌 다윗의 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다윗을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 주인 사울을 배반한 패역한 자라고 비방하던 나발, 그리고 이미 아비가일에 의해 해결된 문제였건만 이 전한 말에 그토록 두려워하여 몸이 굳어져 죽었습니다. 이처럼 아비가일의 말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말씀을 깨달을 때 나타나는 현상의 예표로 봅니다.
4. 미련은 연단을 통해 버리게 됨을 보여줍니다.
38절에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했습니다.
여기 열흘만의 10은 시험과 시련의 수로서 성도들이 고난을 통하여 미련을 버리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 연단은 여호와의 손입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 멀리하고 악을 따른 뼈저린 결과를 체험함을 통하여 온전한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5. 지혜의 사람이 되려면 지혜를 사모하고 결혼해야 합니다.
39-42절에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했습니다.
다윗은 여러 아내를 얻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그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그 결과까지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이 시간에 말씀드리지는 않겠고 다만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성도는 지혜를 사모하고 사랑하며 결혼하고 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 특성이 신비로와서 그냥은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찾고 찾으며 사모하고 목말라 부르짖어야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의에 주리고 사모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이요" 했습니다.
청춘 남녀가 가장 사랑할 때 그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의 의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가 있고 의가 내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치 않는 죄악의 창기만이 마음에 품는 결과만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서인 잠언서에 지혜에 대한 솔로몬의 태도를 보면 바로 그렇게 사모함입니다. 그 중에 하나만 소개하면 잠 4:6에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사모하고 사고 품고 마치 아내에게 하듯 함을 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왜 멸망합니까? 지혜가 없어서 입니다. 지혜의 유무는 곧 생사의 유무요 흥망의 유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련을 죽이십시다. 그리고 지혜와 혼인하여 사랑하십시다. 지혜는 하나님을 잘 경외함입니다. 지혜는 악을 떠나 거룩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귀한 지혜와 결혼하여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을 얻고 형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