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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3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황의찬 목사)
모세와 그의 부모
출2:1~10
<오프닝>
아기가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 있다가 핏덩이로 태어나면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사실은 갓 태어난 아기는 모두가 볼품이 없지요.
그럼에도 아기의 부모들은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왜 그래요? 그 아기가 자기들의 사랑의 결정체이고 자기들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기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가 세상의 어떤 아이보다 잘 생겼다고 말합
니다.
사실 신생아들의 모습은 모두가 비슷비슷합니다. 거기서 거깁니다.
금방 태어난 아기가 잘생겼다, 못생겼다고 얘기하는 것은 틀린 얘깁니다. 그렇지요? 정말 잘 생
겼는지 못생겼는지는 적어도 돌은 지나봐야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런 언급이 있어요.
(2절)『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
나』
성경을 읽다가 이런 부분이 나오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핏덩어리가 생기면 얼마나 잘 생겼다는 말이냐?
또, 만약에 못생겼더라면 그냥 나일 강물 던져버린다는 얘기냐?
이거 못 생긴 사람은 서러워 살겠나?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제기할 줄 알고 신약에서 풀이해 주고 있습니다.
(행7:20)『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금방 태어난 핏덩이를 보고 모세의 부모들이 자기들의 육신의 안목, 이생의 안목으로 본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이를 보니 “잘 생겼다.” “아름답다” 는 것
입니다.
모세가 태어난 때,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노예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번식력이 대단히 왕성해서 나중에는 이집트를 덮어먹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족속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은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산파들을
시켜서 그렇게 명령했는데,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이 두려워 차마 태
어난 사내아이들을 죽이지 못한 겁니다.
그러자 애굽 왕 바로는 아예 군인들을 동원하여 태어난 사내아이들은 나일 강에 던지도록 했습
니다. 군인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이 울음소리가 나면 들어가서 확인합니다. 그래서 고추를
달고 있으면 강제로 나일 강에 던지는 처참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
모세의 어머니 이름은 ‘요게벳’입니다. 아버지 이름은 ‘아므람’입니다.
이들 부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사내 아이였습니다. 자기들이 살고자 한다면, 군말 없이
나일 강으로 가서 강물에 던져야 합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
으면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합니다.
“너 하나 살리고자 하다가 온 가족이 다 죽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그
렇게 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고추 달린 것을 확인하
고 처음에는 이들 부부도 그렇게 하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해서 열 달 동안 뱃속에 품고 온갖 고초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부모님들은 아
기의 머리카락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손가락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피 한 방울 만들지 못합니다.
부모가 한 일은 서로 사랑했고, 삼시 세 때 끼니 잘 챙겨 먹으면서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도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엄마 뱃속의 아기가 점점 머리, 몸통, 팔, 다리의 모습을
만들어 열 달 만에 태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는 이것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들 부부와 다른 가족만 생각하면 딸이 아니고 아들인 것을 원망하면서 강물에 내다 버려야
했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아기가 너무너무 잘 생기고, 아름다웠다는 겁니다.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에게는 이미 1남 1녀가 있었어요. 미리암과 아론입니다. 아론이 태어날 때
만 해도 애굽왕이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론은 키울 수가 있었던 겁니다.
딸 미리암과 큰 아들 아론을 생각하면 지금 태어난 사내아이는 지체 없이 내다 버려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서 보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의 권세를 가진 애굽 왕 바로의 명령에 순종할까, 아니면 이 귀한 생명을 주신 하나
님의 명령에 순종할까? 이들 부모는 세상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하는 길
을 택하기로 결정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
단한 믿음을 가진 신실한 부부였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들 부부는 세상의 권세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주 설교 때, 우리가 세상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 입니다. 이들도 세상 권세에 순종할 것인가? 하나님
께 순종할 것인가 갈등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누구에게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까? 하나
님!
우리도 세상의 못된 풍조에 떠내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믿음의 길을 걸
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는 아므람과 요게벳과 같은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순종할 때 하
나님이 어떻게 갚아주시는지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계속됩니다.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창문에 담요를 치고,
문단속을 철저히 하면서 아기를 키웠습니다. 석 달 동안을 그렇게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기
의 백일이 다가오니까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우렁차게 커지는 겁니다. 아무리 창문에 담요를
쳐도 사내아이의 울음소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들이 결단을 내립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석 달 키운 것만도 대단하다. 이쯤에서 나일 강에 아이를 버리자 하고 체
념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기를 더 이상 집에 둘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부모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이냐?
아므람 요게벳 부부는 비상한 머리를 짜냈습니다.
<갈대상자와 갈대 사이에 두는 아이디어>
이들이 낸 아이디어는 갈대 상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갈대를 엮어서 바구니를 짰습니다. 그리고
바구니에 역청을 발라서 방수 처리합니다. 역청은 아스팔트입니다.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 중
동지역은 석유가 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역청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갈대 바구니 틈새를 발라서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아기를 담
고 뚜껑을 덮습니다. 그런 다음 이 갈대 상자를 어디에 두면 좋겠습니까?
나일 강에 가면 강가에 갈대가 무수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 갈대 사이에 상자를 놔두기로 했습
니다. 그리고 열 네 살 쯤 된 딸, 미리암으로 하여금 멀리서 그 갈대 상자가 어찌 되는지 망을 보도
록 했습니다.
이 상자는 갈대 사이에 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떠내려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간혹 어머
니 ‘요게벳’이 가서 젖을 물렸을 겁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들이 세상의 권세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할 수 있
는 것을 다하는 믿음의 부모, 이들이 바로 아므람과 요게벳입니다.
이들 부부가 만든 갈대 상자를 히브리어로 ‘테바’라고 합니다. 이 테바라는 말은 창세기에서 노
아가 만든 방주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 = 테바는 구원의 방주였습니다. 이 방
주에 오르지 못한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모세를 담아서 갈대 사이에 둔 테바도 결과적으로 구원의 방주가 됩니다.
<모세>
이 갈대 상자, 구원의 방주, ‘테바’가 어찌 되는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어찌 되지요?
생후 3개월 된 아기가 들어있는 갈대 상자가 어찌 됩니까?
애굽의 왕 바로의 딸, 애굽의 공주입니다. 공주가 목욕하러 나왔다가 갈대 상자를 발견합니다.
처음 보는 이상한 상자를 발견하고 시녀들에게 명령하여 그 상자를 가져와서 뚜껑을 열었습니
다. 그 순간 상자 안에 있던 아이가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울음은 순간적으로 애굽
공주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여자들은 이런 때 대단히 감성적이 되지요.
(6절)『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
그 순간 갈대 상자를 지켜보고 있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공주에게 과감하게 다가갔습니다.
(7절)『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
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그러자, 공주가 대답합니다.
(8절)『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
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마침 이 공주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공주가 누구였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 공주는 모세를 양아들로 입양합니다. 아기가
젖을 뗄 때까지는 아기의 유모에게 맡겼습니다. 그 유모가 누굽니까? 아기의 생모입니다. 공주는
그가 생모인줄 알지 못하고 유모에게 지급하는 양육비를 주었습니다.
아기가 서너 살 되었을 때, 공주는 아기를 궁궐로 데려갑니다.
그때 비로소 아기의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물에서 건져낸 아이”라는 뜻입니다.
애굽 말로는 ‘모 우세스’입니다. ‘모’는 물이라는 뜻이고, ‘우세스’는 ‘건짐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
다. 이 말을 히브리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 말, 히브리어로 ‘모세’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모세’는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입니다. 애굽 사람 입장에서 보면, 모세는 물에
서 건져 올린 아이입니다. 그러니까 수동태로서 ‘건짐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모세는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로서 ‘건져내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나중에 자기 민족들을 이끌고 홍해바다를 건넙니다.
홍해 바다가 기적적으로 갈라지고 그 가운데를 건너 구출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세는 ‘자기 민족을 물에서 건져 올리기 위하여 생후 3개월 되던 때에 물에서 건짐
을 받은 자’입니다. ‘건져내기 위하여 건짐을 받은 인생’ 이것이 모세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당시까지만 해도 세상의 죄악에 빠져
서 사망의 권세 아래 허우적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전도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
습니다. 구원 받고 나서는 어찌 됩니까? 이제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건져 올려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 받은 인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먼저
죽으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건져내기 위하여 건짐을 받은 모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형이고, 예표이고, 그림자입니다. 모세의 탄생과 그의 삶은 예수님이 어찌 오실지에 대해 미리
설명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남자들은 다 죽이라는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난 후 헤롯왕이 2세 미만의 사내아이들은 다 죽이도록 한 조건이 흡사합니다.
모세는 태어나서 갈대 상자에 담겼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서 말 구유에 담겼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장성함으로써 애굽왕의 칼날을 피하고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왕의 칼날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여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큰 종으로서 자기 민족을 구원한 해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모형이 되어 예수님을 예표 합니다.
<하나님>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심코 읽으면 그저 옛날 한 옛
날이야기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읽어보면 본문의 주인공은 모세의 부모도 아니
고, 모세도 아니고, 애굽의 공주도 아닙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1) 하나님께 순종한 요게벳에게 어떤 조치를 해 주시는가?
모세의 부모가 세상의 권세 앞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자기 속에서 나온 아들에게, 자기 젖을 먹이면서 애굽의 공주
가 주는 양육비를 받게 했습니다. 아들을 나일 강에 버리지 않고 살리는 축복만 해도 대단한데, 양
육비를 받으면서 자기 젖을 먹이고, 어디 그뿐입니까? 서너 살 되어 젖을 뗄 때까지, 유대인 교육
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어려서 받은 교육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서너 살 이전에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이 결정
됩니다. 그 중요한 시기에 모세가 어머니 젖을 먹으면서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누가요?
우리도 하나님께 매달리고 순종해서 요게벳과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부터라도 한번 해 보세요. 세상의 풍조에 적당히 따라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보
세요,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내려주시는지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모세를 어떻게 양육해 주시는가?
부모의 믿음과 기도로 자라게 된 모세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다 죽어야 될 처지인데, 하나님은 모세에 대하여 어떻게 섭리하십니까?
△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두었을 때, 애굽의 공주와 만난 것, 우연입니까?
△ 애굽 공주가 갈대 상자를 열었을 때, 모세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우연일까요?
△ 울음을 터뜨린 아기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재빠르게 읽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쫓아가서 히브리 유모를 추천한 일도 그냥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 모세가 남의 젖을 물지 않고, 자기의 친 어머니 젖을 먹고, 친 어머니로부터 유대 교육을 받
도록 했습니다.
△ 그리고 히브리 족의 씨를 말리려고 하는 애굽의 바로 왕이 거처하는 왕궁에서 살도록 했습
니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그리고 왕족이 받는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 모세는 나중에 자기 민족인 히브리족을 대표하여 애굽 왕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대결을
펼칩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금 적진의 심장부에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연으로써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삼천 오백 년 전의 이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입니다.
히브리 산파들, 세상의 왕은 그들에게 사내아이는 받아내면서 죽이라 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그 명령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 세상의 왕은 사내아이는 태어나는 족족 강물에 던지라 했지만, 오직 하나
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시27: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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