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교가 일찍부터 일요일에 예배하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동시에,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여 경배하는 행위와 병행했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교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태양 숭배의 습성을 그대로 지니고 입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들에게는 차라리 그들이 섬겨오던 옛 태양신의 명칭이 “그리스도”로 바뀌었을 뿐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현대 일요일 신성론자들의 전신(the former)이요, 선조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서 비중을 더해감에 따라 차차 이교화(paganize)해 갔으며, 이러한 현상은 해를 달리할 수록 빠른 템포로 진행되어 갔었다. 그 과정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태양신 부활절(Easter)을 그리스도 부활절로;
② 동방 경배와 일요일 숭배를 주일 예배로;
③ 태양신 미트라(Mithra) 탄생일 12월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크리스마스”(X-Mass)로;
④ 이쉬타르(Ishtar), 아스타르테(Astarte), 아프로디테(Aphrodite), 이시스(Isis), 키벨레(Cybele), 아르테미스(Artemis), ‧‧‧ 그리고 비너스(Venus) 여신 등이 “하나님의 어머니”-데오토코스(θεοτοκος)라는 명분으로 “마리아 여신 숭배”(Mariolatry)로;
⑤ 이교의 사당들(Temples)이 그리스도교의 성당으로 성화되었다.
⑥ 그리고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 B.C.)의 “영혼불멸설”이 소위 교부신학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교의(Dogma)로 뿌리를 내리면서, 이교의 각종 잡신들의 제례(祭禮)가 성자들의 제례로 바뀌어졌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이져(J. G. Frazer, 1854-1941 A.D.) 경이 1891-1915년 동안에 걸쳐 저술한 대역작, 황금 가지(The Golden Bough-A Study in Magic and Religion, 2vols.)는 宗敎, 呪術, 農耕儀禮 등의 본질과 그 기원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民俗學, 人類學, 社會學을 비롯하여 나중에는 歷史學, 宗敎學 그리고 정신분석학 등등 각분야에 공헌을 기여했다. 프레이져 경은 그의 이 명저에서:
“‧‧‧ 우리가 4월에 거행하는 성 죠오지의 제례가 고대 파릴리아(Parilia)의 이교 제례를 대치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또 6월에 거행하는 세례 성 요한의 제례가 물에 대한 이교도의 하지 제례를 이은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또 8월에 거행하는 성모 승천의 제례는 다이아나(Diana-Ishtar, Astarte, Isis, Cybele, Artemis, Aphrodite, Venus ‧‧‧ 등의 영국 여신 ※필자 역)의 제례를 구축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11월에 거행하는 만성제(萬聖祭)가 죽은 사람에 대한 고대 이교의 제례의 계속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동짓날이 태양의 탄신일로 간주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의 탄생일이 12월의 동지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기독교 교회의 기타 중요한 축제부활제의 의식는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고 같은 교화의 동기에서 춘분에 거행하는 프리기아(Phrygia)의 神인 아티스(Attis)의 의식에서 채용되었다고 가정하여도 지나치거나 불합리하지 않은 것이다....”
동방경배와 일요일 예배
고대 서방 신학의 대표적 교부였던 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Bishop of Carthage, ca. 160-230? A.D.)는 그의 저술 “우상숭배에 관하여”에서 온전한 회개의 경험이 없이 형식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우상숭배자들의 습성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밝혔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dies solis)이 되면 동쪽을 향하여 기도한다. 그리고나서 흥이나게 예배하면서 그날을 보낸다....”
고 지적했다. 테르툴리아누스 감독은 자신이 일요일 신성론을 주장하다 보니, 자기 자신과 명목상의 개종자들이 여전히 태양이 경배를 받는 바로 그 날에 축일로써 준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우연 중 태양신 숭배자들 중 하나가 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억누르면서 이를 역인용하여, 박해하는 무리들에게 솔직히 자신들의 상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보다 착한 품성을 지닌 자라면, 솔직하게 태양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어떤이들이 상상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동방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또 우리가 일요일(Sunday)를 축제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또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변증서”에서 진술하기를:
“확실히 견문을 넓히면 그럴수록 더 있을법한 사실인데, 어떤이들은, 반대로, 태양을 우리들의 하나님으로 믿는다. 그 천체 궤도판면 전체에 입혀진 아마포 헝겊자락에 색칠해져서 일자를 나타내는 그 천체를, 아마 우리가 숭배하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이미 파사인(the Persians)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런 생각(Idea)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기도를 동편으로 향해 돌아서서 드리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고 술회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태양신 숭배의 관습과 습성에서 온전히 탈바꿈하지 못한 실태를 정직하게 고백했다.
이처럼 A.D. 200년대 전후로 한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 대부분의 이방인 개종자들은 통속적으로 동방을 향하여 경배하는 관습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비단 테르툴리아누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몇몇 유력한 교부들이 증언해 왔음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이 행위를 장려하고 정당화하는 교부들도 허다했다. 그들 중 유명한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 클레멘스(Clemens, Bishop of Alex., ca. 150-220. A.D.)와 그의 제자 오리게네스(Origenes, Bishop of Alex., 185-254. A.D.)가 그랬다. 그리고 그외의 고대 문헌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클레멘스는 설명하기를: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바라보며 드리는 기도는 가납된다.” 왜 그런고하니 동방(Orient)은 빛의 발생(birth of light)을 표방하는 것이며, “한밤의 흑암을 몰아내며‧‧‧” 또 “고대 신전들(the ancient temples)이 동쪽으로 향해 있도록 세워졌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본래 태양신의 신전들은 공히 태양이 경배받기에 합당하도록 출입문이 서편에 있으므로, 자연히 배례자들이 동향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 의하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Holy Temple) 또는 성막을 세울 때 반드시 서쪽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출입문을 동쪽에 내도록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출27:13, 14ff.).
오리게네스에게는 동방은 영혼이 빛의 근원을 바라보려는 본능적인 자연스런 행위임을 주장하며 이를 상징학적으로 보았다. 또 어떤이들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동쪽을 향하여 기도드리는 것은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파라다이스(paradise)가 그쪽에 있으며, 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곳이 그곳이라는 강한 잠재 의식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Alex. ca. 500. A.D.)는 진술하기를:
“나는 태양을 섬기고 그것에 기도드리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대개 그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시각에 기도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한다. 태양 숭배자들과 이교도들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신앙에서 떠나서 이때 이교도들과 혼합한다....”
고 폭로했다. 이렇게 일요일 예배가 성행하기 시작할 때는 태양을 그리스도로 생각하여 숭배하는 풍조가 만연되기 시작했으며, 일부 식자간에는 이같은 행위를 비평하는 이도 허다했고, 비탄에 잠겨 통분히 여기는 교부들도 많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유명한 레오Ⅰ(Leo, the Great, Pope of Rome, ca. 390-461, 재위 440-461. A.D.)이다. 그는 그가 남긴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개탄했었다.:
“이러한 교의적 학설[점성술, 사신숭배 등등]에서부터,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높다란 장소들에서, 날이 밝기 시작하는 순간 떠오르는 태양을 경배하는 따위의 불경건한 관습이 역시 도래한 것이다. 심지어 몇몇의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오직 한분이시고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 봉헌된 성 사도 베드로 성당에 들어서기 직전에 그런 짓을 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높이 솟은 망대에 이르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돌이켜서 허리를 굽혀 경배하며, 굽혀진 목으로 빛나는 천체에다 대고 충성을 맹세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짓이 어김없이 일어날 때마다. 비탄과 통분으로 가득차 버린다. 그래서 이런 짓의 원인의 일부를 무지몽매한 허물에, 나머지는 이교사상의 정신에 돌려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그리스도교 일부에서 아주 일찍부터 일요일 예배를 하게 된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태양신 숭배의 단순한 습성, 즉 고래적인 관습에서 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며, 수십세기 동안 내려오면서 젖은 이방인들의 민족 고유의 토향 곧 민속적인 풍습에서 탈피하지 못한데 기인한 상태라 하겠다. 그러므로 미국의 교회사가 훠레이(James Wharey)는 그의 저서 「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였다.:
“이와 같이 이교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교에 입교할 때에 저희의 옛 철학과 미신이 아직 약간 있기 때문에 이교의 예식을 연모하여 이를 그대로 가지고 나오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라 하겠다. 오래 전부터 젖은 사상은 대체로 온전히 없어지지 않아 낡은 관습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태양(the Sun)과 동방(East)과 일요일(Sunday), 이 셋은 태양신 숭배의 불가분리의 삼요소이다. 즉 그들의 “트리카”이므로 일요일이 성축되는 곳에 동방경배가 있었고 태양을 흠모하였으므로 자연히 태양신 부활제(Easter)가 연례적으로 성대히 축제되었었다. 그래서 일요일 예배는 부활절(Easter)과 쌍벽을 이루어 거의 같은 시기에 초기 그리스도교계에서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프레이져 경은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리하여 기독교 교회는 이교도의 신앙을 태양으로부터 「정의의 태양」이라고 불리웠던 그리스도에게 옮기기 위해 그 창시자의 탄생을 12월 25일에 축하하도록 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사실이 이렇다면 그것과 똑같은 동기가 기독교 교회의 권위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부활제를 같은 때에 행하는 다른 아시아의 신의 죽음과 부활의 제례에 동화시키도록 이끌었으리라는 추측에는 아무런 본질적인 잘못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리이스와 시칠리아,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거행되고 있는 부활제 의식은 어떤 점에서 아도니아의 의식과 놀라우리만큼 유사하다. 그리하여 나는 기독교 교회가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새 축제를 그 이교도의 그것에 채용하였음을 시사하였다.”
태양신의 각종 상징물들
고대 Egypt의 태양신 상징물들
기타 지역들의 태양신 상징물들
중세기 유럽의 건축물 속에 나타난 제3의 새종교 상징물들
중세기 유럽의 성당들 속에 나타난 제3의 새종교 상징물들
시스티나 소성당(Cappella Sistina)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 신앙과 혼합되고, 동시에 각종 이교의 미신들과 신화가 첨가되어서, 태양신 아폴로 숭배일인 태양의 날 곧 일요일 신성설과 영혼불멸설을 초석으로 하여 설립된 “제3의 새종교”의 본질이 명백히 표출된 공간들이 로마에 여러 곳 있는데, 그 중 유명한 곳이 “시스티나 소성당”(Cappella Sistina-The Sistine Chapel)과 바티칸 궁전 내의 소위 “라파엘로의 방들”(Stanze di Raffaello)이다. 우리는 시스타나 소성당과 라파엘로 방들의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Fresco)라고 하는 천장화와 벽화들에서 그런 것을 읽을 수 있다.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융합을 완성하여, 그 꽃망울을 터트려서 환하게 꽃피운 “피렌체 학파”(Firenche School) 계통의 코시모(Piero di Cosim, 1462-1521 A.D.), 로렌쪼(Lorenzo Monco, 1375-1425 A.D.),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 A.D.) 그리고 죠바니 피코 델라 밀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5-1494 A.D.) 등등 예술가와 철학자들로부터 철저히 교육받고 잘 훈련된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교황 피우스 3세(Pius Ⅲ)의 후임으로 1503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Ⅱ, 1503-1513 A.D.)로 즉위하여 바티칸 궁에 입궁하자,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로 하여금 자신이 거처하게 될 주거공간 뿐만 아니라 바티칸 중요 궁전 공간마다 “제3의 새종교”의 진수를 시각적 예술품들을 통해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들 것을 명하였다.
시스티나 소성당의 이 거대한 천장화(the fresco of the vault)들은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대본에 따라 그린 것인데, 1508년 5월 초에 시작하여 1512년에 완성한 것이다.
천장 중앙의 프레스코들은 천지창조에서 노아홍수 등 구약성경 설화 뿐만 아니라 외경의 이야기도 포함돼있다.
① 빛과 어둠을 나누시는 하나님
② 해와 달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③ 물과 뭍을 분리하심
④ 아담의 창조
⑤ 하와의 창조
⑥ 원죄와 실락원
⑦ 노아의 제물
⑧ 대홍수
⑨ 만취된 노아
⑩ 에스더에 의한 하만의 처형
⑪ 뱀들에게 쫓기는 유대인들
⑫ 골리앗을 죽이는 다윗
⑬ 올로페르네의 목을 든 주디따
그리고 이 중앙 천장화의 좌우에 구약성경의 선지자들과 이교의 여점술사들(Sibyls-여 무당들, 무녀)을 섞어서 그려져 있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앉아있는 모습들이다.
① 선지자 요나
② 무녀 리비카(La Sibila Libica)
③ 선지자 다니엘
④ 무녀 쿠마나(La Sibila Cumana)
⑤ 선지자 이사야
⑥ 무녀 델피카(La Sibila Delphica)
⑦ 선지자 스가랴
⑧ 선지자 요나
⑨ 무녀 에리트리아(La Sibila Eritrea)
⑩ 선지자 에스겔
⑪ 무녀 페르시카(La Sibila Persica)
⑫ 선지자 예레미야
이것은 “제3의 새종교”의 근원을 설명한 것으로 유대교, 더 나가서는 기독교와 각종 이교들과의 결합 또는 통합이 그 뿌리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천장화가 완성된지 23년이 지난 후에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Ⅶ, 1523-1534 A.D.)의 부름을 받고 미켈란젤로는 다시 로마에 돌아와서 시스티나 소성당 제단 뒷면 벽에다가 유명한 “최후의 심판”(Giudizio Universale-The Last Judgement)을 그렸다. 이 프레스코는 1535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한 후인 1541년에 완성했는데 그 당시 교황은 파울루스 3세(Paulus Ⅲ, 1534-1549 A.D.)였다.
이 프레스코의 내용 핵심은 상부 중앙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장 예수 그리스도가 다름아닌 바로 로마의 위대한 태양신 아폴로(Apollo)라는 사실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초상화에는 반드시 그분의 얼굴에 수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벽화에는 이제 막 심판을 내리려고 오른 손을 번쩍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이 그리스도는 얼굴에 수염이 없다. 로마의 태양신 아폴로가 원래 수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폴로의 조각상이나 초상화나 모자이크에나 어디를 막론하고 모두 수염없이 나타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아폴로는 항상 여신을 대동하고 있고 나상으로 묘사되는데, 심판장 그리스도나 마리아도 역시 이교의 남녀 신상들처럼 완전히 나체로 그려졌던 것인데, “그리스도가 아폴로를 닮았다”; “나신들이 많아 외설적이다”; “목욕탕에 있는 나체들” 등등 시비가 그치지 않아서 결국 교황 비우스 4세(Vius Ⅳ, 1559-1565 A.D.)는 화가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에게 명하여 벌거벗은 그리스도와 마리아 그리고 흉칙스러운 나체들에게 기저귀나 옷을 그려서 입혔다.
라파엘로의 방들(Stanze di Raffaello)
이 공간들은 원래 교황 니콜라스 5세(Nicholas Ⅴ, 1447-1455 A.D.)를 위해 건축된 주거용 아파트였다. 교황 니콜라스 5세는 고전문학과 철학 연구에 몰두하며 문예를 장려한 인문주의자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곳을 자신의 주거용으로 개조하면서 내부를 새롭게 장식할 때 부라만테를 통해 발굴한 25세의 젊은 예술가 라파엘로에게 명하여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의 천장화와 벽화를 그리게 했다. 이 서명의 방은 교황들이 교황청의 공문서 등 모든 서류를 결재하고, 서명을 하던 곳이었으며, 때로는 교회 재판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이 공간이 “라파엘로의 방들”(Stanze di Raffaello) 중 제2실이다.
라파엘로는 이 서명의 방 벽화들을 3년(1508-1511) 만에 완성했는데, 교황 유리우스 2세가 지시한 바대로였다. 이 방의 한 벽면은 “성사에 대한 토론”(La Disputa del Sacramento)이라는 프레스코이고, 그 맞은 편은 라파엘로의 대표작인 “아테네 학당”(La Scuola d’ Atene)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의 중심 인물은 Platon과 Aristoteles다. 그리고 Pythagoras를 위시해서 Roman Catholic敎의 敎理를 形成하는데 영향을 끼친 모든 Hella 哲學者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Scorates, Zeno, Epicurus, Diogenes, Euclid,... Ptolemaios 심지어는 Zoroaster까지 포함되어 있다.
敎父神學을 형성하는데 기본 사상을 기여한 二元論(Dualism)의 거두 Platon은 왼손에 “TIMEO”라는 책을 끼고 오른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이에 비해 스콜라 神學을 조성하는데 기본 철학을 제공했던 Aristoteles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전자는 철학의 근본을 우주론 즉 形而上學(metaphysics)에 있음을 내세우는데 반하여 후자는 그것을 形而下學(physical Science)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Platon의 저술 Timeus 또는 Timeo(Greek語로 Timaios)는 Platon의 모든 저작들 중 가장 어리석은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도, 이 작품이 중세 Europe의 종교와 문화에 엄청나게 영향을 끼친 책이다. 필자는 이것을 제10장에서 논하였거니와 Roma Catholic敎의 핵심 교리인 영혼불멸설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옛 그리이스 神話에 자주 등장하는 神託을 맡은 巫女(sibyl-魔女)가 Artemis 女神像들을 좌우에 두고 좌정하고 있다. “제3의 새종교”의 본질을 잘 표출하고 있는 여러 벽화들 중 하나이다.
라파엘로의 방들 중에서 제4실은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누스의 방”(La Stanza di Constantino)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이 방 거의 전체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설적인 삶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라파엘로의 방들 중 하나로 취급되지마는 이 방의 그림들은 라파엘로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고 그의 두 제자들이 그린 것이다. 그가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비오 다리의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계시”(the Miraculous Apparition of the Cross)는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례”(the Baptism of Constantinus)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the Donation Constantinus)은 존 프란세스코 페니(Gian Fransesco Penni)가 그렸다.
[그림1]은 콘스탄티누스가 312년에 막센티우스(Maxentius, 306-312 A.D.)의 군대를 밀비오 다리에서 격파하는 내용이고,
[그림2]는 312년에 골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정적 막센티우스와 일전을 앞둔 어느날 태양이 석양에 머물 때에 환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십자가가 나타나 “너 이것으로 승리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던 콘스탄티누스는 그날 밤 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이 십자가를 군기에 그려서 정적들을 쳐 이기라고 명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더니 결국 이 싸움에서 대승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교회사의 비조 유세비우스가 저술한 “콘스탄티누스의 전기”(Vita Constantini )에서 증언한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저자 락탄티우스(Lactantius, Frmianus Caecilius, 250?-317 A.D.)는 황제가 군기에 그려넣은 십자가는 그리스도
(Χριστο)의 모노그렘인 “Χ”와 “ρ”를 합친 “ ”의 표식이었다고 전한다. 락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 크리스푸스의 궁중교사로 오래 시무하던 중 황제의 증언을 직접 들었다고 했다.
[그림3]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the Donation of Constantinus)인데 이것은 완전히 조작된 위증이라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
그리고 이 서명의 방 창문들 위에 있는 반원 공간에는 세속법과 교회법의 기능에 관련되는 세가지 도덕을 비유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맞은 편에 태양신 아폴로가 음악의 여신들(뮤즈)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면서 영지 파르나수스(IL Parnaso)에 앉아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천장에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설화와 4명의 무녀들이 그 사이 사이에 그려져 있다. “성사에 대한 토론”에 그려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성부가 그려져 있고 그 성부 위에 한 무녀가 좌정해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듯이 “아테네 학당” 역시 한 무녀가 앉아있고, 태양신 아폴로가 그려져 있는 “파르나수스” 위에는 또 다른 무녀가 앉아있다.
왜 무녀들이 좌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제3의 새종교”가 기독교와 이교의 혼합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오로지 콘스탄티누스 황제만이 믿기지 않은 그의 전설같은 중요 생애가 묘사된 이런 벽화들이 왜, 무엇 때문에 이 바티칸 궁의 또 다른 라파엘로 방에 그려져 있는 것일까?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바로 “기독교”라는 나무에다가 “태양신교”라는 나무를 일요일 신성설이라는 접착제로 접목해서 “제3의 새종교”라는 꽃 봉오리를 맺게 한 그 창설자이기 때문이다. 이 꽃봉오리가 피렌체에서 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고 르네쌍스 시대에 만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전에 피렌체의 플라톤 학원에서 철학을 강의하면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합을 시도했던 죠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가 피력한대로:
“철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신학이 그것을 발견했다면, [제3의 새]종교는 그것을 소유한다.”
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일요일 성수를 통해 이교의 온갖 미신들과 신화 그리고 철학으로 혼합되어 형성된 바벨론의 칠흑같은 암흑의 짙은 밤은 깊을대로 깊어졌다. 기독교 복음과 진리가 이교의 거짓과 뒤섞일 때 교회는 부패한다.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갖가지 만행으로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사망의 꼴짜기로 이르게 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그제서야 “오직 성경만이”(sola Schriptura)라는 외침이 터졌다. 마르틴 루터의 이런 절규는 참 진리와 생명수를 갈급했던 중세기 유럽 영혼들의 비명스런 아우성을 대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