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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就入方便
於法無疑惑하고 永絶諸戲論하야
不生分別心이면 是念佛菩提니라
了知差別法하고 不着於言說하야
無有一與多하면 是名隨佛敎니라
多中無一性이요 一亦無有多니
如是二俱捨하면 普入佛功德이니라
衆生及國土가 一切皆寂滅이니
無依無分別하면 能入佛菩提니라
衆生及國土가 一異不可得이니
如是善觀察하면 名知佛法義니라
법에 의혹이 없고
모든 희론(戱論)을 길이 끊어서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것이 부처님의 보리를 생각함이라
차별한 법을 잘 알고
말에 집착하지 아니해서
하나와 많음이 없으면
이것이 이른바 불교(佛敎)를 따름이라
많은 가운데 한 성품이 없고
하나에도 또한 많음이 없으니
이와 같이 둘을 함께 버리면
부처님의 공덕에 널리 들어가리라
중생과 국토가
일체가 다 적멸하니
의지함도 없고 분별함도 없으면
능히 부처님의 보리에 들어가리라
중생과 국토가
하나다 다르다 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이 잘 관찰하면
불법(佛法)의 뜻을 안다고 이름하리라
*
취입방편(就入方便) : 방편에 들어감을 보이다
*
어법무의혹(於法無疑惑)하고 :법에 대해서 의혹이 없고
영절제희론(永絶諸戲論)하야:영원히 모든 희론을 다 끊어서. 희론이란 이런저런 설법 이론이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말로 하는 법문은 전부 희론이다.
불생분별심(不生分別心)이면 :분별심을 내지 아니할 것 같으면
시념불보시(是念佛菩提)니라 :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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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차별법(了知差別法)하고 :차별상을 그대로 알 것은 다 알되
불착어언설(不着於言說)하야 : 언설에 집착하지 않아서
무유일여다(無有一與多)하면: 하나다, 많다 하는 분별차별이 없을 것 같으면
시명수불교(是名隨佛敎)니라: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다.
불교를 따르는 길이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지금 개인으로 보면 하나이고 전체로 보면 다(多)다. 세상과 나 또는 나와 세상의 관계를 하나로 보면서 또한 많은 것으로 보고, 전체로 보면서 개인으로 보는 것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
일(一)도 없고, 다(多)도 없다. 그러니까 나라고 고집할 것도 없고, 전체를 인정할 것도 없는 이치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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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무일성(多中無一性)이요 : 많은 것 가운데는 일성도 없으며
일역무유다(一亦無有多)니: 하나도 또한 다가 없음이니
여시이구사(如是二俱捨)하면 :이와 같이 다(多)와 일(一)을 둘 다 함께 버릴 것 같으면
보입불공덕(普入佛功德)이니라: 널리 부처님의 공덕에 들어간다. 불공덕이란 우리 한마음의 공덕이다. 불자들의 머리속에는 ‘부처님’ 하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어려서부터 역사적인 석가모니와 겹쳐서 부처님을 신적인 존재로 의식화 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종교인들이 존재하지 않은 신을 의식화해서 머릿속에 그리는 것 이상이다.
물론 부처님의 그런 면도 부정할 수가 없다. 역사적인 석가모니도 부정할 수가 없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불공덕(佛功德)을 우리는 이해하고 넘어가야 된다.
삼천 년 전의 석가모니가 공덕이 크고 위대한 존재라고 한들 지금 자기 불성의 공덕을 배제한 입장에서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기 공덕, 자기 한마음의 공덕, 자기 불성의 공덕을 배제하고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불공덕(佛功德)은 한물건의 공덕, 우리 일심의 공덕이다.
그 일심 속에는 다(多)도 없고 일(一)도 없다. 일(一)이면서 다(多)고, 다(多)이면서 일(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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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급국토(衆生及國土)가 : 중생이다 국토다 하는 것이
일체개적멸(一切皆寂滅)이니: 모두가 적멸한 자리다.
무의무분별(無依無分別)하면: 의지함도 없고 분별도 없을 것 같으면
능입불보시(能入佛菩提)니라 :능히 부처님의 깨달음에 들어가는 일이다. 참 좋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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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급국토(衆生及國土)가: 중생과 그리고 국토가
일이불가득(一異不可得)이니:하나다 다르다 하는 것을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앞에서는 ‘중생급국토(衆生及國土)가 일체개적멸(一切皆寂滅)’이라고 하였는데 여기는 ‘중생과 국토가 하나다 다르다 하는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적멸은 좀 약하다.
국토가 중생이고, 중생이 국토다. 십신(十身)을 이야기할 때도 중생신(衆生身), 국토신(國土身)이라는 말을 했었다.
중생 그대로 부처님의 십신이고 국토가 그대로 부처님의 몸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대로 보지 않고 ‘중생이 죽고 나면 땅으로 돌아가고, 나중에 세월이 가면 그 땅에서 식물이나 사람으로 또다시 돌아오는 것이니 중생과 국토를 나눌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면 견강부회한 설명이다. 그렇게 설명하는 수가 많은데 그것은 맞지 않다.
나중까지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그대로를 두고 하는 이야기다.
여시선관찰(如是善觀察)하면 : 이와 같이 잘 관찰할 것 같으면
명지불법의(名知佛法義)니라: 이름 하여 불법의 도리를 안다고 한다. 이쯤 돼야 불법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八, 方便의 德
1, 光明遍照
爾時에 光明이 過百萬世界하야 遍照東方一億世界하고 南西北方과 四維上下도 亦復如是하시니 彼一一世界中에 皆有百億閻浮提와 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 其中所有가 悉皆明現하니
저때에 광명이 백만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일억 세계를 두루 비추고 남.서.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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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方便)의 덕(德) : 방편의 덕(德)을 나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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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변조(光明遍照) : 광명이 동방으로 일억 세계를 두루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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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백만 세계라고 했다가 이제 일억으로 뛰었다. 이렇게 증광하여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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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광명(光明)이
과백만세계(過百萬世界)하야
변조동방일억세계(遍照東方一億世界)하고
남서북방(南西北方)과
사유상하(四維上下)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시니: 동쪽을 예를 들고 동쪽처럼 남서북방과 사유상하도 역부여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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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일일세계중(彼一一世界中)에 : 저 일일세계 가운데
개유백억염부제(皆有百億閻浮提)와
내지백억색구경천(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
기중소유(其中所有)가 : 그 가운데 있는 바가
실개명현(悉皆明現)하니 : 환하게 비추는 그 광명에 다 나타나더라.
지혜의 안목이 있으면 모든 것이 눈에 환하게 비친다. 여기도 광명을 크게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 각자 마음에 깨달음의 지혜광명이 비추기 시작하면 그 지혜광명에 비춰진 모든 세상과 세상 이치는 여기에 표현된 것 이상이다. 여기 나온 것은 그런 것에 대한 상징이다.
2, 世尊坐座
彼一一閻浮提中에 各見如來가 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 十佛刹微塵數菩薩의 所共圍遶라 悉以佛神力故로 十方各有一大菩薩이 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 來詣佛所하시니 其大菩薩은 謂文殊師利等이며 所從來國은 謂金色世界等이며 本所事佛은 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께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으며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이르되 문수사리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이르되 금색세계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이르되 부동지(不動智) 여래등(如來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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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좌좌(世尊坐座) : 세존이 사자좌에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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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일일염부제중(彼一一閻浮提中)에: 저 낱낱염부제 가운데
각견여래(各見如來)가
좌연화장사자지좌(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
십불찰미진수보살(十佛刹微塵數菩薩)의
소공위요(所共圍遶)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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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이불신력고(悉以佛神力故)로 : 다 불신력고로
시방각유일대보살(十方各有一大菩薩)이 :시방에 각각 한 대보살이 있으니
일일각여십불찰미진수제보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낱낱이 각각 십불찰 미진수 보살로
구(俱)하야: 더불어 함께 해서
래예불소(來詣佛所)하시니 :부처님 처소에 오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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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보살(其大菩薩)은 : 그 대보살은
위문사리등(謂文殊師利等)이며: 이를테면 문수사리 등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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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종래국(所從來國)은
위금색세계등(謂金色世界等)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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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소사불( 本所事佛)은
위부동지여래등(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3, 文殊菩薩의 偈頌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대
그때 온갖 곳에서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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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文殊菩薩)의 게송(偈頌) : 문수사리보살이 게송을 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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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일체처문수사리보살(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 일체처문수사리보살은 읽을 때마다 아주 근사한 표현이다.
우리 법당에 있는 문수보살만 문수보살이 아니다. 일체인도 아닌 일체처가 문수사리다. 이것은 툭 터진 소견이다.
각어불소(各於佛所)에
동시발성(同時發聲)하사
설차송언(說此頌言)하사대
(1) 從體起用方便
智慧無等法無邊하시며 超諸有海到彼岸하시며
壽量光明悉無比하시니 此功德者方便力이로다
지혜는 짝이 없고 법은 끝없으며
세상바다 뛰어나서 저 언덕에 이르고
수명과 광명도 비할 데 없으시니
이것은 공덕 있는 이의 방편의 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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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체기용방편(從體起用方便) :체(體)에서 작용을 일으키는 방편을 찬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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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體)로부터 작용을 일으키는 방편이다. 우리가 지금 책을 보고 있고,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이해하려고 하고 글도 새겨 보고, 뜻도 헤아려 보는 것이 전부 종체기용이다. 우리의 저 깊은 본심에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본심에서 작용이 일어나서 무엇을 이해하고 분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일체 생활은 전부 종체기용이다.
예불을 할 때도 이 원리를 따른다. 아침에 도량석을 할 때 ‘목탁을 올린다’라고 하는데 작은 소리부터 큰 소리로 목탁소리를 내는 것은 텅 빈 체에서 점점 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종체기용이다.
반대로 저녁에는 용(用)을 섭(攝)해서 체(體)로 돌아간다고 하여 섭용귀체(攝用歸體)라고 한다. 목탁소리를 큰소리에서 작은 소리로 내린다. 법당에서 예불하는 것도 아침에는 대웅전에서 예불해서 각단으로 흩어지고, 저녁에는 각단에서 먼저 예불을 해서 대웅전으로 모인다. 절에서의 모든 생활이 종체기용, 섭용귀체의 도리다. 목탁 치는 것 하나, 예불하는 것 하나가 전부 그렇다.
법당에 드나들 때도 오른 발을 먼저 내고 왼발 먼저 들이고, 왼쪽으로 갈 때는 오른 발, 오른쪽으로 들어 갈 때는 왼발을 먼저 낸다. 이 역시 작용이 체를 감싸고, 체가 작용으로 돌아가는 것에 근거하여 일체 행위와 의식을 만든 것이다. 아침 도량석에서부터 저녁예불에 이르기까지가 전부 그렇다. 하루 중간에는 종체기용 했으니까 체로 좇아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한낮에는 활발하게 정진하고, 불사하고, 불공하고, 경을 읽고, 참선하고, 온갖 행정을 본다. 절도 고치고 마당도 쓸고 밭도 매고, 하루 종일 활발하게 작용한다.
그 활발한 작용이 저녁이 되면 체(體)라고 하는 적멸한 자리로 돌아간다. 모든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에겐 그 이치가 눈에 환하다. 의식을 하나 하는 것, 목탁을 하나 치는 것, 예불을 하나 하는 것도 전부 그 원리에 맞추어서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깨달은 사람들의 눈에 그것이 환하므로 착착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지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이치에 맞게 만들다보면 하나도 걸릴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고 힘들 것도 없다. 깨달은 한 사람이 만들어 다른 깨달은 사람에게 증명을 대도 무사통과다. 제대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량분별로 해놓으면 억지로 조작하고 꿰어 맞추고 틀리게 해놓으니까 그 주장이 전부 각양각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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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무등법무변(智慧無等法無邊)하시며: 지혜는 같은 이가 없고 가이 없다. 같은 이가 없다는 것은 최고라는 것이다.
초제유해도피안(超諸有海到彼岸)하시며:모든 존재의 바다를 초월해서 저 언덕에 이르시니.
유(有)의 해(海) 또는 제유(諸有), 모든 있는 것을 말한다.
유(有)라고 하는 글자는 한 글자지만 그 속에 포함된 것이 많다.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가 다 그 유(有)자 하나에 포함된다.
수량광명실무비(壽量光明悉無比)하시니: 무량수 무량광이라고 한다. 수량은 목숨의 양, 수명의 양이 무량수다. 그것이 무량광이다. 그 모두가 비교할 바가 없으시니
차공덕자방편력(此功德者方便力)이로다: 누가 공덕자인가, 우리 한마음이 공덕자다.
한물건이 진정한 공덕자다. 그런데 그것이 얼른 이해가 안 되니까 ‘부처님’이라고 하는 어떤 존재를 등장시켜 놓은 것이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 존재를 상상함으로 인해서, 뭔가 이해하는데 다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다리를 버려야 한다. 다리를 버리고 완전히 없애야지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우리 상상속에, 머릿속에 형성되어 있고, 의식화 되어 있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불교를 만나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툭 터져 버리려면 의식화 되어 있는 부처를 완전히 깨야 된다.
(2) 寂照方便
所有佛法皆明了하시며 常觀三世無厭倦하시며
雖緣境界不分別하시니 此難思者方便力이로다
모든 부처님의 법을 다 밝게 알고
항상 삼세(三世)를 다 관찰하되 싫어함이 없으며
비록 경계를 반연하나 분별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이의 방편의 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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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조방편(寂照方便) : 고요히 비치는 방편을 찬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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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寂)은 본체를 말하는 것이고, 조(照)는 작용을 말한다.
적조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이다.
적(寂)은 체(體)이고 조(照)는 용(用)이다. 선어록 같은 데서는 기용(機用)이라고도 한다. 교리 상으로서는 체용(體用) 또는 적조(寂照) 묵조(黙照)라고 한다.
적과 조라는 두가지 말로 모든 것을 다 나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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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불법개명료(所有佛法皆明了)하시며 :존재한 바 모든 불법은 다 환하게 밝으시며
상관삼세무염권(常觀三世無厭倦)하시며 :항상 삼세를 관찰하되 싫어함이 없다. 모든 세상과 불법과 과거 현재 미래를 살피는데 아무 것도 마음에 싫을 것이 없다.
수연경계불분별(雖緣境界不分別)하시니 :비록 모든 경계를 반연하나 그 경계를 분별하지 아니하시니
차난사자방편력(此難思者方便力)이로다 :이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사람의 방편력이다.이 세상에 불가사의한 존재는 하나뿐이다. 너도 나도 다 가지고 있는 그 한물건이다.
역사적인 부처님을 알려면 부처님의 생애 한 권을 읽으면 간단히 끝난다. 그런데 무수한 세월동안 생각하고 궁구해도 다 이해할 수 없는 한 물건이 있으니 그것이 난사자(難思者)다.
(3) 理事無碍方便
樂觀衆生無生想하시며 普見諸趣無趣想하시며
恒住禪寂不繫心하시니 此無礙慧方便力이로다
중생을 즐겨 보되 중생이란 생각이 없고
여러 갈래 널리 보되 갈래란 생각 없으며
항상 선정에 머물되 매이는 마음 없으시니
이것은 걸림 없는 지혜 방편의 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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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무애방편(理事無碍方便) :부처님의 이(理)와 사(事)가 걸림이 없는 방편을 찬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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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중생무생상(樂觀衆生無生想)하시며 : 즐겨 중생을 봐도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다. 중생을 중생 그대로 보는 것은 가관(假觀)이고 모든 존재는 공(空)하니까 중생을 공하다고 보는 것은 공관(空觀)이다. 그런데 중생을 부처로 보는 안목이 있다. 중생을 부처로 보는 것은 중도관(中道觀)이다.
법화경에 진관(眞觀) 청정관(淸淨觀)이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중생을 부처로 봐야 그것이 진관이고 청정관이다.
보견제취무취상(普見諸趣無趣想)하시며 :널리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와 같은 모든 갈래를 다 보지만 그 여래 갈래에 대한 생각이 없으시며
항주선적불계심(恒住禪寂不繫心)하시니 :선정의 적정한 경계 속에 항상 있으면서 어디에도 매인 바가 없다.
탈속이고 자유다. 걸리지 않는다.
선적(禪寂)을 이야기할 때는 선의 8대 정신을 이야기 한다.
선은 탈속해서 속기를 벗어나야 된다. 깨닫지는 못해도 좋다. 깨닫는 것은 아무나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참선이라고 하면, 선객이든 선방이든 선방의 어떤 의식이든 일체가 속기를 일단 벗어나서 속된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탈속(脫俗)이 첫째다. 그리고 간결 소박하여 간소(簡素)해야 된다. 너저분하게 온갖 것을 속인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가지고 있어서는 선과는 십만팔천리다.
또 자유(自由)로와야 되고 변화(變化)가 있어야 된다. 어디에 고정되어 있고, 속박되어 있는 의식은 선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고고(枯孤)해야 된다. 하늘을 찌르는 고고함이 있어야 선사라고 할 수가 있다. 실컷 수십 년 참선하다가 주지한다고 서성대면 그것이 무슨 선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선은 자연(自然)스러워서 저절로 그러해야 된다. 무엇이든지 조작이 있고 억지가 있으면 안 된다.
또 선은 유현(幽玄)해야 된다. 깊이가 있어야 한다.
또 적정(寂靜)해야 한다. 고요할 때는 아주 고요해야 된다.
정적이 아니고 적정이다. 적정은 정적보다 한 단계 더 높다.
선적불계심(禪寂不繫心) 하는 말은 이런 등등을 말한다.
차무애혜방편력(此無礙慧方便力)이로다 : 이것은 걸림 없는 지혜의 방편력이다. 이러한 조건들도 사실은 우리 한 마음속에 다 가지고 있다. 한 생각 돌이키면 이렇게 간단하다.
(4) 修而無修方便
善巧通達一切法하시며 正念勤修涅槃道하사
樂於解脫離不平하시니 此寂滅人方便力이로다
교묘한 방편으로 온갖 법을 통달하며
바른 생각으로 열반의 도(道)를 부지런히 닦으사
해탈을 즐기고 차별을 떠나시니
이것은 적멸한 이의 방편의 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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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무수방편(修而無修方便) : 닦되 닦음이 없는 방편이다.
참 좋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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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통달일체법(善巧通達一切法)하시며:선교로 일체 법을 통달하시며. 선교(善巧)의 교(巧)자가 공교로울 교자로 되어 있어서 머리 굴리고 재주있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선교, 선교방편, 선교지혜라고 할 때의 선교는 아주 익숙하고 익숙해서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을 말한다.
봄이 오면 저절로 따뜻해지고, 따뜻해서 모든 초목이 어느새 파릇파릇 자라는 이치가 선교다.
모든 행위, 일체 수행이 그렇게 됐을 때 닦되 닦음이 없이 닦는 방편이다. 어떤 사람은 맨날 노는 것 같은데 어느새 공부가 저만치 가 있다. 어떻게 보면 속인 같은데 결정적인 어떤 사건이 있을 때는 아주 결연히 일어나서 출가인답고 장부다운 높은 기개를 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한 절에 한 사람씩만 있어도 참 근사하다.
그것이 수이무수(修而無修)고 거꾸로 말하면 무수이수(無修而修)다. 닦음이 없이 닦는 것이다. 평소에 그 사람은 평범하게 보통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계기에는 한 칼을 한다. 그런 것이 무수이수(無修而修)다.
닦음이 없이 닦는 것, 늘 노는 것 같은데 아주 공부가 잘 되어 있고, 수양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선교다.
정념근수열반도(正念勤修涅槃道)하사 : 정념으로 부지런히 열반도를 닦는다. 정념(正念)은 중도정념이다.
오늘 정념이 여러 번 나왔는데 중도정념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정견만 중도정견이 아니고, 정명(正命) 역시 중도정명이고 정념도 중도정념이다. 앞서 구구한 설명을 했지만 정(正)자을 중도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다.
락어해탈이불평(樂於解脫離不平)하시니 :해탈을 즐겨 해서 평등하지 못한 것을 다 떠났으니
차적멸인방편력(此寂滅人方便力)이로다:이것은 적멸한 사람의 방편력이다. 본래는 우리 모두가 적멸하다. 적멸한 자리를 견지한 사람은 아무리 떠들고 복잡하게 살더라도 또 적멸한 자리로 딱 돌아오면 항상 저 깊은 수백미터 바다의 움직이지 않는 물처럼 여여부동하다.
(5) 廻向方便
有能勸向佛菩提하며 趣入法界一切智하며
善化衆生入於諦하시니 此住佛心方便力이로다
능히 부처님의 보리에 향하기를 권하며
법계의 온갖 지혜에 나아가며
중생을 잘 교화해서 진리에 들게 하시니
이것은 불심(佛心)에 머문 방편의 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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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방편(廻向方便) : 회향(廻向)하는 방편을 찬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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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권향불보리(有能勸向佛菩提)하며: 능히 부처님의 깨달음에 향하기를 권해서. 불보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취입법계일체지(趣入法界一切智)하며 : 법계 일체지혜에 취입하는
선화중생입어제(善化衆生入於諦)하시니 중생을 교화해서 결국은 진리에 들어가게 했으니. 중생을 교화하는 차원은 여러 가지다. 배고픈 사람에게 한 끼 밥도 대접할 수가 있고, 옷도 한 벌 줄 수가 있다. 이런 것에서부터 온갖 차원의 중생교화가 있는데 궁극에 가서는 우리 목표는 항상 깨달음이다.
불자는 진리로 인도하는 것을 감추고 그 모든 중생교화를 한다. ‘내가 지금은 밥을 주지만 언젠가는 불법 진리로 인도하겠다. 그것이 나의 욕심이고 나의 음모다’ 불자에게는 이러한 음모가 있어야 된다.
‘어떻게 하더라도 저 중생을 내가 잘 유혹해서 진정한 불법으로 인도해야 되겠다’고 하는 음모를 가지고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것을 감추고 있다가 그 사람이 따라올 때쯤 되면 본색을 딱 드러내서 정법으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이런 저런 가벼운 방편을 쓸 때, 우리가 속에 감추고 있는 칼날이다.
차주불심방편력(此住佛心方便力)이로다:불심에 머문 사람의 방편력이더라.
시간이 많이 되었다. 이쯤 하겠다.
(박수소리)
하강례
생신인사
“저희들의 영원한 태양이시며
전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
불찰주야 중생제도에 여념이 없으신
무(無)자 비(比)자 스님의 고희를 맞이해서
우리들과 함께 젊음을 향유하시며
만수무강 하시라고 건배를 제의하겠습니다.”
문수선원에서 큰스님의 조촐한 생신잔치를 맞는 것이 화엄산림을 시작하고도 세 번째다.
올해는 축가도 없고, 하모니카 연주도 없지만, 마음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첫마음과 똑같다.
모두가 흐뭇하게 메밀국수 한 그릇씩을 드시며 기쁜 날을 기뻐했다.
“한마디로 아주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셔서 제가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아주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 덕택에 여기까지 왔고, 저도 공부를 여러분 덕택에 많이 하고 또 오늘 유마경출판기념식도 간단히 했습니다만 결국은 공부하는 스님들이 계셔서 그런 결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분위기와 공부에 대한 열정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우리 공부는 10년 기약을 했고 신도님들 화엄경은 만일 결사를 붙여놨습니다. 스님들도 만일결사 하십시다. 감사합니다.”
큰스님께서 대중스님들께 이렇게 인사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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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다 정리되고 스님들의 모임이 파했을 때, 방송을 녹화하는 불교방송 엔지니어가 다시 인터뷰 녹음을 청했다.
“저의 공부도 오로지 여러분들 덕택에 제가 날로 공부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이구요. 그건 세월이 갈수록 또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을 아주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교리상의 ‘내가 있으므로 너가 있고 너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그런 사실을 떠나서, 경험상 정말 제자들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내 공부가 또 일취월장 잘 되고 있다고 너무 아주 절감해서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오늘 생신을 맞아서 많은 스님들께서 축하해주셨는데요 기분이 어떻습니까”
“아주 좋죠. 이렇게 스님들이 여럿이 모여서 생신 축하하는 경우가 아마 거의 없을 걸요. 나 외에는. 내가 이렇게 많은 스님들을 가르치니까. 자연스럽게 생신날을 전후로 해서 이렇게 축하를 받는데 아마 다른 스님들은 이렇게 생신 지내는 데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아주 자랑스럽고 흐뭇하고 기쁩니다.”
“건강하셔야 될텐데요.건강하십니까.”
“네. 건강합니다. 이 상태로만 한 100년 유지하면 안되겠습니까.”
“감사드립니다. 스님.”
“예.”
유마의 방에
가을이 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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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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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의지함도 없고 분별도 없을 것 같으면 능히 부처님의 깨달음에 들어가는 일이다...수고하셨습니다..혜명화 님!! _()()()_
한 물건이 진정한 공덕자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유마의 방에 가을이 익다'...고맙습니다 ()()()
無依無分別하면 能入佛菩提니라...혜명화님, 애써 주셔서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유마의 방에 가을이 익다... 함축된 표현... 고맙습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_()()()_
사람들이 아프니 나도아프다 감사합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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