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된 사진은 TV조선에 방영된 화면을 폰카로 찍어 인용한 것 입니다.
무, 하늘과 땅을 잇는 아픔, 소운/박목철
무巫라는 글자를 파자破字 해 보면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형상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들어와 무속인을 천민 계급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더 이전 고대 국가에서는 祭政一致 시대라
하여 정치적 지도자가 무당이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무당을 천직이라 하여 기피하면서도 무당에 의존하여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선거철이 되면 한다는 정치인이 무속인을 찾아 길일을 택하거나 심지어는 치성까지 드리는 일이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무속을 믿지는 않지만, 굿의 색다른 예술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일부러 굿판을 찾아보기도 했다.
국가 무당이라 칭하던 김금화 씨의 해신 굿을 보려고 굿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보기도 했고, 내시나 궁녀
들을 위로한다는 조안산 굿을 비롯해 남한산성 굿, 봉화산 산신 굿 등 많은 굿을 보기도 했다.
굿을 볼 때마다 굿의 효험에 대한 신비감보다는 앤지 무속인에 대해 알 수 없는 연민의 정을 느끼곤 했다.
굿판 한편에서 열심히 합장으로 손바닥을 비비는 아기 무당을 볼 때도, 화장을 곱게 한 박수무당을 볼 때도
왠지 모르게 측은하다는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 최원희의 현역 시절 피겨 스케이팅 모습, 빙상 위의 날갯짓이 화려하다.
TV 조선을 시청하다가 전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무당이 되는 과정을 그린 프로를 보았다.
23살 꽃다운 나이에 내림굿을 받고 무속인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이 짠했다.
최원희, 열 살 때 피겨를 시작해 10년 이상을 선수로 뛰다 코치로 빙상을 지켜오던 그녀가 신내림 굿을 받고
무당이 된다는 게 결코 평범하거나 흔한 일이 아니다. 지인 중에 아들이 축구를 하는 아이가 있어 가까이
지켜본 일이 있는데, 운동하는 아이는 공부만 하는 일반 아이와는 삶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반 아이는 학교 가서 공부하고 부모는 부모 대로의 일상이 있지만, 운동하는 아이를 둔 가정은 부모의 삶이나
아이의 삶 모두가 운동이 전부라고 할 만큼 매달려야 하는 일상을 포기한 삶을 살아야 한다.
최원희의 부모는 최원희의 진로를 두고 뜻이 달랐던 듯 하다.
예 체능을 하는 아이에 대한 뒷바라지는 만만치 않다. 최원희의 어머니도 딸 뒷바라지에 매달려 집까지 팔아
가며 열성을 쏟았다니 부와 모의 뜻이 같지 않았다면 가정이 원만 했을 리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모든 걸 희생하며 공을 들이던, 어쩌면 삶 자체였던 피겨를 놓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일상이 멈춰버린 듯 아득한 좌절을 느꼈을 것이고 더군다나 무속인이라니! 최원희도 엄마도 현실을
받아드리기까지 피눈물을 쏟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 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던 엄마의 눈물에 마음이 짠하다.
과학의 이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현실이 있다.
-신병- 의학적 진단으로는 병명이 잡히지 않는 병이 신병이고 백약을 써도 잡히지 않는 것이 신병이다.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거나 일상이 어려울 만큼 힘든 것이 소위 말하는 신병이라는 것이다.
신 엄마를 정해 내림굿을 받지 않으면 고칠 수 없는 병, 최원희는 길게는 3년 아니면 1년을 넘기지 못한
다는 준엄한 선고 앞에 설사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죽음 앞에 어찌 거역할 마음이 생길 수가 있겠는가?
내 가족 중에 누가 무당이 되겠다. 한다면? 아마도 설레설레 머리를 저을 게 뻔하다.
무당 최원희를 외면 한 가족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나 그래도 언니들의 외면을 최원희는 아파했다.
딸의 성공을 위해 온몸을 던져 뒷바라지했던 엄마의 허망함과 눈물이 보는 이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무당이 되지 않으면 죽는다는데, 우는 것 말고는 엄마가 선택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 빙상을 딛던 두 날이 하늘을 향해 날을 세웠다.
작두 타는 날, 땅을 딛던 두 날은 잊고 하늘을 향한 두 날의 작두에 올라야 하는 게 숙명이라니!
빙판 위를 가르던 최원희는 관중의 환호에 취해 성공을 꿈꾸며 힘찬 날갯짓을 했을 것이다.
이제, 작두날 위의 최원희는 또 다른 날갯짓을 해야만 한다. -救濟衆生- 의 거창한 구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을 힘겨워하는 아픈 이들을 위해 날 위에 서야 한다.
화려한 피겨 복장을 하고 빙판을 가르던 어제나, 고운 신복을 입고 신 앞에 갈구하는 지금이나
다 사람을 위한 보시임에 다를 게 무엇이냐?
최원희, 멋진 날갯짓을 기대해 본다.
* 구제 중생이라는 구호가 거창하다. 아마도 약하고 아픈 이들에 도움을 주고 싶은 소박한 마음이리라!
* 소운은 종교가 없으며 특히 무속은 전통이나 예술적 시각에서 볼 뿐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添言,
운동하는 자식을 둔 부모님은 꼭 읽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소운은 國家公認 舊, 생활체육지도자1급과 생활스포츠지도자 1급을 소지한 전문 체육인이기도 하기에
옆에서 지켜본 여러 문제와 체육 지망인의 좌절에 대해 의견이 있으나 지인의 만류로 침묵하고 있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예 체능인으로 성공한다는 것이 하늘에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점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예 체능은 타고 난 자질이 뛰어나야 한다. 선천적인 것이 80% 이상이고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부분은
미미하다. 취미로 하는 정도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지만, 성공한 예 체능인은 노력으로 이룰 부분이 아니다.
-공부에서의 우열은 일상에서 민감하지 않고 서열에 따른 보상이 눈에 보이지 않아 압박감을 거의 느끼지 않지만,
예 체능은 하루하루가 압박의 연속이고 뒤 쳐진 사람이 받는 외면과 수모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운동경기는 정치와 같아서 승만 있을 뿐 패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스포츠 사회학에서 정의한다.
최근 폭력 사태로 지탄받는 농구의 학부모가 했다는 말, "다른 아이는 쌍둥이 들러리를 서는 것 같았다"
-최상위 몇 명을 빼고는 하루하루가 자존심이 상하는 좌절의 연속 인 것을 부모님은 아셔야 한다.
"그만둘까?" "그간 들인 공이 얼마인데" "갈 때까지 가보자!" 결국 아이는 아픈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지인의 아들과 같이 운동을 하던 아이가 한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다.
시골집에도 같이 갔던 아이라 마음이 무척 아팠다. 최원희의 눈물을 보며 그 아이를 떠 올린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