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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사는 말, 생솔에 타는 밤
한분옥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한분옥의 시는 이 어둑한 현실을 체험과 상상력으로 그려낸 것으로 심미적 취향을 기반으로 정서적 환기력이 큰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취택하고, 그 단어들을 질서 있게 배열하여 운율이 살아있는 미적 구조로 형상화한 정형시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한분옥의 시세계는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의 세계를 심화, 확대시킨 것이 특징이며, 그녀가 그려낸 시는 언어의 군더더기를 배제하여 압축의 묘미를 잘 보여주고 있어 문학적 성취도가 높다고 하겠다. 시인에게 현실은 속악한 세계이며 현실은 가혹하리만치 냉혹하다.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관습적 한계와 전통의 속박으로 인한 감내와 인고가 현실에 대한 맞섬으로 나타나면서 그녀의 시는 절제된 정한과 동경이 ‘생의 문장’으로 녹아 감동을 준다. 시적 상상 속 억압적 현실에 순응해서 절제된 심사가 유로되고 이에 대한 그리움과 정한이 표백되어 있다고 하겠다. 절망과 슬픔의 정서를 드러내는 감상적 태도는 고통을 초래한 현실과 거리를 좁히지 못함으로 인해 오직 한계라는 아픔만 부각시키지만 그것이 한분옥의 시에서는 감정의 잉여나 과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현실적 대상과 감정은 예술적 형식 속에서 변용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과 과정에서 그녀가 내보이는 시적 대상이나 정서, 제재에 대한 심리적 거리 두기와 절제의 태도가 시적 견고성을 확보한다고 하겠다.
한분옥의 시는 낡은 관념이나 설익은 감정이 배제된 신선한 구체어로 엮어져 있다. 시어의 결이 맑고 섬세한 것은 그녀가 그만큼 세상의 나지막한 발신음과 숨겨진 내면의 깊은 속 어두운 그림자를 뽑아내는 민감한 촉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그녀는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작은 문제들 앞에서 주저하고 서성이는 데 익숙해져 있는 시인이다. 그녀의 내면세계는 평화롭고 안정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고즈넉한 슬픔이 잎맥처럼 뻗쳐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슬픔을 은근히 순리로 감싸 안는 데 매우 익숙하다. 그러기에 그녀의 시에는 버거운 현실의 소소한 갈등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의 힘이 충만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는 맑고 순수한 영혼이 자리 잡고 있다. 한분옥의 예리한 감각은 항상 다가갈 수 없는 대상 앞에서 더욱 민감해져 긴장감을 준다. 머뭇거림과 고뇌, 포기는 늘 눈앞의 대상 안에 아픔의 문자를 새겨 넣는다. 다가설 수 없는 순간 멈춤은 그러한 아픔마저 그림자 속에 가둔다. 아스라한 욕망이 서릿발 같은 자아에 의해서 불편해지는 그 시각은 그녀에게 가장 아픈 시간이 된다. 이런 심사는 ‘봄 투정’ ‘슬픔 한 벌’에 잘 드러난다. 이때 더욱 강렬한 감각으로 표출되는 것이 다가갈 수 없는 대상과의 거리 두기다. 그리하여 그녀의 시는 순응과 감내의 아픔으로 넘실거린다. 시인이 맞이하는 그 뜨겁고 시린 시간은 세상과 대면하는 동안 겪는 갈등의 순간이다. 그녀의 시에 방어기제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하겠다.
한분옥의 탁월한 시적 감수성은 수원 화성 테마 시조 <붉은 치마, 매화병제도>에 잘 나타나 있다. 시적 화자는 ‘마음만 그저 보냈던 딸아이의 혼례길’을 ‘생목 타는 유배 길’에 견주고, 그 갇힘을 ‘한 걸음 떼지 못한 빗장 친 귀양살이’로 의미화하고, 마음에 따른 물질적 보상을 못 해준 죄책감으로 연결, ‘수원성 걸어가는 길 봄비 젖어 애첩다’로 형상화한 대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녀의 시는 전통적인 정한의 세계를 수준 높은 서정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분옥의 시는 그 무거운 세계를 껴안고 그것들과 화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물끄러미 대상을 바라보는 조망이 있어 안도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붉은 치마와 참새 한 쌍’으로 상징되는 딸아이의 혼례길에 겹쳐진 ‘생목 타는 유배 길’ ‘수원성 걸어가는 길 봄비 젖어 애첩다’라는 의미화의 전제가 된 ‘한 걸음 떼지 못한 빗장 친 귀양살이’는 이 시의 압권이다.
한분옥은 인생을 칼칼하게 씻어내는 힘의 작가다. 골 깊은 고독과 적막을 해독해 낼 수 있는 작가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촉촉하게 젖어들게 하는 마력을 지닌,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갈망하는 시인이다. 시적 화자는 끊임없이 녹록지 못한 상징계적 현실에서 채워주지 못한 죄책감과 결핍에 서성인다. 그 서성임 안에서 현실과 억지로 타협하려는 사유의 궤적이 안타까움을 준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따뜻한 슬픔이 있고, 만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그녀가 봄비에 젖어 애처로운 수원성 걸어가는 길에 서성이는 것은 아마도 이 고달픈 현실을 껴안으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한분옥의 시에는 회한의 정서가 숨어 있다. 그 정서는 그림 속의 매화향기로 치환되어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딸의 혼례에 마음만 보냈던 시적 화자의 아픈 마음은 어미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을 보듬는 시적 행위를 통해 유사한 아픔을 지닌 어머니들의 한을 위무하고자 한다. 봄비 앞에서 오래도록 서성인 까닭으로 시적 화자의 마음은 젖어 있는 듯하다.
오늘만 날인 듯이 치맛단 터진 채로
우비를 입고라도 꽃구경을 나서는데
들판은 봄이 끝난 듯 젖은 채로 지고 있네
여차하면 아차하여 바람도 올이 풀려
신발을 벗어든 채 거랑물이 기별인 듯
꺾은 꽃 들여다 보다 봄 투정이 십리 길
밀치듯 눈에 꽂힌 연분홍 복사꽃에
재치고 나선 흥이 어디까지 따라와서
꽃물 든 생의 문장이 치마 끝에 젖는다
- <봄 투정이 십리 길> 전문
시적 화자는 봄이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십리 길’이라는 거리도식을 써서 생생하게 감각화하고 있다. 한분옥 시를 보면 시가 이미지의 산물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물론 시인이 시를 구축할 때 구사하는 방법론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미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파이퍼는 시는 묘사되는 것이라는 말로 이미지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일단 그녀는 제목부터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식이다. 한분옥은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이 그 어떤 시적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기를 희망한다. ‘꽃물 든 생의 문장 치마 끝에 젖는다’는 표현은 이 시의 최대 압권이다. 시인은 오늘만이 봄날인 듯 ‘치맛단 터진 채로’ 꽃구경을 나선다. 그런데 들판은 봄이 끝난 듯 젖은 채로 지고 있다. 이 시의 묘미는 수미상관의 미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시작점인 ‘치맛단 터진 채로’는 종국에 ‘치마 끝에’로 연결되며, 수미의 상관성은 ‘치맛단’뿐만 아니다. 첫 연의 종장 ‘봄이 끝난 듯’은 마지막 연의 종장 ‘치마 끝에’와 연계된다. 이뿐만 아니다. 발단부 ‘지고 있네’는 결말부 ‘젖는다’과 관련성을 맺고 있다. 치밀한 디자인 끝에 자리 잡은 시어들의 친화성이다.
‘치맛단 터진 채로’ ‘신발을 벗어든 채’ 꽃구경을 나서서 꺾은 꽃 들여다보며, 봄 투정을 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심정을 ‘십리 길’로 표현하는 저력이 놀랍다. 봄이 끝난 듯 젖은 채로 지고 있는 꽃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이의 봄 사랑이 눈물겹기까지 하다. ‘눈에 꽂힌 연분홍 복사꽃’에 ‘흥’까지 따라와서 ‘꽃을 든 생의 문장’으로 여기 연분홍빛 화사한 시의 집을 지었다. 투정의 힘으로 마침내 봄은 젖어 무거운 몸으로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시적 화자의 치마 끝에 매달려 있다는 대담한 이미지의 구축은 실재하는 시인의 상상력이며 동시에 구체적으로 재현된 시적 경험이다. 십리의 투정은 이 시에서 구체성으로 강력한 힘을 갖는다. 봄비는 생의 문장으로 시적 화자의 처마 끝에 꽃물을 들이니 ‘간절한 것’을 향한 그녀의 투정이 밉기보다는 사랑스럽다. 가는 봄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치맛단 터진 줄도 모르고 비가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봄 구경에 나섰을까. 온통 젖은 들판에 젖은 꽃들, 꽃물 든 치마는 얼마나 무거울까. 비에 젖은 꽃은 비록 꺾이고 지고 있지만 촉촉한 생명력으로 꽃으로서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바로 ‘꽃물 든 생의 문장’이란 어구 덕분이다. 그것은 버려진 것의 비참한 최후를 의미하지 않는다. ‘생의 문장’은 촉촉한 생기요, 생명의 환희가 아니고 무엇이랴.
내어줄 것 내어주랴 붉은 혀를 깨물었다
뒤채듯 겁탈하듯 옥죄는 뉘 앞섶에
정강이 무르팍까지 다 빠졌다. 그 잣눈!
- <그 잣눈> 전문
어디서 봤나 싶어 곰곰이 생각하면
다정한 저 목소리 누구더라 싶은 저녁
손톱 밑 흙 때를 긁던, 날 부르던 소쩍새
- <소쩍새 우는 저녁> 전문
‘숫눈’은 아무도 밟지 않는 눈을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그렇다면 ‘잣눈’은 무슨 뜻일까. 한 자 깊이가 될 정도로 많이 쌓인 눈 deep snow를 가리킨다. 잣눈의 반대말은 자국눈이다. 발자국이 겨우 날 정도의 적은 눈이라고 한다. 이 시를 감상하는 데 있어서 시 제목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시적 화자는 하염없이 내리는 폭설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정강이 무르팍까지 다 빠졌다’고 말하고 있다. ‘한 자의 깊이가 될 정도의 많은’을 시인은 ‘정강이 무르팍’을 가져와서 보더 더 적확하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슐라르가 언급한 것처럼 이미지는 ‘다른 것을 의미하고 달리 꿈꾸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속수무책의 상황은 ‘뒤채듯 겁탈하듯 옥죄는 뉘 앞섶’이란 어구에 생생하게 구체화되며, 자포자기의 직면에 처한 상황은 ‘내어줄 것 내어주랴 붉은 혀를 깨물었다’로 풀어내었다. 우리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 하나의 사유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내어줄 것 내어주랴’는 관념의 진술이고, ‘붉은 혀를 깨물었다’는 구체적 정황이다. 이중 층위를 통한 묘사는 지배적 감각을 만들어내어 감동을 준다.
시적 화자는 <소쩍새 우는 저녁>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듣고 ‘어디서 봤나, 누구더라’하는 사유로 확장시킨다. ‘어디서 본 누구더라’는 식의 생각을 하는 시기는 빠르면 오십 대 이후부터, 늦으면 칠십 대 이후부터 시니어에게 찾아오는 일종의 불청객이다. 가벼운 인지장해는 노화가 깊을수록 심해진다. 그래도 외로워지는 저녁이면 그 실체를 밝히고픈 의지에 생각은 꼬리를 문다. ‘소쩍새 울음소리’가 시적 화자에게 다정하게 들리는 건 무슨 연유일까. ‘손톱 밑 흙 때를 긁던, 날 부르던 소쩍새’는 이 시에서 쾌미를 안겨주는 대목이다. 다소 생경한 ‘손톱 밑 흙 때를 긁던’ 시적 화자를 불렀다는 그 사람을 당장 상상하게 만든다.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립고 생각나는 저녁인 것이다. ‘흙 때를 긁던 나’와 ‘날 부르는 소쩍새’란 두 개의 정황을 변주하여 하나의 세계 안에 넣으면 미적 인식이 작동하는 지배적인 정황이 드러난다. 그녀는 그리움의 마음을 모아 ‘소쩍새 울음소리’를 가슴에 품은 것이다. 시적 화자가 소쩍새에 사랑을 느낀 데는 손톱 밑을 깨끗이 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리움이 되었다는 것은 시적 화자와 그 사람과의 거리가 그만큼 멀다는 의미다. 아직 욕망이 살아있는 시적 화자는 가슴에 남은 그리움을 끌어안고 외로움의 극복을 지향하고자 한다. 소쩍새 우는 소리를 기어이 품은 한분옥 시인의 상황이 이와 같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윤사월 무논에 물 찬 듯 출렁대고
바람 부는 쪽으로 뒤집힐 듯 출렁대던
몸 밖에 터져 나오는 소리
돌로는 다 못 누를 것
목울대 걸리거나 한 허리 베어 물거나
횃대에 옷 건 일도 모른다면 모를 일
감기는 회오리 끝에
그믐달만 여윈다
- <바람의 내력> 전문
‘바람’의 상징성은 참으로 다양하다. ‘바람은 신화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하나’라고 카네티는 <말의 양심>에서 말했다. 모든 시인이 관심을 두는 자연 속 대상이다. 어떤 신도 바람처럼 인기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특히 회오리바람은 영웅 서사시의 주요 줄거리를 이루는 요소다. 시적 화자가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바람의 내력’이다. 시인은 불어오는 바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 내력을 캐내어 독자들 앞에 소상히 밝히고자 한다. 일단 시인은 바람의 내력을 ‘출렁대는 성질’과 또 몸 밖에 ‘터져 나오는 소리’에서 찾는다. 시인이 찾아낸 바람의 성질 중에서 가장 압권은 ‘돌로는 다 못 누를 것’이라는 언명에 놓여 있다. 우리의 내면 깊숙이 가라앉아 있으면서 수시로 불쑥 치고 올라오는 바람은 이 시에서 욕망의 상징이다. 상징자연과의 관계에서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인간의 한계를 멋진 형상으로 표현한 이 대목은 최고의 멋과 맛을 우리에게 안겨준다고 하겠다. 상징계에서의 욕망은 저렇게 억압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갖가지 규범에 묶인 여인은 바람 같이 세찬 정념이나 열정을 차가운 얼음으로 식혀야 한다. 어찌하여 시인은 바람을 돌로 누를까를 생각했을까. 이런 사유 자체가 시인을 더욱 위대하게 만든다.
장자는 ‘바람은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세상의 일을 가리킨다’고 했다. 서정주는 <바람의 해석>에서 ‘하늘의 구름도 늘 그 모양이 변하고 없어지기 일쑤지만, 그 모양이 보이지도 않는 바람만은 모양이 없는 대로 아주 없어지거나 변모하는 일 없이 매양 우리 마음과 육신에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장자나 서정주가 바람에 대한 해석을 설명으로 내렸다면, 한분옥은 명시인답게 심상적 이미지로 묘사한다. ‘그믐달이 여위는 것’은 현상학적으로 진리다. 시간이 흐르면 자동적으로 작아지는 순리나 자연의 이법을 시인은 바람의 내력을 추적하는 데 차용한 것이다. 자연히 회오리바람에 걸리기만 하면 ‘그믐달만 여윈다’고 하는 시인의 바람에 대한 생각은 절묘하다. 이 시를 감상하는 포인트는 ‘그믐달’에 대한 이해라 하겠다. 하고 많은 달이 있는데, 왜 그믐달인가를 상상해 보면 ‘그믐달’이 어떤 이를,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대충 알 수 있다. ‘너무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가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도록 쓰리도록 가련한 나도향의 달’이 아닐까 싶다. ‘목울대 걸리거나/ 한 허리 베어 물거나/ 횃대에 옷 건 일’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바람에 휩싸이면 고생깨나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현듯 나더러 스무 살로 돌려준다면
덥석 받아 안을까 푸른 봄 다 준다면
그 봄 다 어쩔 것인가 누가 다시 돌려준다면
밤하늘 북두칠성 북극성에 소처럼 매여
오금을 못 편 채로 풀잎이나 뜯을 때에
명줄에 꿰인 가난이 죄지은 듯 죄인 듯
- <슬픔 한 벌> 전문
시를 쓴다는 것은 시적 대상의 이면에 감춰진 의미와 사유를 통해 우리의 삶과 세계를 탐문하는 일이다. 그런데 과학자나 심리학자가 하는 탐문과 시인의 탐문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감정에 속하는 ‘슬픔’을 보이게 하기 위해 ‘한 벌’이라는 계량명사를 빌려왔다. 이때 한분옥 시인은 시적 대상인 ‘슬픔’을 가시화한 기표 안에 기의를 감추고자 우회적 양상의 언술 양식을 전면에 내세우는데, 이를테면 ‘불현듯 나더러 스무 살로 돌려준다면’이란 가정법을 내세운다. 단순하게 전제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덥석 받아 안을까’ ‘그 봄 다 어쩔 것인가’하면서 두려움을 내비친다. 처음에 세웠던 가정법 조건절을 1연의 종장에서 다시 내건다. 그만큼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어리둥절한 것이다. 돌려주는 주체가 ‘누가’ 될 것인지도 궁금하다. 여기서 ‘스무 살’은 ‘푸른 봄’으로 전치되는데, 봄은 한 번씩 순환하듯 오기 때문에 이런 전제는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부분 또한 한분옥 시의 멋이고 맛이다.
둘째 연은 첫 번째 연의 전제에 대한 귀결절인데, 시인은 그 푸른 봄을 그냥 덥석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듯한 자세를 보이는데, 여기에는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명줄에 꿰인 가난이 죄지은 듯 죄인 듯’에서 망설이는 연유를 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가난’이다. 지금이 무슨 시대인가. 자본주의시대가 아닌가. 돈이 없으면 연애도 못하고, 사랑도 오래 지키지 못한다고 여긴다. ‘밤하늘 북두칠성 북극성에 소처럼 매여’에서 북극성의 소는 ‘야간 통행금지’를 의미하고, 이는 가부장제 하의 우리 사회 보수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오금을 못 편 채로 풀잎이나 뜯을 때’는 우리 사회에 항존하는 여성과 남성의 이중적 잣대와 운명적인 가난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포스트모던 시대지만 아직도 일부 가정 또는 시적 화자의 의식에 남아 있는 여성의 비주체성에 대한 자학적 비판일 수가 있겠다. 진실한 마음만으로 안 되는 것이 너무나 많은 건, 슬픈 현실이다. ‘슬픔 한 벌’은 외관으로 보일 것 같지만 입으면 슬픔이란 관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횡포에 좌절하는 시인의 슬픈 현실을 ‘한 벌’로 잘 형상화한 이 시 역시 수작이다.
벼루에 먹을 갈듯 감추어둔 어둠을
운다고 울어지더냐 말 다 할 수 있더냐
이 적막 생솔로 타는 밤을 네가 왜 우느냐
설령 어느 비탈에 사랑 두고 왔대도
나처럼은 말거라 울음 울지 말거라
질러 온 짧은 봄 허리 물러서지 말거라
- <운다고 울어지더냐> 전문
시적 화자는 ‘설령 어느 비탈에 사랑 두고 왔대도’ 다시 말해 이루어질 수 없는, 금지된 사랑이 있을지라도, ‘나처럼은 말거라’고 말한다. 도덕과 윤리가 시퍼런 상징계적 질서 속에서 사랑은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법이 허용해도 관습이 허용하지 않고, 시간이 용인해도 양심이 자신을 용납하지 않기에 그 사랑 앞에서 단념하기 일쑤다. <메디슨카운티 다리>의 프란체스카도 그랬다. 확고한 신념의 신여성 나혜석이나 ‘정신적 사랑인데 뭐 어때’의 당당한 이영도가 아니라면 현실의 견고한 유교의 그물망을 뚫을 수 없다. 시적 화자는 그래도 비탈에 선 사랑이라도 부당한 현실에 도전하고 갈등하는 자가 있으면,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한다. ‘울음 울지 말거라’고 한 번 더 강조한다. 이 시의 압권은 ‘질러 온 짧은 봄 허리’다. 그것도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질러 왔고’ ‘긴 봄날’이 아니라 ‘짧기만 한 봄날’이다. 대상이 맞닥뜨리고 있는 봄은 가장 중요한 ‘허리’ 부분이다. 시인이 ‘운명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랑’을 직접 말한다면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비탈에 선 사랑의 순간’을 포착하여 그 이미지를 ‘질러 온 짧은 봄 허리’로 묘사해서 깊은 울림을 준다.
첫 번째 연에서 시적 화자는 ‘벼루에 먹을 갈듯 감추어둔 어둠’이 ‘운다고 울어지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어 한다. 갈면 갈수록 시커멓게 타는 먹물에 녹아 있는 진한 사랑은 감출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왜 네가 우느냐, ‘나처럼’ 우지 마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적막 생솔로 타는 밤’에 묻어 있다. 이 부분은 기존의 생각을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을 안겨준다. 이루지 못할 사랑에 대한 생각은 안타까움을 넘어 고통이 될 것임을 시인은 확신한다. 정황 안에 흔들림이 환기하는 비극적 감각과 내밀한 사유를 내재시키는 ‘생솔가지 타는 밤’은 여인의 내면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을 둘러싼 삶의 인고와 괴로움까지 확연하게 전달한다. 그 밤은 잠 못 이루고 적막 속에 빠져 힘들어하는 여인의 내면을 적확하게 제시해서 공감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시인이 그 머뭇거리는 여인의 인생 선배가 되어, 사랑의 경험자로서 대상을 불러 세워 놓고 쉽게 포기 마라고 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깨침이다. 어둠의 사회에 절망하면서도 그 운명 속에서 꽃을 피우려고 희망하는 것이다. 사랑에 물러서는 행동이란 결국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금기를 포용한다. 이제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가 된 시인은 사랑을 존재 자체로 인정하고 환상적 통합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Ⅲ.
시를 쓴다는 것은 진정한 자아를 인식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자아는 물리적인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 변하기도 한다. 물질주의의 심화로 인해 한 개인의 자아는 점점 훼손되고 있는데, 시인은 상실되어 가는 자아를 적극적으로 회복하려고 하지만, ‘저만치 나가 앉은/ 돌은 또 돌로 앉고/ 칼로 베지 못한 물소리만 흘러와서/ 내 뼈 마디마디’를 시 <이 고요 속에>서 ‘꺾는다’고 토로하고 있다. 시적 화자가 못 푼 욕망의 응어리로 상징화된 밤 또 푸른 봄, 젖은 꽃을 동등한 지배소로 삼고 그녀는 기꺼이 인고의 삶 속에서 여성적 현실을 수용하고자 한다. 결국 시인은 변증법적인 자아를 지향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저녁과 밤을, 슬픔과 적막을 대범하게, 시인답게 껴안는 것이다. 한분옥은 저층에 ‘정한’이라는 한국적 전통 정서를 깔고 있는 작가다.
콜린 윌슨의 견해처럼 상상력은 한분옥에게 있어서 자유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상상력을 발휘해 시적 화자가 사회적 관습이나 모럴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주춤거린 이유는 지상에서만 발을 딛고 살아왔기에 벗어나는 것이 낯설고 두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단단한 돌로 바람을 다 누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눈을 무시하기가 어려워서 망설인 것이다. 한 주체자로 존재적으로 뜨겁게 젊게 살아가는 일이 어렵다. ‘내로남불’의 준거가 아직도 횡행하기 때문에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처럼 살지 마라’고 용기를 준 한분옥의 시는 이 담대한 도전으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 목소리에 힘입어 여위어가지만 ‘생의 문장’을 붙들어 맨다. 기대감도 갖는다. 비로소 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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