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3일 3월 첫째 주일 “대하 33:10~13” <하나님이신 줄 알았더라!>
사람은 한번 태어나고 그리고 죽는 인생입니다. 한번뿐인 인생이기에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멋진 인생, 실수하지 않는 인생,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위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그분의 인생을 나의 경험으로 실수와 실수를 답습하지 않으며 성공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 교훈을 얻습니다.
실패한 인생을 닮고자 노력하고 실패한 인생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인생은 연습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실패한 인생을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실수와 실패의 길을 경험하기 위해 그 길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며 미련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성공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 의를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롤 모델로 삼아 그분의 인생이 나의 경험이 되고 선생이 되고 교훈을 얻으려 노력하는 겁니다.
우리가 교훈을 얻는 방법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선생과 제자사이에서,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책을 통해서, 그리고 TV나 SNS등 매체를 통해서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통해 나의 거울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실패를 내가 경험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성경에는 인생의 모든 새옹지마가 모두 그려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같은 믿음의 우등생들의 인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므낫세와 같은 도마와 같은 의심의 불신앙을 가진 인생이 있습니다. 전적인 불신앙으로 우상을 섬기던 악한 왕들, 아합과 이세벨리 있으며 예수님을 판 자 가롯 유다와 같은 실패한 인생도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있는 가하면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속고 속이는 권력을 이용해 편취하려는 인생, 술수에 능하여 남의 것을 가로채려는 인생, 잘 보이려 경고망동하다 실패한 인생, 동성애하는 인생, 수많은 잘못된 실패의 길을 걸은 인생들의 모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의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믿음으로 발버둥 치며 목숨도 개의치 않는 인생이 있습니다. 이 모두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예수그리스도의 본질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입니다. 성경은 연극의 무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훈이 되고 거울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연극의 무대와 같으며 조명이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알게 하는 교과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눈부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피조물에게 훈장으로 거울로 우리를 경배하게 합니다.
롬1:20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 할지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죄가 그들을 다스려 마음을 악하게 하고 미련하게 하며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감사를 모르고 허망하여 남의 것을 탐하며 일하지 않으며 얻으려는 로또인생이 되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의 14번째 왕 므낫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에는 많은 왕들이 있습니다. 사울을 초대 왕으로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단이 되면서 남 유다에는 르호보암이라는 솔로몬의 아들이 왕이 되어 다윗왕조 20명의 왕이 통치를 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9개의 왕조가 탄생하며 살인과 반역을 통해 19명의 왕이 통치하지만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을 당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 바로의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 40년의 시간동안 모든 시간과 삶을 주장하시고 간섭하시며 모자라면 채워주시고 배고프면 먹여주시고 춥고 더우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모든 나라의 위협과 모든 상황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저들을 왜! 주전 722년과 586년에 멸망의 길로 인도하셨을까요?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므낫세는 열왕기하 21장에서 볼 때 가장 사악한 왕으로 조명됩니다.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아들로 두 가지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2살에 왕이 되어 55년간 최장수통치기록과 다른 한 가지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유다 왕 중에 가장 악한정치를 하였다는 기록입니다.
그는 왕하18:5에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하는 아버지 히스기야 왕의 칭찬과는 다르게 므낫세는 왕이 되면서 대하33: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쫒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는 악을 행하였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함을 본받았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봉헌하고 일천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감동하게 하였다면 아버지 히스기야는 자신의 뉘우침의 기도로 하나님을 감동케 하여 생명을 15년이나 더 연장 받았음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버지의 통치경륜을 보고 경험하며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믿음과 신앙의 유산을 답습하지 아니하고 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3절을 볼까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었던 산당을 재건합니다. 우상을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세라 목상인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신으로 섬겨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만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도 부처도 마호멛도 다른 모든 우상이 다 한곳에 있습니다. 절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회교선전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계룡산에 까지 찾아가 촛불 켜지 않아도 됩니다. 원스톱으로 신을 숭배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그렇게 된다면 정말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우상을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움으로 성전인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선지자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으며 또 자신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인신제사를 드렸으며 악한 귀신의 영이 씌인겁니다. 선지자를 대하기보다 박수와 신접한 자, 귀신 들린 자들을 신임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왕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택하신 성전을 건축할 곳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는 곳이고 백성들은 성전에 와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상기시킨 곳입니다. 그런 그곳이 우상이 제단이 되었습니다. 33:7절에 자기가 만든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여호와께 대한 도전입니다. 모독입니다.
죄의 댓가는 분명합니다. 이 죄의 결과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남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을 받았고 므낫세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므낫세의 모습은 처참합니다. 이미 선진들의 모습을 통해 우상을 버려야 함을 보여주셨고 깨닫게 하셨고 역대 지략에 기록하여 알게 하셨습니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경험하는 길만이 답입니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됩니다. 성도의 곤고와 시험은 우리를 다시 깨우고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내려갈 곳이 더 이상 없는 사람은 이제 비상하여 성공으로 오를 일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고 내려설 곳이 없다면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셔야 할 때입니다.
므낫세는 앗스르에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수모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는 모든 왕들이 죽어 돌아가는 열조의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웃사의 동산에 묻히는 수치도 격어야 했습니다. 고난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기회와 경험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이 기회가 없었다면 므낫세는 회개하지 못하고 악인으로서 모든 생을 마감했을 겁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무낫세는 고난을 경험하며 겸비해 졌습니다. 고난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바꾼 겁니다. 성전의 우상을 제거하였습니다. 제단을 보수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개하여 내안에 예수그리스가 있으면 고백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우리의 행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 왕위에 앉은 므낫세는 이제 서야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 알았습니다. 13절b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니 므낫세가 그제 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이제 므낫세가 회개합니다. 온갖 어려움을 경험한 후에 회개하였습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세운 종교개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던 악행을 회개한 겁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끝을 향하여 가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유다의 가장 악한 왕으로의 오명을 쓰긴 하였지만 그의 말년은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회개는 옛사람을 끊는 겁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고 고백하는 것도 회개이지만 결단이 따라야한다는 겁니다. 이 결단은 의지적 결단이어야 합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담배를 끊는다 하면서도 끊지 못하고 줄인다 하는 것은 의지적 결단이 아닙니다.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사도 바울도 회개하기 전에는 ‘복음의 훼방자요 핍박 자’였습니다. 딤전1:13에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는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후에는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였습니다.
눅19:8에 삭개오는 자신을 신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억울하여 예수님께 호소합니다.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어놓겠다고 악속 합니다. 만일 공무 중에 남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일을 핑계로 협박이나 뇌물을 받을 것이 있다면 4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공하는 인생의 길을 찾으십니까? 그 해답을 찾는 비결은 그리스도를 닮는 일입니다. 유다의 성공한 왕들의 역대지략의 기록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느냐! 아니면 다윗의 믿음의 길을 따르느냐! 성경은 두 가지로 성공이 보장된 인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공의 기회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성경안의 선진들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알게 하십니다. 그래도 실수투성이인 나의 생각과 의지만으로 모든 일을 추진하시겠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며 gksksa을 의지하십시오.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 아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의 뒤안길의 발자국을 남깁니다. 바닷가 백사장을 걸을 때 발자국이 남는 것처럼 그러나 백사장의 발자욱은 금방 지워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발자욱은 지워지지 않으며 선명하게 남아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발자욱은 심는 겁니다.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는 우리의 결실입니다. 좋은 땅에 좋은 씨를 뿌리면 많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가면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