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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초기시의 시어 변이와 상징성
김 예 태
문덕수는 1963년에 시론 「내면세계의 미학」과 함께 독특한 시 창작 방법에 의한 「선에 관한 소묘」 연작시를 발표하였다. 그 시들은 고도의 추상성으로 인해서 전위적인 실험시가 되었고, 시론 「내면세계의 미학」에 근거하여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으로 읽히면서 ‘무의미의 순수시’로 분류되었다. 결국 문덕수의 초기시 중 「선에 관한 소묘」 연작시들은 그의 시작 상황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으로 평가되면서도 그 시들이 지니는 의미망이나 시사적 가치의 구체성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본고는 칸딘스키의 추상미술 이론에 입각하여 그의 시에 접근하였다. 점, 선, 면의 기하학적 용어들이 제2체계의 상징어로 설정되었다고 보고, 언어들 간의 유비관계 속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를 가시화시켜 나갔다.
독특한 시작법의 특수성으로 하여 독자성을 가지면서 문덕수 시의 전체성으로 용해되지 못하는 「선에 관한 소묘」연작시들이 그의 시세계의 흐름 속으로 들어와 함께 빛나기를 기대하며 본고를 진행하였다.
1. 서론
문덕수는 『현대문학』으로 등단하던 당년(1956)에 첫시집 『황홀』을 상재하고, 만 10년이 지난 1966년에 제2시집 『선 공간』을 출간한다. 김윤식은 『황홀』에서 『선․ 공간』으로의 변화를 두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를 만하다면서도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하여 두 시집의 표층적 차이의 거리를 무마시키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어떤 답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선 공간』은 이 표층 상의 거리로 인해 문덕수의 작품세계에서 빠져나와 독자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선 공간』이 독자성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특수성이 부각되어 반세기가 넘도록 개인의 시사적 흐름이 하나의 맥락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라는 시적 요소 간의 통합적 고찰에도 불균형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문덕수 문학을 대표하는 현상으로까지 발전했다. 특수성은 우수성과 연결될 확률이 높지만 두 용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수성이 다른 것들과 결합하거나 그 속에 용해되어 전체적으로 상승하며 융기할 수 있을 때 그 특수성은 비로소 우수성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본고가 진행하려는 문덕수 초기시의 시어 변이에 관한 고찰은 이러한 특수성의 요소가 그의 초기시와 통합적으로 어우러지며 함께 상승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점검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문덕수의 詩業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그가 한국현대시사에 남긴 족적에 비해 빈약한 편이다. 논자는 이러한 원인이 그의 초기시, 특히 『선 공간』에 수록된 「선에 관한 소묘」 연작시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문덕수는 1963년에 시론 「내면세계의 미학」과 함께 전위적인 실험시 「선에 관한 소묘」연작시 5편을 발표하여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 시들은 「내면세계의 미학」에 근거하여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으로 파악되면서 ‘무의미의 순수시’로 분류되고 ‘의미 분석이 불가능한 시’로 자리매김 되었다. 결국 「선에 관한 소묘」연작시들은 그의 시작 상황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으로 평가되면서도 그것들이 지니는 의미망이나 시사적 가치의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는 작품이 되었다.
논자는 이 시들의 의미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과 『황홀』이후 『선·공간』이 나오기까지 만 10년이 걸릴 만큼의 寡作이 어떤 함수관계를 갖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아방가르드의 속성을 갖는 이 작품들은 시간에 비례하는 고투를 겪으며 마련한 새로운 시작법에 의해서 쓰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였다.
본고는 그의 시론 「내면세계의 미학」을 읽으면서 두 가지 기술에 주목하였다. 하나는 “무의식이라는 광활한 영역이 의식의 기초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구조의 아나키즘적 성격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무의식이 고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세계 이전’에서이며 ‘지향이자 빛인 세계의 본질적 사건’은 의식의 장에서 이루어진다는 레비나스의 입장에서 볼 때, 문덕수가 말하는 ‘내면세계’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시로 투사되는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모든 체험들이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된 시 ⸳ 공간으로 모여들어, 시 공을 무화시키면서 한꺼번에 뒤섞여 있는 의식의 아나키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상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이미지의 순수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였다.”라는 기술인데, 이것은 문덕수가 대상과의 거리를 멀리하면서 순수이미지를 표현해가는 방법으로 ‘초현실주의’가 아니라 ‘추상주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을 주었다. 문덕수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전쟁의 기억이며 그것이 존재자의 내부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을 때 부정되는 현실의 부정을 통해 ‘초현실’을 추구한다면, 문덕수가 선택한 추상주의의 기능은 초현실의 ‘순수’에 이르는 길일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된 것이다.
추상미술의 원리를 창안한 칸딘스키는 물질세계를 추상화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점, 선, 면을 찾아내었다. 칸딘스키는 “예술(회화)에서 활용되는 추상적인 법칙성은 다른 예술에서도 그 경우가 다양하든 아니든 간에 언제나 의식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하였다. 유사성으로 묶이게 되는 추상은 궁극을 향하여 가고, 그 본질은 절대 순수에 이르게 될 것이며, 추상화된 언어는 모든 하위단위가 수용할 수 있는 내면적 속성을 가질 것이다. 결국 문덕수는 칸딘스키의 추상이론을 원용하여 점, 선, 면을 자신의 제2체계의 상징 언어로 활용하였을 것이다.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그동안의 선행연구들이 이러한 생각들을 상당부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문덕수는 “(나는) 시의 아름다움을 구축하기 위한 방법론을 추구하지만 나의 시는~ 문명사회의 근원적인 것, 즉 현실 문명의 핵심을 싸고” 있으며 “지금까지 시를 써오는 동안 실제의 작품은 언제나 내가 계획하는 의식적인 방법과는 어긋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방법상의 아이러니 때문에 사실상 나는 괴롭다.”는 말을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시세계를 청마와 지용의 영향이라고 하는 문덕수는 ‘미의 구축’이라는 표현적 요소와 ‘문명사회의 핵심’이라는 의미적 요소를 양날의 칼처럼 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를 괴롭히는 ‘방법상의 아이러니’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그의 시적 역량으로 보아 표현과 의미의 요소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시 쓰기의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시 쓰기를 위해 계획한 의식적인 작법이 따로 존재하므로 독자들이 그 작법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시의 본질에 닿을 수 없다는데 대한 안타까움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에 무엇을, 어떻게 담아내는가’ 하는 것은 모든 시인의 과제다. 문덕수는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양손에 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해 온 시인이며 그의 초기 시는 이러한 노정이 배어든 결과물로 보인다.
2. 초기 시에 사용된 시어의 변이와 상징
(1) 시어의 변이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강물
천년 녹슬은
종소리의 그 간곡한 응답을 지니고
황홀한 계시를 안은 채
일체를 이미 비밀로 해 버렸다.
- 침묵(1) 전문(『황홀』)
물결이 물결을 서로 악물고 달려오는 것은/ 부릅뜬 지옥의 눈깔들이 들어박혀 오는 것은// ~~ 내밀며 늘어지는 물줄기/ 솟구치며 갈라지는 혓바닥이/ 나무며 언덕돌이며 감아채어 나뒹굴다가/ 이윽고 모두들/ 뿔뿔이 내빼는 잔잔한 발자국들……// 이것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울분의 밑바닥을 샅샅이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아주 잔잔한 정적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노한 파도」부분 (『황홀』)
문덕수는 첫 시집의 「발」에서 『황홀』은 “전쟁의 가혹한 몸부림이 着根할 나의 시정신의 기지”라며 70% 가까운 시에 전쟁 체험의 이미지를 담았다. 『황홀』은 “전쟁의 가혹한 몸부림을 착근”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된 표제어로 그는 이 시집을 통해 내면에서 들끓는 전쟁의 상흔을 말끔히 내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침묵(1)」은 1955년 『현대문학』 창간지에 초회 추천된 작품이다. 침묵(1)」을 추천하면서 청마는 “이 불과 10행의 작품에 담긴 거두절미한 거창한 파라독스는 그대로 우주형성 이전의 혼돈모호한 호흡으로써 우리를 휘감아가고 만다.”고 추천사를 썼다. 권도현은 『논어』의 옹야편을 들어 “묵중하고 숭엄한 진리요, 소리 없는 청산의 접문이다”, “노자가 발견한 무상지상으로 귀의하려는 깊은 오뇌다.” 와 같은 의미 깊은 해설을 하고 있다. 「침묵(1)」이 『황홀』의 권두 쪽에 놓인 작품이라면 「노한 파도」는 권말에 놓인 작품이다. 논자는 우주대자연의 순항적 차원에서 볼 때 위의 두 작품은 다른 표현의 같은 작품이라고 본다. 차이가 있다면 청산과 바위는 안으로 새길 뿐 밖으로 내지 않는 가운데 마음에서 지우고, 파도의 물결은 끊임없이 상처를 뒤집어 보며 그 상처가 스스로 삭아 사라질 때까지 곱씹으며 응시하고 있다. 전자에서 노자의 도를 얻으려 한 의지를 본다면, 후자에서는 불성을 만나러 가는 도정을 본다. 결국 이 시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다. 실존을 위협하는 타자로부터 벗어나는 일, 확실한 자기치유를 통해 탈출의 문을 열고 나가 오로라를 만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 같다. 『황홀』 이후 침잠하였다가 만 10년이 지나 제2시집 『선·공간』(1966)을 들고 나왔는데 여기에 『황홀』에 대한 ‘반성적 돌아보기’라고 할 수 있는 시,「해석解釋」이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어지럽고 컴컴한 관념의 소용돌이 속에
한때 세계는 휩쓸려들고,
끊임없이 휘감아 오르내리는 선회旋回와
둘둘 늘어져 뻗히는 원형의 계단은
시들고 멍든 언어의 노역(勞役)
부질없는 논리의 곡예
편의한 빛깔로 연색되면서
때묻고 해어진 사상(思想)의 옷을 입었다.
허지만
이것은 환상 속에 유페된 세계
아니 빈 세계의 그늘 빈 세계의 망령!
-「해석解釋」전문 (『선 공간』)
문덕수에게 있어 통증들의 외피만 담고 있는 전쟁은 시가 되지 못하였다. “행위자의 형곽 안에 욕망을 가두고 있는 기호학은 그것이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재현의 기호학”에 불과하다는 시적 한계를 본 것이다. 내부에 혼돈 상태로 들어있는 전쟁과 전쟁의 원흉이 되는 힘의 원형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는 현상학적 환원으로는 전쟁을 초월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새로운 시작법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10년의 침묵은 그가 새로운 시작법을 얻기 위한 불가결의 시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덕수씨의 작품세계는 황홀의 표상에 그 시풍의 본적지를 두고 있으면서도 이『선 공간』에 접어들면서부터 많은 변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는 권도현의 주장은 참으로 적확하다고 본다.
원래 기하라는 학문 자체가 공간의 입체적 현상을 점과 선을 중심으로 수리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기하학에서의 공간은 그 나름대로의 질서와 균형을 갖춘 것으로 인정된다. 만일 질서나 균형이 어긋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고 단연히 기하학적 공간이 될 수 없다. 삼각형은 삼각형으로서의 법칙성을 지니며 원은 원으로서의 법칙성을 지닌다. 만일 원이 원으로서 지녀야 할 법칙성을 어긴다면 그것은 더 이상 원이 아니다.
“명확한 시각적 이미지를 빌어 그의 시의 원리를 형상화하고”……“이 원리는 기술적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세계 인식과 깊은 상관성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문절이나 문장들이 내포한 지시적 의미들의 산술적 누적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구조로부터 생성 변형되어 빚어나오는 상관속의 결합의 미라는 바탕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특성을 지닌다.…… 이것은 앞에서 논의된 바 대상으로부터의 시의 독립이나 기하학적 의미로서의 시의 추상화와 일관된 맥락을 유지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기적인 구조를 지닌 통합체로서의 내적 대응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숭원은 기하학적 도형이미지로 표현되는 시적 대상들은 질서와 균형을 갖춘 ‘법칙성’을 지니게 된다고 말하고, 김시태는 문덕수가 세계 인식과 깊은 상관성을 맺는 ‘시의 원리’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였다. 장사선은 문덕수의 표현들이 ‘새로운 구조’를 가지며, 이는 “대상으로부터 독립된 기하학적 의미로서의 시의 추상화와 일관된 맥락”을 유지하므로, 그의 시를 “유기적인 구조를 지닌 통합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본고는 이들 선행연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켜보기 위해 ‘칸딘스키의 추상주의 미술의 원리’를 접목시켜 보았다.
칸딘스키는 현대 회화에 순수 추상주의를 실현시킨 최초의 화가이며 사상가다. 그는 사물성에 대한 우주적 근간을 점, 선, 면으로 보고 이를 미술세계의 상징 원리로 삼았다. 1922년 바우하우스에 초청되어 강의를 준비하면서부터 그는 순수 기하학적 형태를 수단으로 하는 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짚어낸 것이다. 추상은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이며 점, 선, 면은 추상의 궁극에서 만나는 물성이므로 여기에는 우주의 근간으로서의 내면적 속성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성과 대비시킬 수 있는 내면적 속성을 다른 대상에게서 또는 인간 스스로의 내면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들로 인한 구체성을 추상의 세계로 묶어줄 수 있다면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일일 것이다. “닮음은 결코 그 자체로 안정적이지 않고, 스스로 또 다른 유사성을 불러들이고 뒤이어 이 유사성이 새로운 유사성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고정되며, 그래서 각각의 닮음은 다른 모든 닮음의 축적에 의해서만 유효하고, 아무리 하찮은 유비일지라도 그 타당성을 입증하려면 세계 전체를 탐사해야 한다.
세계를 탐사해서 그 유사성으로 묶이게 되는 추상의 세계는 하위단위를 수용할 수 있는 법칙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추상의 속성이다. 논자는 문덕수의 시를 읽기 위해 ‘점, 선, 면’의 시어들에다가 칸딘스키 추상미술 이론에서 규정하고 있는 내면적인 속성을 부여해보았다. 그러자 시 속의 언어들은 이미 도형들이 근원적으로 지니는 속성을 의미로 갖는 제2체계의 상징시어로 살아났다.
예술의 고유성은 감각에 의한 가상화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과 멀어질수록 난해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문덕수는 이러한 난해성에 대하여 인간이 읽고 해석할 때, 시 텍스트 바깥에 있는 물체와 연결시켜주는 행위, 즉 해석에 의한 물리적 지향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므로 “시 텍스트 자체는 본래적 지향성을 가지지 않고 의사적 지향성(擬似的志向性, as-if intentionality)을 갖는 견해도 있다”고 하였다. 추상화된 언어들은 추상의 범주 안에서 무한한 해석의 씨앗을 가질 수 있으므로 시적 표현을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수많은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추상이며 이것이 곧 시가 갖는 유연성이며 시인이 독자를 계도할 수 없는, 시의 고유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문덕수가 선에 관한 소묘에 대해 어떠한 주석도 설명도 곁들이지 않으면서 괴롭다고 한 이유가 바로 추상화된 시를 읽는 독자들의 의사적지향을 존중하려는 태도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의 초기시가 현대시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듯한 요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새벽바다』(1974)는 『선·공간』이후 다시 8년이 지난 뒤에 출간된다. 여기에서 문덕수는 면(원)의 이미지와 함께 『선·공간』에서 긴가민가하던 두 번째의 시어변이를 뚜렷이 드러낸다. 그것은 추상화시켰던 시어들을 다시 구체화시켜서 시화하는 작업으로 소위 ‘구체성으로의 해부’라고 하겠다.
추상의 끝은 피리미드의 꼭짓점과 같은 곳이어서 그 꼭대기에는 우주의 근간을 가리키는 얼마의 덩어리만 놓일 수 있다. 일체의 사물을 형태적 속성으로 묶어 섬, 점, 면으로 가르듯, 우주적 에너지의 속성과 흐름을 음양이나 오행으로 집약시키고, 360°의 방위를 동서남북으로, 빛이나 색의 모든 빛깔을 빛의 삼원색, 또는 색의 삼원색으로, 천지의 신용을 춘하추동으로 추상화시킨다. 다 올라와 도를 깨치고 나면 入廛垂手를 위해 돌아서듯 다시 내려와야 하는 곳이 추상의 끝이다. 그러나 추상의 극지에 오르기 이전에 만났던 사물들과 이후에 만나는 사물들은 그의 인식체계 안에서 서로 간에 차이를 보이며 구별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얼굴은/ 번갈아 앞뒤를 밀고 혹은 이끌고/ 어떤 얼굴은/ 서로의 태양이 된다/ 네 얼굴 속에서 잠자는 무수한 얼굴들/ 네 얼굴을 에워싼 무수한 얼굴들/ 그리하여/ 서로의 얼굴은 살피고 더듬고/ 서로 받들고 기대다가/ 마침내 서로의 무덤이 된다.//
-「얼굴·1」전문 (『선 공간』)
얼굴 사이엔 알 수 없는 거리/ 암녹의 심연이 굽이치고/ 얼굴은 얼굴을 의심하고/ 얼굴은 얼굴을 모함하고/ 얼굴은 얼굴을 피하고/ 얼굴에서 얼굴이 떨어져나가면/ 외롭다/ 그리하여/ 네 얼굴도 내 얼굴도 마침내 죽는다//
-「얼굴·2」전문 (『선 공간』)
‘얼굴’은 세계를 이루는 일차적인 요건이며 근원적인 힘이다. 개개의 점이었던 얼굴들이 움직이는 힘의 궤적에 의해 세계가 돌아간다. 세계가 갖는 명암은 서로 다른 얼굴의 속성에 의한 것이다. 주객이 미분되던 애초의 얼굴은 하나다. 하나였던 언어이전의 사물을 갈라놓고 선과 악의 이름을 붙여놓은 것은 언어다. 추상의 극점에서 하산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언어에 의해 분리된 대상들의 이원적인 속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황홀』에서부터 『새벽바다』에 이르기까지 언어의 순한 운전자가 되기 위해 그가 보낸 시간은 모두 18년이나 된다.
(2) 추상적 도형이미지의 활용과 상징
이승복은 문덕수의 전쟁체험은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근원적인 의식 형성의 동인”이며 “극복해야 할, 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그림자”라고 하였다. 물론 지금까지의 논지 전개과정을 보더라도 문덕수 시의 의미해석을 위한 방향은 전쟁체험과의 관련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을 가득 채운 전쟁을 지우기 위해 전쟁을 직시하면서 현상학적 환원이 가져올 황홀의 경지를 추구했으나, 실재에 닿을 수 없는 언어의 벽에 한계를 느끼고 다시 2차 상징체계의 시어를 창안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텍스트의 점, 선, 면의 2차 상징체계의 언어들을 전쟁이미지와 관련시켜 읽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 텍스트 자체는 본래적 지향성을 가지지 않고 의사적 지향성(擬似的 志向性, as-if intentonality)을 갖는 견해”가 가능하다는 점이 본고의 타당성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경직되고 획일화된 시 읽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함께 듣는다.
· 點 이미지와 잠재성
그것은/ 18세기의 내장內腸 속을/ 기생하는, 한 마리/ 세균細菌,/
그것은/ 벽壁 뒤로/ 폭동과 군중을 거느린/ 하나의 점點./
그것은/ 침묵의 축축한 밑바닥을/ 핥는/ 파편/
그것은/ 실패한 지도자의 꿈./
아니/ 지구를 둥근 삼각형으로/ 변조變造하려다/ 들킨/ 미충微虫//
-「선에 관한 소묘‧4」전문 (『선 공간』)
기하학상의 ‘점’은 정지의 상태다. 드러나지 않은 0(zero)의 표상이므로 유와 무, 침묵과 발언, 존재와 비존재… 등 각종의 성질은 잠재되어 있는 상태다.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갖지만 일단 가시권 안으로 들어오면 비물질적 존재가 된다. 그것은 운동에너지를 갖기 이전의 드러나지 않은 힘일 뿐이다. 점은 복잡한 통일체이기도 하다. 점의 집적 작용은 새로운 세계가 될 수 있다. 평면 위에서 점이 차츰 그 수를 증가시켜가면 폭풍과 같은 힘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도 잠재된 상태에서다.
위의 시에서 점은 세균, 파편, 꿈, 미충 등으로 이미지가 변용된다. 점은 가시화되지 않은 전쟁의 動因이다. 현재는 행위 이전의 상태로 고요하게 머물러 있지만, 그 잠재성이 보여줄 위력은 태풍의 눈이 될 수 있다. 증기기관의 발명이 산업혁명(1760~1840년)을 불러오고 세계의 지도를 바꿔놓듯이, ‘18C의 內臟에서 기생’하던 세균이었던 點은 프랑스 대혁명이나 나폴레옹 전쟁을 일으키는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이면에 폭동과 군중을 거느리고 ‘침묵의 축축한 밑바닥을 핥’고 있는 힘. 그 힘의 운동에너지가 몰가치의 방향으로 진행되며 謀議를 企圖하지만 프랑스혁명이나 나폴레옹 전쟁은 끝내 실패하고 만다. 그 힘은 “지구를 둥근 삼각형으로/ 變造하려다 들킨 미충”처럼 현실로 드러나지 못하고 결국은 소멸해버린 힘이었다. 기표에 파탄을 보이는 메타포 ‘둥근 삼각형’은 부정성을 숨기려는 위장술을 연상시킨다.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꽃과 언어」전문(『선 공간』)
‘언어’는 추상어인 ‘점’에서 하위개념으로 해부된 구체어다. 언어는 무한한 잠재성을 갖는다. 사용되기 이전에는 기표(signifiant)로 머물지만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면서 기의(signifié)를 지니는 힘이 된다. 누가 사용하느냐, 무엇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힘의 결과가 달라지는데 이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를 이원적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언어의 집적은 문화의 창조나 전승을 가능케 하여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고,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다. 꽃잎과 만나면 언어는 생명력, 심미성, 영속성까지 얻을 수 있지만 꽃에 닿지 못하면 그 둘레에서 타오르다가 꺼져버린다. 꽃잎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어떤 것들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 線 이미지와 역동성
線은 점의 움직임에 따라 드러나는 궤적이다. 점의 정지 상태를 파괴함으로써 나타나는 동적인 것으로의 비약이다. 가장 간결한 운동성의 표상이지만 긴장과 방향을 갖는 역동적인 힘이다. 직선은 지속적으로 불변하는 방향을 가지며 진행 방향에 따라 수평선, 수직선, 대각선의 형태로 나뉘며 서로 다른 느낌과 정서를 환기시킨다. 전쟁과 관련시키면 선은 평화를 깨는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고, 이념(이데올로기)끼리 부딪치는 전쟁일 수도 있으며, 전장을 날아다니는 총탄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 이미지들을 어떤 상황으로 가상화시켜도 시를 읽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선線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선에 관한 소묘‧1」전문 (『선 공간』)
움직임이 나타나고 움직임이 움직임을 쫓으며 기존의 가치였던 꽃잎, 꽃송이들을 물고, 찢고, 떨어뜨린다. 그 움직임은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 무수한 파괴를 가져온다. 중심을 통과하지 않는 임의의 무수한 직선들은 밀도가 높아질수록 거미줄 같은 망사 모양의 조직이 된다. 하나의 세계를 떠받쳐주는 각계각층의 다양하며 무수한 조직과 같은 망사, 특히 이제까지 가꾸어온 문명과 문화의 ‘찬란한 꽃 망사’위에 동그마니 놓여있던 세계가 내려앉는다. 세계는 인식의 주체가 지키던 지구이거나 우주다. 전쟁을 거부하는 가치일 수도, 침략 당한 국가일 수도, 적에 맞서는 병사일 수도 있다. 병사는 소우주다. 병사와 꽃잎, 꽃송이와 달걀과 같은 우주는 파괴되는 대상으로서 등가의 의미를 갖는다. 이미지의 병치다. 선의 이미지는 순수한 역동성을 갖기도 하지만 전쟁의 동력이 되는 에너지일 때는 무서운 파괴력을 갖는다.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疑問)의/ 화살일까./ 한 가닥의/ 선(線)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線)이 와서/ 걸린다./ 불꽃을 뿜고/ 얽히는/ 난무(亂舞)/ 불사(不死)의 짐승일까./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言語)는 삭아서/ 떨어지고/ 일체(一切)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神秘)한 매듭.//
-「선에 관한 소묘‧2」전문 (『선 공간』)
은빛 실날을 뽑으며/ 그물을 짜는/ 한 올의 바람/ 이윽고/ 환상처럼 걸리는 조롱鳥籠/ 천사의 손도 얼씬을 못하는/ 조롱/ 지구는 무한의 구석 끝을 울리는/ 쓸쓸한 새/ 금빛 구름을 뿜으며/ 그물을 짜는/ 한 가닥의 지푸라기,/ 이윽고/ 허무의 가지 끝에 걸리는 초롱,// 신의 눈도 얼씬 못하는/ 초롱,/ 그 속에/ 우주는 영겁의 모서리를 밝히는/ 호젓한 불꽃/
-「선에 관한 소묘‧3」전문 (『선 공간』)
두 편 시는 線의 작용이 극지에까지 이른다. 「선에 관한 소묘‧2」에서 불꽃을 뿜으며 얽혀오는 선의 힘은 불사의 짐승처럼 두려운 대상이다. 지금까지 세계를 지켜오던 일체의 풍요와 아름다움과 가치를 소멸시키고 무화시킨다. 일체가 불타버린, 언어마저 삭아 내린 無化의 빈자리. 허무의 그 자리엔 놀랍게도 신비한 매듭이 맺힌다. 파괴의 힘이 작용한 소멸의 빈자리에서 그것의 부정을 매개로 하여 나타나는 초현실의 공간이다. ‘파괴하는 것이 창조하는 것’이라는 바쿠닌의 아나키즘적인 공리일 수도 있겠지만 존재자는 허무의 자리에서 발견하는 ‘신비한 매듭’을 초현실주의자들이 닿고 싶은 ‘경이’로 보았을 것이다. 절대순수의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無 또는 空의 세계의 발견이다.
「선에 관한 소묘‧3」에서는 線의 작용을 하는 ‘바람’과 ‘지푸라기’가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바람은 우주의 재료인 은빛 실날로 그물을 짜서 조롱을 만들고 지푸라기는 지구의 금빛 구름을 뿜어 초롱을 만든다. 조롱 속에는 지구가 있고 쓸쓸한 새가 있다. ‘환상처럼 걸리는’, ‘천사의 손도 얼씬을 못하는’ 절대순수, 절대 진리의 세계인 조롱 속에 사는 새는 신의 눈을 숨기며 지푸라기로 초롱을 엮어 허무의 가지 끝에 건다. 초롱 속에는 영원성을 갖는 우주의 한 모서리를 밝히는 불꽃이 있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일이 지구의 구석에서 일어나서 영겁의 우주의 한 모서리에서 영원히 기록되는 ‘불꽃’이란 무엇일까? 불꽃은 전쟁의 이미지거나 전쟁의 원흉이 되는 힘의 원형 즉 무소불위의 욕망일 것이다. 천사의 손도 위무할 수 없는 조롱 속에는 쓸쓸한 새가 살고 있다. 새가 날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라면 새는 욕망이 만들어 놓은 덫, 지푸라기로 엮은 초롱 속의 불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초현실주의에 있어서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냄’이다. 비가시성의 영역에 닻을 내리고 가시성의 세계를 현상화” 한다. 초롱은 경험하는 자아와 경험하는 자아를 들여다보는 또 다른 자아와의 분리로 이원화된 세계가 경험되는 비극적인 곳이지만 불꽃이 밝혀짐으로써 더 이상 인식자가 객체로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동일성이 회복되는 곳이다. 시적 주체는 동일성의 회복을 통해 완전한 세계에 놓임으로써 비로소 전쟁의 실존적 고통에서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문덕수는 ‘시’라는 가상적 세계 안에서 비로소 ‘초월’을 경험하는 ‘황홀’과 만나게 된 것이다.
한 가닥/ 선이/ 여윈 내 손목을 묶어 보고/ 몇 번이고 내 모가지를 금빛으로/ 졸라보고/ 벽 못에서/ 풀려 내려온 노끈이/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였다./ 그 때의 누나의 눈알/ 그리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었던/ 한 가닥/ 선이./ 경부선京釜線 레일로/ 시장댁市長宅 뜨락의 살의殺意의 나뭇가지로/ 십년 전의 누나의 얼굴로/ 돌아갈 수 없는 / 한 가닥/ 선이/ 지중해의 연안沿岸을 구석구석 더듬은,/ 내 누나 같은/ 낫세르 중령中領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의 윤곽으로 들어앉아/ 쉬고 있었다.//
-「선에 관한 소묘 ⸳ 5」전문 (『선 공간』)
위의 시는 선의 추상성을 ‘금빛’, ‘노끈’, ‘치마끈’, ‘레일’, ‘나뭇가지’, ‘지중해의 연안’등으로 해부시키고 있다. 낱낱으로 해부된 선의 역할은 하나같이 삶을 피폐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부정성의 힘을 가지고 구속과 살의와 추행의 만행을 저지르다가 힘이 확장되면 이집트 낫세르 중령의 이글거리는 욕망의 눈동자가 된다. 낫세르 중령이라는 역사적인 인물도 선의 역동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도록 지원한다. 대립과 분열과 마찰과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곳. 한순간도 내려놓을 수 없도록 존재를 위협하는 전쟁의 원체험, 그것의 본질은 獸性처럼 일어서는 욕망의 불꽃이었다. 불꽃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이었다.
많은
태양이
조그만 공처럼
바다 끝에서 튀어오른다.
일제히 쏘아올린 총알이다.
짐승처럼
우르르 몰려왔다가는
몰려간다.
능금처럼 익은 바다가 부글부글 끓는다.
일제 사격
벌집처럼 총총히 뚫린 구멍 속으로
태양이 하나하나 박힌다.
바다는 보석상자다.
-「새벽바다」전문 (『새벽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새벽바다의 이미지를 순간순간 짚어간 시다. 어두운 바다에 잠겼던 해가 막 떠오르는 찰나에 일제히 퍼져 오르는 빛, 바다의 빛은 수평선에서 하늘을 향한다. 시적 주체가 그 붉은 빛줄기들을 ‘총알’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바다는 바로 전쟁터가 된다. 전쟁이 시인의 내면에 드리워 놓은 짙은 그림자가 페르소나와 만나는 순간이다. 짐승이 된 아군과 적군이 고지를 두고 몰려왔다 몰려갔다 하는 사나운 기세로 바다는 철썩 철썩 함성을 지르며 적개심으로 부글부글 끓는다. 일제 사격. 그러나 이미 하늘로 떠오른 태양이 바다를 향해 내리쏟는 총알은 눈부신 햇살이다. 반짝이는 태양의 빛살들이 내려와 박히면 바다의 물결은 모두 보석이 된다. 우주로 떠오른 태양에게는 지워낼 아픔이 없다. 그것은 세계를 통째로 보석상자로 만들어버린다.
‘선’의 이미지가 주축이 된「새벽바다」에서도 ‘얼굴’이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이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다에서 쏘아 올리는 빛은 전쟁이고 하늘에서 쏘아 내리는 빛은 사랑이며 은총이다. 그는 추상을 해부하여 구체화시킨 사물들을 자유롭게 끌어다가 소리 없는 웅변을 들려주고 있다. 무수한 물상들이 점으로, 현상들이 선으로 존재할 때 이미 이원주의로 양극화된 세계에서 어느 곳과 손을 잡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타자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 面의 이미지 상징(角面의 대립과 圓의 온전성)
원을 이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직선에 두 개의 힘이 동시에 같은 비율로 압력 작용을 계속하면 곡선이 생기고, 이렇게 생겨난 곡선은 반드시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 지점에 이르면 원이 생긴다. 다른 하나는 교점을 지나는 선이 다수로 모일 때 그 중심에 별모양이 생기다가 밀도가 최고점에 이르면 원의 형태가 된다. 따라서 원의 속성은 완전함이고 충실함이다.
어떤 선은 평면을 만들기 위해서 2회 이상의 충격을 주어 절선을 만든다. 절선에 의해 생기는 면은 각을 갖는다. 角은 특유의 강인함을 가지므로 角을 갖는 面은 원의 원만함을 갖지 못한다. 대립하는 一組의 선을 필요로 하는 사각면도 원과는 달리 근원적으로 대립한다.
네 품안에 한 알의 씨로 묻혀/ 너를 닮은 과일로 익고 싶다/ 중략/ 외길로만 뻗는 이 직선을 휘어잡아다오./ 부러져 모가 서는 이 삼각을 풀어다오./ 꺾이어 모가 서는 이 사각에서 놓아다오/ 윤곽이 아니라 그대로 가득찬 충실이기에/ 실은 우주도 너를 닮은 충실이기에/후략//
-「원에 대하여」부분 (『새벽바다』)
한 개의 원이 / 굴러간다./ 천사의 버린 指環이다/ 그 안팎으로 감기는 별빛과/ 꽃잎들……/ 금빛의 수밀도만 한/ 세 개의 원이/ 천 개의 원이/ 굴러간다/ 神의 눈알들이다./ 어떤 눈알은 모가 서서/ 삼각형이 되어/ 쓰러진다./ 어떤 눈알은 가로누운/ 불기둥이 되어/ 뻗는다// 한 개의 원이/ 8월 한가위 달만큼/ 자라서/ 굴러간다//
-「圓에 관한 소묘」전문 (『본적지』)
원은 모든 생명의 본향이다. 하늘도 태양도 지구도 달도 자궁도 달걀도 구근도 모두 생명을 품어 길러내고 있다. 한 알의 씨로 묻히는 생명의 출발도 과일로 익는 생명의 완성도 원에서 출발하여 원으로 돌아온다. 세계는 끝없이 펼쳐지기만 하는 선의 역동성이 아니라, 부러지고 꺾이어 모가 서는 ‘삼각’이나 ‘사각’의 강인함이 아니라, 오롯이 지켜지는 생명의 온전함, 충실하게 채워내는 완전함으로 이어져야 한다. 전쟁은 온전한 세계를 파멸시키는 힘이다. 「圓에 관한 소묘」는 부정적인 힘에 의해 파괴되어가는 원의 이미지다. 指環, 수밀도, 원, 눈알, 한가위 달 등으로 변용되는 원의 이미지들 중에서 가장 섬뜩하게 오는 것은 눈알이다. 한때는 별빛과 꽃잎들을 헤아리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담았던 신의 눈알이 쓰러져 불타고 있다. 그는 존재의 아픔에 진솔하였고 시에 충실하였다.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던 전쟁체험의 재생으로 보이는 “어떤 눈알은 모가 서서/ 삼각형이 되어/ 쓰러진다.”나 ‘천 개의 원’이나, ‘한가위 달만큼’부풀어 오른 눈알‘은 내면화된 통증 즉 그림자의식의 표상화로 보인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중략> / 그 중의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 그 중의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의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중략>/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쫓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네 개의 막대기」부분 (『새벽바다』)
벽을 타고 올라가는 한 사나이
쇳덩이처럼 찰싹 붙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딛고 오를수록
벽도 그만큼 높아만 가고
<중략>
햇빛이 찌르는 한낮, 눈 닦고 보니
벽을 붙어 올라가는 수천의 사나이
짐승처럼 찰싹 달라붙은 수천의 사나이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은 고여서
마침내 냇물을 이루리
-「벽·1」부분 (『새벽바다』)
위의 시는 둘 다 전쟁 중인 현장의 이미지다. ‘네 개의 막대기’는 4개 1조로 이루어진 동체다. 무자비한 파괴력을 갖지만 그 중 일부라도 잘못되면 모두가 파멸한다. “시 텍스트에 사용된 언어들이 언어적 해석에 앞서 인간의 수용 감성을 먼저 자극할 때, 수용 감성을 환기하는데 필요한 상징적 데이터가 제공된다면 독자가 개별적 해석 능력이나 스키마 활용의 한계에 관계없이 텍스트를 1차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덕수의 시에서 무자비한 파괴력을 갖는 장방형 육면체로 4모서리가 한 조인 시적 질료에 ‘캐터필러’가 있다. 문덕수는 캐터필러가 장방형의 육면체라는 기하학적 이미지로 적절해서인지, 전쟁의 참상에 대한 현장 기억으로 가장 위력적이었다고 느꼈던지 아무튼 그의 시 수 편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 개의 막대기」가 보여주는 파괴력이 수평적인 평면에서의 비극이라면, 「벽·1」이 보여주는 것은 수직의 평면 위에서 일어나는 비극이다. 어디를 봐도 치열한 싸움터에서 사나이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쇳덩이처럼 붙어 벽을 오르는 사나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전투는 치열하고 사상자는 늘어난다. 햇살에 눈 못 뜨며 벽을 타고 오르는 전투에서 수천의 사나이들이 피를 흘린다. “햇빛이 찌르는 한낮, 눈 닦고 보니” 이것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벽을 타고 올라본 체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듯한 장면으로 보인다. 부상당한 몸으로 오르는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이 흘리는 핏방울이 마침내 냇물을 이룰 것이라는 비극적인 예측은 인식자의 내면에 드리운 전쟁의 그림자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실존의 극한 앞에 서서 시적 주체는 ‘전쟁’이라고 불리는 현장을 고발하는 중이다.
대범하게 말해서 나는 내 꿈과 환상에 더 충실했다. 나에게도 시학이 있다면, 현재까지의 내 시학은 주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움이랄까 심미성이랄가. 그런 것을 좋아하고, 환상적 시학에 충실했던 내 시학을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환상을 분석하면 현실의 가장 중요한 것, 문명사회의 근원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다.
문덕수는 자신의 시학을 돌아보며 ‘주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자성한다. 논자는 추상 자체가 주관적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문덕수의 시들이 보여주는 추상과 구상의 세계가 편 편마다의 특성에 따라 至純을 향한 지향성과 至美의 심미성, 밀도 높은 현장성을 가진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미술이론의 토대 위에 ‘문학’이라는 덩어리를 옮겨놓기가 힘겨웠으므로 일독에 이르기가 어려웠을 뿐 재독 삼독에 이르면 우주의 원리에 입각한 모더니즘의 조형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것이 논자에게도 ‘추상’이라는 주관성에 발이 빠진 결과가 아니기를 바란다.
4. 결론
본고는 문덕수의 초기 시에 사용된 시어의 변이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시세계가 하나의 흐름을 가질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 흐름에 맞게 시들을 읽어보고자 하였다. 그는 내부에서 들끓는 실존의 문제를 초극하고자 노력하지만 시 쓰기의 방법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는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았다. 결국 문덕수의 시들은 시 쓰기의 본질에 닿으려는 열망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되고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황홀』에서 그는 전쟁체험을 직시하면서 실존문제를 현상학적으로 재현하려 했지만 언어들은 실재에 닿지 못하는 재현의 기호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한다. 직시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던 기대는 사라졌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아픔이 남아있었다. 그가 다시 도전한 것은 추상의 세계였다. 칸딘스키의 추상주의 미술의 원리를 원용하여 점, 선, 면이라는 물성의 형태적 근간을 제2체계의 시어로 받아들이고 이 시어들을 활용하여 제2시집 『선 공간』을 상재한다. 추상의 세계에 이르러 그는 가장 순수한 세계, 일원화된 초현실의 경지에 도달한다. 『황홀』에서 얻지 못한 황홀을 『선 공간』에서 만나지만, 추상의 극지에는 우주의 근간을 표현하는 용어가 극히 제한적이므로 그는 다시 구체성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구체적인 낱낱의 사건으로 실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표현하는 구상들은 추상의 하위개념들로서 이원화된 세계를 보여준다. 갈등과 대립은 주체와 객체, 너와 나로 존재하는 이원화의 세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점은 잠재성을 갖는 이미지다. 양면성을 갖는 온갖 속성들이 내재되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면 존재성을 상실한다. 점은 긍정 또는 부정의 세계를 이끌어낼 수 있는 축적된 힘으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선은 역동성을 갖는 이미지다. 간결한 표상이지만 일상의 행위의 모든 동력은 선으로 상징되고 있다. 문덕수는 「선에 관한 소묘」2 · 3에서 자족할 수 있는 시세계를 만나다. 고도의 추상이 갖는 상징성을 살려 환상의 세계에 도달하며 여기에서 그는 초현실의 자아를 만나게 된다. 원은 온전성을 담보하는 이미지다. 원의 세계는 근본적인 것이며 충실성에 의해 구현되는 온전한 세계다. 그의 아픔은 우주나 지구와 같은 동그란 알의 세계가 깨지는 곳에서 온다. 그는 원의 속성을 지니는 세계가 문명사회의 실체이기를 바란다. 그가 우주적 진실을 목도하며 초현실의 경이를 경험하는 것도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때이다.
본고가 탐구하려는 문덕수 초기시에 사용된 시어의 변이는 시인의 의식, 무의식으로 채워졌던 내면세계에서 선별되거나, 추상화되고, 다시 구상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문명사회의 근원적인 것을 지향하는 그의 시정신은 여전히 이어져간다. 독특한 시작법의 특수성으로 하여 독자성을 가지면서 문덕수 시세계의 전체성으로 용해되지 못하던 「선에 관한 소묘」 연작시들이 문덕수 시세계의 통합된 흐름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빛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