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불교 철학이 인도유럽어족의 철학처럼 자연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철학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인도의 힌두교 철학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인도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힌두교 또한 자연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는 걸까요? 사실 앞서 이야기한 슈뢰딩거를 포함해서 여러 현대물리학자들 중에서는 힌두교,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이 많았는데, 결국 자연을 대상화하는 인도유럽어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bc 1500년경 인도 유럽어(아리안)족은 인도에 침입하여 강고한 신분지배체제 카스트제도를 확립하고 지배이념의 종교인 브라만교를 만들었습니다. 브라만교는 자연질서의 이성적 법칙, 진리인 다르마를 신봉했어요. 하늘의 범신 브라만은 다르마의 구현자이고 인간의 영혼 아트만은 다르마를 품은 존재입니다. 브라만과 아트만의 일치, 합일을 추구했습니다. 다르마에 적합하게 살면 선한 업보 카르마를 쌓고 다르마를 거스리며 살면 악한 업보 카르마를 쌓는다고 보았지요. 선한 업보를 쌓으면 복을 받고 좋은 고귀한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고 악한 업보를 쌓으면 불행해지고 나쁜 천한 신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성적 법도에 따른 인과응보사상을 인도인들에게 주입시켰습니다. 지배종교로서 브라만교는 희생제사와 제사의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석가는 bc 6세기 경 브라만교의 카스트제도와 제사의식과 형식 절차를 부정하고 매우 지성적인 깨달음의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불교도 다르마와 카르마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나 연기설에 의해서 사물의 자성(自性)과 인간의 영혼 아트만의 실체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엘리트 지식인 종교로서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불교는 왕족과 상인들의 지지로 발달했으나 왕족과 상인들의 지지가 사라지자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ad 5세기 이후 브라만교를 대중화한 힌두교가 생겨났습니다. 힌두교도 진리, 법을 뜻하는 다르마와 인과응보를 뜻하는 카르마, 그에 따른 카스트제도를 정당화하는 가르침을 핵심 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르마를 따라 선업 카르마를 쌓지 못한 인간은 천하고 더럽다는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존중하는 인도 원주민의 전통종교를 받아들여 수많은 신들과 신상들을 숭배했지요. 힌두교는 인도 유럽어족의 이성적 법칙적 사고,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사고를 지녔으면서 생의 욕망과 감정을 중시하는 대중적 신앙체계를 확립했습니다.
질문2) 히브리적 기독교가 생명철학적 사상이라고 하셨는데, 성경의 신약과 구약이 바탕으로 하는 문명과 신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생명에 대한 관점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구약과 신약은 모두 인간의 삶과 역사를 깊이 반영하는 신앙과 사상의 체계를 확립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생명과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구약에서 ‘나는 나다!’의 하나님 야훼는 인간을 제국주의국가들의 억압과 종살이에서 해방하는 신이고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로 다스리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국가들의 억압과 수탈로 고통당하던 유대인들은 제국주의에 물들어 ‘나는 나다!’의 신 야훼를 이방인을 공격하고 배척하고 죽이는 부족국가의 신 여호와로 변질시켰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담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목적은 인간의 생명을 살리고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행하면 축복을 받고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저주와 파멸에 이른다는 율법주의 신앙에 빠졌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높이는 신앙이 율법적 인과응보의 신앙으로 전락했습니다. 정결법이 발달하여 법규를 지키면 깨끗하고 지키지 못하면 더럽다는 종교적 신앙이 발달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을 당하며 불행에 빠진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이고 더러운 사람이라는 종교적 편견이 널리 퍼졌습니다.
구약에서 이사야 53장 ‘고난의 종’ 이야기, 욥기, 예레미야서는 모두 율법주의적 인과응보 신앙을 깨트리고 인간의 생명을 살리고 키우는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는 경전들입니다. 예수시대에는 율법학자들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들이 율법적 인과응보 신앙과 정결법을 대변하여 가난한 민중을 더러운 죄인으로 낙인찍고 멀리 했습니다. 예수는 율법적 인과응보 신앙과 정결법 관행을 비판하고, 가난한 민중을 해방하고 살리고 높이는 야훼 신앙을 회복하고 신의 사랑과 정의로 다스리는 하늘나라를 가난하고 고통받는 민중들 사이에 실현했습니다. 예수는 스스로 가난하고 더러운 죄인들의 친구로 오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한 바울도 율법을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율법적 인과응보 신앙을 깨트리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생명의 복음을 밝히 드러냈습니다. 예수의 하늘나라 복음이나 바울의 믿음으로만의 신앙은 생명의 본성과 목적을 실현하는 생명철학적 복음이고 신앙입니다.(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박재순 ‘기독교를 위한 옹호: 국가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 문명을 닦아낼 한민족의 자격과 기독교의 사명’ 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나눔사 2022)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질문3) 우리 옛 조상이 동쪽을 향해 오면서 하늘을 우러르는 과정에서 생명사랑을 길러왔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하늘을 쳐다보기도 어려운 시대에, 땅만 쳐다보며 살아가기 십상인것 같습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생명사랑을 기르고 생명철학을 갈고 닦을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돈과 기계가 지배하는 물질론과 기계론에서 벗어나야 생명사랑을 기르고 생명철학을 갈고 닦을 방법이 보일 겁니다. 산업기술사회의 톱니바퀴 속에서 기계사회의 부품이 되지 않고 생명과 정신의 주인과 주체로 살려면 하루에 반 시간만이라도 자신의 생명과 정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홀로 자신의 몸, 맘, 얼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홀로 고요하게 명상을 해도 좋고 아무 목적과 의무를 생각하지 말고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기도나 명상을 하다보면 늘 새로운 생각과 느낌, 깨달음이 생겨납니다. 산책을 하다보면 나도 자연환경도 사물도 길거리도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므로 산책을 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슨 연구를 할 때도 고정된 것, 죽은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나와 대상이 서로 주체로서 새롭게 드러나고 새롭게 만날 것을 기대하며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생명과 정신을 가진 존재이므로 내 안에서 그리고 내가 만나고 접촉하는 모든 관계에서 새로운 것이 새로운 느낌과 깨달음이 주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