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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촌(老村) 이구영 (李九榮)선생 8주기에
그의 몸은 자그맣다. 그러나 그 몸이 껴안아온 세월과 세상은 엄청나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이 남자의 몸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조선 봉 건사회, 일제 식민사회, 6·25전쟁, 사회주의사회, 20여년의 감옥사회, 그리고 80·90년대의 자본주의사회를 그는 꿰뚫어왔다.
노촌(老村) 이구영(, 1920년 ~ 2006년 10월 20일). 그가 써내려가는 이력서의 한칸, 한마디마다 살 을 에는 시대의 삭풍이 휘몰아친다. 험악하고 사나운 역사의 수레바퀴가 웬만큼 지나간 지금, 그는 “잘못 살았다는 느낌은 없다”고 했다.
그는 연안이씨로서 문장가 월사 이정귀의 후손으로 부친 이주승과 작은아버지 이조승은 구한말 의병활동에 참여해 의병장들인 이강년과 유인석의 비서를 각각 지낸 전력이 있다.
그는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의 제자였으며, 일제 당시인 1943년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구영은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연암 박지원 등 실학사상을 강의하였다.
1950년 9월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1958년 7월 부산에서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접선에 실패하여 9월에 체포되었는데, 그를 체포한 경찰은 일제시대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남쪽 감옥에서는 22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는데, 감옥에서 신영복, 심지연 등에게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1980년 출소해 경기 안양시에 이문학회를 창립, 후진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출소 후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과 의병운동사적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2006년 10월 20일 노환으로 경기도 안양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심지연 교수는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 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노촌 이구영 선생의 팔십년 이야기》라는 책을 내었다.
“나보다 더 모르고도 잘 살다 가는 사람이 많은데, 옥에서 지낸 지난 20 여년은 오히려 내가 죄짓는 걸 면하게 해줬다고 봐야죠. 밖에 있었으면 으레 남 부리고, 남 덕에 먹고 살았을 텐데 그 죄 짓는 대신 그걸 깨고 살 수 있게 해줬으니 복이라고 할밖에요.”
김일성대학서 한문을 가르치다
노촌은 1920년 충북 제천군 한수면 북노리에서 연안 이씨 집안의 13대 종 손으로 태어났다. 천석꾼 지주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고, 유서깊은 계통의 학문을 대물림한 그는 부족한 게 없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어느날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몸을 던지게 된다. 신학문을 하러 들 어간 영창학교(대한기독교청년회학교의 후신)에서 사회주의자인 정준섭씨 를 만나 그쪽에 눈을 떴고, 남로당 선전부장을 지낸 김태준씨에게 배우면 서 이른바 ‘주의자’가 된 것이다.
“안다는 게 그렇게 쉬운 얘기가 아니죠. 젊을 때,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 를 좋아했죠. 그는 부잣집 출신으로 진보적 삶을 살았지만 끝내 거기서 벗어나진 못했어요. 그에 비하면 같은 시대를 산 고르키는 깬 사람이었죠 . <외투>나 <어머니>를 보면 그가 지상에서 사람이 살다가면서 꼭 깨달아 야 할 옳음이 뭔지 나오죠. 난 뭔 ‘주의’보다는 사람답게 사는데 조금 이라고 이바지할 수 있으면 헛 산 목숨은 아니라고 봅니다.”
1950년 9월,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올라간 노촌은 전시에 그를 쓰러뜨린 폐결핵 때문에 거의 5년 동안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연암 박 지원의 학문에 훤했던 노촌은 병원 안에 있던 회복학교와 평양의 노동학 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 그가 김일성 앞에서 실학 사상을 강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김일성대학에 가보니 남에서 올라간 애들이 성적이 훨씬 뛰어나. 김대(金大) 교수들이 이게 왜 이러냐 분석해보니 한문을 아느냐 모르느냐 가 관건이야. 그래서 북한에서도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했지. 벽초 홍명희 의 큰아드님 홍기문 등 북의 학자들과도 교류를 해봤지만 남이건 북이건 한문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달라. 동양적 정신이 품고 있는 웅숭깊은 세 계를 서양 학문은 못 따라오지.”
(사진/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 몸에 새겨온 사람. 그는 "잘못 살아온 느낌은 없다"고 했다. )
1958년 그는 중앙당 연락부의 소환을 받고 남파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미 여러 차례 넘나든 그에게 당이 내린 지령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 다. 남으로 온 그는 제대로 활동도 못해보고 부산에서 경찰에 붙들리고 만다.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다, 들어갔다, 나갔다, 그짓 하다가 평생이 다 가 버렸지. 원래 난 양쪽 다 안 믿으니까 뭐라 비교할 수 없지. 자본주의의 소유력은 무시 못하지. 사회주의의 창조력은 대단한 거요. 소련 붕괴는 창조력이 소유력을 못 당해 일어난 일 같아. 어쨌든 난 사회주의니 자본 주의니 그거보다는 고루 함께 잘 사는 사회가 좋아요.”
20여년의 옥살이를 그는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로 보냈다. 75년 대전교도 소에서 만난 신영복(성공회대), 심지연(경남대) 교수들과 한문을 읽었고, 그때 집안 사당에 보관해온 의병기록 1백40여편을 우리 말로 옮겼다. 지 난 93년에 나온 <호서의병사적>은 그때 주춧돌을 놓은 노작이다. 옥에 있 는 형 뒷바라지며, 의병자료들을 어렵게 나르던 아우 이칠영은 그보다 먼 저 죽었다.
“<호서…> 출간은 젊은 세대들에게 사라져가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의병사를 쉬운 말로 널리 읽을 수 있게 해 우리의 민족자주정신과 애국애 족에 기초한 불굴의 민족정신을 고양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요. 요즘 한문 번역은 지금 우리말로 두루뭉술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말 짱 헛거예요. 본 뜻을 충실히 살리는 직역을 해야지. 규장각에 쌓여 있는 자료들을 급한 대로 빨리 번역들을 해야 할 거예요. 좀더 시간이 지나면 그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게 될 텐테….”
한주일 8번쯤 강의… 신영복씨도 제자
허약한 몸이 70년대 초의 무지막지한 강제전향공작을 못견뎌 전향서를 쓴 노촌은 80년 5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안에 있을 때 예측한 것과 전혀 딴 세상이라.” 당혹했던 그는 새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을 알기 위해 젊 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걸 즐긴다. 피해가는 학생을 불러 앉혀놓고 대화할 때도 많다. 그가 이끌어가고 있는 이문학회(以文學會·02-739-8262)는 남 녀노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대화의 광장이자 현대판 서당이다. <논어> 에 나오는 “以文會友(글로써 벗을 모으고)하고, 以友補仁(벗으로써 인을 돕는다)이라”에서 따온 학회 이름은 수백명의 제자들을 배출한 노촌의 깊은 뜻을 읽게 한다.
요즘은 일주일에 8번쯤 한문 강의를 한다. 알음알음으로 노선생님을 찾는 학생들은 가지가지다. 신경림 시인이 창립 멤버였던 목요회를 비롯해 감 옥동지인 신영복씨의 친구모임, 화론을 읽는 화가들, 초서를 읽는 주부들 , 각 대학의 한국학 석·박사생들, 문인들, 수녀까지 그는 단 한 사람도 내치지 않고 다 품어안았다. 한글학자인 박용수씨가 그의 양아들 같은 신 동학(성균관대 한문학과 4학년)씨를 “가서 돌아가시면 제사 모실 생각하 고 배워라”고 보낼 정도였다. “학교에서 4년 한 것보다 지난 두달 동안 선생님께 배운 것이 더 많아요. 단순 번역이 아니라 원리를 깨우쳐 주시 는 데다 역사적인 고증, 구절구절에 서린 정신사적 배경을 함께 얘기해주 시니까 감화랄까, 마음으로부터 배우게 되지요.” 신씨의 얘기다.
신정복은 "산정에 배를 매고"라는 글에서 노촌선생에대해 글을 썼다.
나는 이 책의 원고를 읽고 참으로 깊은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노촌 이구영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나 뵌 곳이 바로 옥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속에 술회되고 있는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들은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춥고 긴 겨울밤 옥방에서 간간이 들었던 이야기들이 많다. 자연 그 시절의 옥방에서 다시 선생님을 만나 뵙는 느낌이 든다.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그리워지는 시절이기도 하다. 잔잔한 목소리와 정확한 기억으로 정연하게 들려주시던 모습이 다시 회상된다. 생각하면 노촌 선생님과 한 방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나는 대전교도소에서 노촌 이구영선생님과 한 감방에서 4년 넘게 함께 생활하였다. 당시 대전시 중촌동에 있었던 구 대전교도소 2사하 25방이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채 4평이 못되는 방에서 여러사람이 함께 지냈다. 이 책을 쓴 심지연교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 시절 함께 있었던 면면들이 다시 선연히 떠오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리 오래지 않아 떠나갔다. 노촌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무기징역 형을 살고 있던 나는 1980년 노촌 선생님의 출소 때까지 함께 있었다. 가장 오래 같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노촌 선생님께서도 평생동안 가장 오래 한방에서 지낸 사람으로 나를 자주 이야기하시기도 하셨다. 그 파란 만장한 생애를 영위해 오시는 동안 가족들과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하루 24시간을 무릎 맞대고 지낸 4년은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 4년 속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와 사건이 담겨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에 노촌선생님으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었던 귀중한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놓진 아쉬움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나는 노촌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한 애정을 받으며 그 엄혹한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비교적 젊은 나이로 징역살이를 하였던 우리들에 비하여 회갑을 그 속에서 맞으셨던 노촌선생님으로서는 우리가 돕기는커녕 미처 짐작하지도 못한 숱한 어려움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지금에야 그것을 느끼다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 책의 출간에도 미력을 더하지 못한 송구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 뛰어난 학문적 진경을 보이고 있는 심지연교수가 어려운 작업을 맡아서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사람의 일생이 정직한가 정직하지 않은가를 준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그 사람의 일생에 그 시대가 얼마나 담겨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시대를 비켜간 일생을 정직하다고 할 수 없으며 하물며 시대를 역이용하여 자신을 높여 간 삶이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 인생의 정직성은 그 사람의 인생에 담겨 있는 시대의 량(量)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촌 선생님의 삶은 참으로 정직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조선봉건 사회, 일제하 식민지 사회,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이다. 더구나 그 긴 세월의 가장 아픈 곳을 몸소 찾아가 동참한 삶이었다. 현대사의 가장 첨예한 모순의 현장에서 일구어 온 참으로 드물고 정직한 삶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노촌 선생님과의 생활을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까닭을 여기에 모두 술회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나자신을 여러 각도에서 깨닫게 한 시절이었다. 선생님의 삶이 보여주는 진솔함과 정직함은 무언의 교사임은 물론이다. 그 위에 지금도 선생님을 기억하고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선생님의 은은한 삶의 자세이다. 우선 다른 사람의 처지와 생각을 지극히 존중하는 자세이다. 비록 틀린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 주장의 부분적인 타당성을 읽어 내고 그것을 인정하기에 조금도 인색함이 없다. 불가피하게 반대되는 견해를 밝히지 않을 수 없거나 그 주장의 허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도 언제나 맞춤한 때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개진하는 편이다. 맞춤한 때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논리적인 무리를 내심 자각하거나 자각하도록 유도한 연후에 그를 도우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당신 당신 자신의 작은 실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정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엄정함은 대체로 절제(節制)로 나타났다고 기억된다. 언어를 절제하고 주장을 절제하고 심지어는 아픔과 고령(高齡)까지를 절제함으로써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이 되는 것을 삼가고 스스로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으려고 하셨다. 자신의 존재를 키우려 하는 우리들을 반성하게 하는 무서운 교훈이기도 하였다.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따뜻이 하고 자신을 갖기는 추상처럼 엄정히 한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생활철학이기도 하고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는 대중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는 대체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노촌 선생님의 존재는 따뜻하기가 봄볕 같았다는 기억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연암은 선비(士)의 마음(心)이 곧 뜻(志)라고 하였으나 나는 노촌 선생님께서 범사에 속깊이 간직하고 계시는 뜻과 그 뜻을 풀어내는 유연함에서 선비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대중성과 예술성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깨닫는 일이지만 노촌 선생님의 잔잔하면서도 유장한 이야기 속에 절절히 배어 있는 사연들은 어느것 하나 당대의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의 한가지를 예로 들자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선생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 없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키는 등 해방정국의 부조리를 이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노촌 선생님을 비롯하여 근현대사를 핍진하게 겪어 오신 분들의 이야기는 역사를 과거의 사실로 치부하던 우리의 관념적인 사고를 반성케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책에서 술회하시는 노촌 선생님의 이야기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과거의 화석같은 존재로부터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살아 있는 실체로 복원하고 생환하는 일이야말로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우는 자세일 것이다. 역사를 생환하고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그 시절을 정직하게 맞서서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질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노촌 선생님이 이 책으로 여러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 참으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열어 저마다 역사를 생환하도록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노촌 선생님께서는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되어 오던 의병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셨고 그 초고가 출소하신 후인 1993년 10월에 <湖西義兵事蹟>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노촌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외람되게도 책의 서문에 글을 실었다. 그 글의 일 절을 소개한다.
"필자는 그 시절 노촌 선생님과 한 방에서 이 책의 번역일을 도왔다. 도와 드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선생님의 과분하신 훈도와 애정을 입었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노촌 선생님께서는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심원한 한학의 온축과 확고한 사관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서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선비의 기개로 해방 전후의 격동을 온몸으로 겪어 오신 분이다.'
노촌 선생님은 내게 또한 서도의 정신을 일깨워 주신 분이다. 함께 서도반에서 글씨를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은 글씨를 모른다고 겸양하시지만 나는 지금껏 많은 글씨를 보아 오면서도 항상 노촌 선생님의 글씨를 잊지 못하고 있다. 노촌 선생님의 글씨는 학문과 인격과 서예에 대한 높은 안목이 하나로 어우러져 이루어 내는 경지를 보여준다. 서권기(書券氣) 문자향(文字香)에 더하여 역사와 인간에 바치는 애정이 무르녹아 있다. 이는 분명 서예 이상의 것이다. 붓글씨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선생님으로 하여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 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내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선생님의 체취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 놓는 장소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 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본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한다. 1998년 4월 신 영 복. (성공회 교수)
이문학회와 함께 노촌의 연구실에 붙어 있는 또하나의 간판은 의병정신선 양회. 그는 제대로 된 의병사 집필을 삶의 마지막 임무이자 희망으로 가 슴에 담고 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봤지만 또 한번 그저 지나가는가부다 해야지. 의병들이 보여준 구국애족의 혈사는 한민족이 길이 기리고 되새겨야 할 한민족의 고귀한 정화입니다.”
악독한 일제의 압제하에서도 국내에서 홀로 투쟁해오신 구국정신은 당시 국내에서 일제의 압박에 헤매이던 연안이씨의 유일한 상징적 인물로 추앙되는 분이시기로 다시금 을미년 새해를 맞아 자료를 찾아 보앗습니다, 이제 이념의 벽이 무너진 지금 오로지 얀안이씨로서의 기상을 잃지 않으신 정신에 젊은 감명을 얻습니다
선생의 서예첩에는 ‘이산가족 재회를 기원하며’라는 한시가 있었다. “이산 가족이 만나게 될 그날은 언제, 봄 가고 여름 가고 또 해가 가네/동서는 해빙이라 새로운 길 열리건만 남북은 작은 일로 옛 싸움 티격태격/나비는 미친 듯 날아 꽃잎은 떨어지고 나는 꾀꼬리는 버들가지 사이에서 쉬지 못해/백발이 된 부모형제는 지금 어디서 밤마다 그리워 잠 못 이루네”
서예가 김영복은 다음과같은 글을 인터넷에 올려 노촌선생의 손길이 어리는 느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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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륙 년 전쯤에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1920-2006)선생님을 모시고 댁에 전해오는 장서(藏書)를 구경하다 청장관 이덕무(靑莊館 李德懋;1741-1793)와 그의 아들 이광규(李光葵;1765-1817), 손자 오주 이규경 (五洲 李圭景;1788-1856)의 친필 원고본 십여 종 20여 책을 구경하고 수불석권하였다. 이 책들은 거의 작은 중국책을 연상시키는 손 바닥 만한 책으로 손때가 묻어 책을 잡은 느낌이 옛 친구의 손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다수 이덕무의 책이었고, 이광규는 한 종류, 이규경이 두 종류였다. 모두 책을 출판하기 위해 깨끗이 정서한 판하본(板下本) 용으로 정리한 것으로 느껴졌다. 한참 후에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이문학회(以文學會)에 갔더니 이 책을 꺼내와 저에게 보이시면서 책은 꼭 볼 사람이 가져야 한다면서 굳이 제게 주신다. 이 책은 제가 한참을 가지고 있다가 개인이 가지고 있을 책이 아니라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보관해야 마땅하다고 여겨, 선생님께 상의하여 지금은 어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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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산가족 재회를 기원하며’라는 한시 -이구영-
이산 가족이 만나게 될 그날은
언제, 봄 가고 여름 가고 또 해가 가네/
동서는 해빙이라 새로운 길 열리건만
남북은 작은 일로 옛 싸움 티격태격/
나비는 미친 듯 날아 꽃잎은 떨어지고
나는 꾀꼬리는 버들가지 사이에서 쉬지 못해/
백발이 된 부모형제는 지금 어디서
밤마다 그리워 잠 못 이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