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宿淸風寒碧樓 청풍 한벽루에서 묵다
半生堪愧北山靈 살아온 반평생 산수를 등진 게 부끄러운데
一枕邯鄲久未醒 베개 하나 허무한 꿈 아직 깨지 못했다네
薄暮客程催馹騎 저물녘이라 나그네 발걸음 역말을 재촉하다가
淸宵仙館對雲屛 맑은 밤 신선 사는 집에서 높은 산 마주했네
重遊勝地如乘鶴 명승지에 다시 오니 마치 학을 탄 듯하고
欲和佳篇類點螢 시에 화운하니 옷에 반디 박힌 듯 어색하네.
杜宇聲聲何所訴 두견새는 소리마다 하소연이 무엇인가
梨花如雪暗空庭 흰 눈 같은 배꽃이 빈 뜨락을 덮고 있네.
<原詩 : 《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一》. 譯註 : 권갑현.2020. 1. .>
퇴계선생께서 42세(중종37,1542년)때 홍문관 부교리로 재직 중 3.19.에 충청도 구황적간어사救荒摘奸御使로 임명되어 경기도 용인, 평택, 충청도 아산, 신창, 덕산, 면천, 당진, 서산, 태안, 해미, 홍주, 예산, 온양, 전의, 공주, 연기, 충주, 문의, 옥천, 청천, 청안, 괴산, 연풍을 거쳐 3.28. 청풍 한벽루 응청각凝淸閣에서 숙박하며 지은 詩이다. 다시 3.29. 제천, 충주, 음성, 진천, 목천, 천안, 직산, 경기도 진위, 용인, 과천을 거쳐 4.4.에 귀경하여 4.6.에 충청도 지방의 검찰 결과를 복명하였다.
한벽루는 1317년(충숙왕 4) 승려 청공이 왕사가 되고,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누각 위에 있는 중수기에 "崇禎甲戌九月日賓山翁李埈記"라는 발기가 있어 1634년(인조 12)에 개창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900년 보수한 것이 1972년 홍수로 무너져 1975년 복원했는데 충주 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해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의 평면구조는 앞면 4칸, 옆면 3칸이며 단층팔작지붕이다.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다락의 마루를 결구한 뒤 주위에 계자난간을 돌렸으며, 그 위에 사각형 기둥을 얹고 다시 그 위에 8각기둥을 세워 상부를 가구했다. 공포는 익공계이면서도 주심포가 절충되어 있기 때문에 장화반 대신에 따로 만든 화반을 설치했다. 다락집 형태의 익랑을 부설한 것이 특이한데 일종의 복도와 같은 형상이다. 즉 사다리를 타고 익랑에 오른 다음 익랑을 거쳐 가도록되어 있다. 이 익랑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함께 익랑이 있는 조선시대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보물 제528호(1971.1.8.지정)로 관리되고 있다.
시판은 2020.2.27.에 걸었다. 이경규(1947년생, 거 안동)가 쓰고, 이정환(1946년생, 거 대구)이 새겼다. 이날 같은 제목의 서애선생 시판도 걸었다. 서애선생 시는 1593년 6월 합천에서 명나라 지원군과 함께 왜적과 전쟁 중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행재소로 가던 길에 한벽루에 묵으며 지은 시이다.
한벽루는 남쪽 지방에서 서울을 오고가는 길목에 있고 경치가 좋아서 많은 시인묵객들이 묵거나 유람을 하던 명승이었다. 시를 비롯한 많은 기록들이 여러 문헌에 흩어져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모아 편집하고 시판 등을 제작하여 루에 걸어두면 탐방객의 볼거리 뿐 아니라 루의 가치를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 분명하므로 제천시 문화관광을 더욱 빛낼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