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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에 오르면 한강 줄기와 그 너머 옛 한성백제 성터가 내려다 보인다.
2019년 12월 15일 일요일 아차산
나홀로
산행코스 : 광진교 – 워커힐 – 용마산 갈림길 – 대성암 – 고구려 대장간 – 광진교
산행거리 : 약 7.6 km 산행시간 : 약 4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827459
거리 7.6 km
소요 시간 4h 16m 52s
이동 시간 3h 17m 49s
휴식 시간 59m 3s
평균 속도 2.3 km/h
최고점 306 m
총 획득고도 240 m
난이도 매우 쉬움
아깝게 흘러가는 시간을 금쪽같다고 한다. 아직 지구상에서 제일 비싼 광물인 금 조각에 비유한 것이다. 살아가면서 마냥 허투로 쓰는 시간이야 있겠냐마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보람있게 사는지 아니면 허무하게 사는지 가름하게 된다. 일상적으로 아침에 일어나 밥먹고 회사가서 일하고 퇴근해서 좀 쉬다가 잠자는 게 하루 일과이다 보니 어디 따로 허투로 쓸 시간도 없는 생활이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이 다 비슷비슷하다.
거기서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산다면 퇴근 후 잠자기 전까지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그리고 회사에 가지 않는 주말이나 공휴일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 차이를 가져온다고 볼 수 있겠다. 하루 일과에 지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워 습관적으로 티비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다 스르르 눈을 감고 잠들어 버릴 수도 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이나 걷기를 하다가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주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사는것이 잘 사는 것인지 또 보람있게 사는 것인지 가끔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풍납토성은 백제가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기 이전의 한성백제 성터라고 한다.
싱가폴에 다녀온 후 사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어수선하게 지냈다. 귀국 후 전화로 엄니에게 안부인사를 했을 때는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월요일 퇴근 후에 전화를 드리니 잘 들리지 않는지 힘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큰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니가 편챦으셔서 유구에 나왔다고 한다. 토하고 설사하고 기운이 없어 몸을 떨고 계시다고. 열은 없다고 한다. 식사도 못하고 영양분이 들어 있는 대체식품인 뉴케어도 못마시겠다 한다. 대략 난감하다. 밤 열시 넘어서 빨리 내려오면 좋겠다고 한다. 잠시 후 조카 은원이가 전화한다. 119를 부르라 한다. 이제까지 119를 부른 적이 없어 대신 불러달라 부탁하고 예산에 사는 작은 누나에게 전화해서 예산 병원 주소를 알려달라 하니 조금 기다려 보라 한다. 지금 엄니집에 도착했는데 조금만 더 지켜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그렇게 어수선한 마음으로 밤을 보냈다.
얼마전 허리통증을 호소하여 병원에서 심한 골다공증 진단을 받고 소위 콘크리트 시술을 하고서야 비로소 통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며칠간 입원하여 있으면서 자꾸 집에 가자 보채시는 통에 퇴원하여 집에 며칠 계셨는데 아마 신체적으로 너무 고통을 많이 받아 기력이 쇠하셨다. 가뜩이나 식사를 못하시던데다 기력이 떨어지니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에서 며칠간 지내셨나보다.
광진교(廣津橋) - 너븐나루다리
이튿날인 화요일 출근하는데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려오고 있느냐고 묻는다. 회사에서 간단하게 일 좀 처리하고 가겠다 하고 사무실에 와서 이메일 체크하고 하루 연차를 받았다. 내려가는 동안에도 몇 번 전화를 받고 12시쯤 되어 유구에 도착했다. 왠 일이냐고 놀랜다. 노는 날도 아닌데 어떻게 내려왔냐고. 마음이 조금 안정된 모양이다.
앉았다가 눕는것도 힘들어 하신다. 손도 떨리고 머리도 흔들린다.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가끔 웃기도 하는 걸 보니 조금 안심이 된다. 집에 산소호흡기를 두면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도 의사가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에 입원했던 예산 종합병원으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으니 배에 이상은 없다 한다. 4시간 동안 영양제 주사를 맞았다. 다시 큰 누나집에 모시고 가니 많이 좋아지셨다. 내가 예상했듯이 며칠간 제대로 드시지 못해 생긴 현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뒤에 형이 내려가서 큰 누나집에 머물며 간호하고 또 동생이 내려가서 보살펴 드리니 이젠 식사도 조금씩 하고 뉴케어도 드신다 한다. 이제 기운이 회복되면 요양병원으로 모실 생각이다. 몇 군데 알아보았는데 시설이 괜챦은 곳으로 정하겠다 한다.
토요일엔 집에서 사진 정리를 하고 여행기를 쓰면서 보냈다. 유구에 다녀와도 좋겠지만 동생이 내려가 있으니 나는 겹치지 않도록 성탄절에 내려가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일요일엔 가까운 산에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늑장 부리다 느즈막히 제일 만만한 아차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집에서 빤히 보이고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이 있으면서 일 년에 한 두 번쯤 찾아가는 산이다. 배낭에 빵 한 봉지, 사과 두 개, 물 한 병을 담았다. 날씨가 쾌청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산행하기에 정당하다.
광진교를 건넌다. 이렇게 걸어서 다리를 건너는 것은 아마 두 번째인가보다. 차를 타고 가는 것과 자전거를 타고 건너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걸어가니 더욱 기분이 상쾌하다. 느릴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다리 초입에 도미부인 동상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도미 부인상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도미부인 설화
도미는 가난한 평민이었으나 의리를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 아내는 아름답고 행실이 곧아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를 듣고 도미의 아내를 탐냈다. 그는 도미를 불러다가 "부인의 덕은 정절이 제일이지만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도미는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지만 신의 아내 같은 사람은 죽더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아내에 대해 확신을 보였다. 이를 시험하기 위해 개루왕은 도미를 잡아두고 가까운 신하를 왕으로 꾸민 후, 도미의 아내에게 보내 "도미와의 내기에서 이겨 너를 궁녀로 삼게 되었으니 너는 내 것이다"라고 속였다. 이에 도미의 아내는 몸종을 자기처럼 단장시켜 들여보내 왕의 일방적인 횡포에 맞섰다. 그뒤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되자 화가 난 개루왕은 도미의 두 눈을 뺀 다음 멀리 보내버리고, 도미의 아내를 범하려 했다.
도미의 아내는 몸을 씻고 오겠다며 궁을 탈출했으나 강가에 이르러 더이상 갈 수가 없자 하늘을 우러러 크게 울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조각배 한 척이 밀려왔다. 올라타니 배가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렀는데, 눈먼 도미가 거기에 살아 있었다. 극적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갖은 어려움 끝에 고구려 땅에 도착해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왕이 천한 백성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 실패했다는 것이 사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지배자의 일방적인 횡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하층민의 의지를 표현했다고 보면, 이 설화에는 뜻하는 바가 긴박감있게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광진교는 1936년 9월 일제시대에 건설되었으나 1950년 북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폭파되었던 것을 1952년 미군에 의해 복구되었다. 다리가 노후되어 1994년 철거되었고 다시 2003년 11월에 재건하였다. 지금은 자전거 도로와 조경까지 더해져 자동차 및 도보로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었다.
광진교가 없었을 때 그러니까 1936년 이전에는 어떻게 한강을 건너 다녔을까? 이 광진교는 두 번째 한강다리다. 그 이전의 교통수단은 배다. 배를 타고 내리던 곳이 광나루 즉 강 폭이 넓은 곳에 위치한 나루로서 우리말로 너븐나루라고 불렀다 한다.
광진교 위에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아차산이 올려다 보인다.
아차산과 워커힐 호텔
멀리 강건너 언덕에 워커힐 호텔을 바라보며 강을 건넌다. 광진교 북단에는 한강 호텔이라는 오래된 호텔이 있는데 그 입구가 마치 절로 들어가는 일주문처럼 생겼다. 그 앞에는 해태상인지 돌로 만든 석상이 문 양쪽에 떡 버티고 서서 호텔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듯하다. 그런데 문 앞 화단 한 켠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데 폐업공고다. 1963년에 문을 열고 56년간 영업을 해왔으나 근래 들어 영업이 부진하여 문을 닫는다고 한다. 1963년이면 내가 태어나고 몇 해 안되는 때였으니 꽤 오래된 호텔이다. 그 때는 주변에 아파트도 없었을테고 저 위에 있는 워커힐 호텔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묵어갈 수 있는 대체 호텔로 손님들이 차고 넘쳤을 법하다.
한강호텔이 영업부진으로 폐업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다.
골목길을 걸어 워커힐 쪽으로 향한다. 얼마전만 해도 쉐라톤 워커힐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그냥 워커힐(Walker Hill)이라고만 적혀 있다. 나는 예전부터 이 호텔 이름의 유래가 궁금했다. Worker 라고 쓰고 일하는 사람들이 묵었다 가라고 지은 것인가 하는 우매한 상상을 했다. 아니면 Walker라고 쓰고 이 아차산 산책하길 위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은 것인가 하는 좀 더 낭만적인 생각도 해 보았다. 요즘은 인터넷에 다 나와 있으니 그런 이름의 유래는 금방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던 미군들이 마땅한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박정희가 1961년 이곳에 호텔을 짓게 하고 한국에 주둔한 미 8 군 첫 번째 사령관이었던 해리스 월튼 워커 중장(사후에 대장으로 추서됨)의 이름을 따서 호텔 이름을 지었다 한다. 워커 중장은 1950년 12월 교통사고를 당하여 사망하였다고 한다. 워커힐의 다른 건물 이름도 미군 사령관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하니 이 호텔은 주한 미군들을 위해서 지은 것이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워커힐 호텔로 올라가는 입구
샛길로 조금 올라가니 명월관이 나온다.
호텔로 올라가는 길 왼편으로 작은 길이 숲 속으로 나 있기에 아차산으로 오르는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따라가니 명월관(明月館)이라는 한옥 형태로 된 건물이 나타난다. 워커힐 호텔에 속해 있는 한식당이다. 다시 길을 건너 나무 계단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올라간다. 이제 나무가 제법 큰 것이어서 숲 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막다른 곳 언덕 꼭데기에 큰 건물이 우뚝 서 이 있다. 건물 모양이 특이하다. 그 꼭데기에는 주황색으로 Pizza Hill 이락 써 있는데 언뜻 보기에 Pizza Hut으로 착각할 수 있다. 피자 체인점인 피자헛의 본사가 여기에 있는건가 하고 자세히 보니 Pizza Hill 이라고 써 있다. 1963년 힐틀호텔이 개관된 해에 문을 연 이 건물은 처음에는 힐탑 바 (Hilltop bar)로 술집이었는데 1970년 선경이 호텔을 인수하면서 피자 식당인 Pizza Hill로 바꿨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피자집인가? 1970년 문을 열었다는 Pizza Hill
워커힐 호텔
아차산에 오르기로 했지만 급할 것도 없고 서두를 일도 아니니 여유 있게 둘러본다. 하지만 호텔쪽 숲은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호텔의 부속건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안전과 보안이 요구되는 손님들이 장기간 거주하는 목적으로 사용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아차산 봉우리 중에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이 동남쪽은 워커힐 호텔이 독점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아스팔트 포도를 따라 아차산 입구쪽으로 내려가다가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는 곳에 이르러 오른쪽 산길을 따라 들어간다.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닌 길은 풀도 자라지 못할 만큼 반지란질하다. 서울에 바로 근접해 있으면서 한강을 볼 수 있고 또 산이 낮아 쉽게 오를 수 있으니 주말만 되면 단체 산행팀이나 나처럼 홀로 다니는 산객들까지 모두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룬다. 대부분 걸음이 느린 노인분들이 많다.
아차산 순환도로
호텔쪽은 산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산으로 오를 수 있다.
아차산은 고구려의 보루가 있는 산이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마다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기와로 집을 짓고 물을 담아두는 저수조를 만들었다. 발굴 과정에서 토기와 기와와 호미 등 생활용품도 나오고 각종 투구와 칼 등 무기가 나왔다 한다. 고구려는 한강 이북을 경계로 그 남쪽에 있는 백제와 신라를 견제했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아차산에서 광나루 너머는 한성백제의 토성이 있었으니 적의 수도가 바로 코앞이다. 남한강 상류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을 터이다. 신라는 한강을 이용하여 당나라와 교류하였다 하니 고구려군은 이들 신라와 백제의 선박들이 한강을 왕래하는 것을 감시했다는 말인가? 그 세 나라는 상호 별다른 충돌없이 이 한강을 공유하였는가? 지금 남북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비추어보면 1500 년 전 고구려 백제 신라가 경계로 삼고 있었던 이 한강의 모습은 상상이 안간다.
아차산성 발굴 사진
발굴 유물
아차산성에는 여러개의 보루가 있다.
어쩌면 이 세 나라는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는 한 간섭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였을 것이다. 마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남북을 가르던 38선보다도 더 느슨한 경계였을지도 모른다. 물을 길으러 한강으로 내려간 고구려 군사가 한강 한가운데를 유유히 지나가는 신라의 선박을 보면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을까? 선박에 타고 있던 신라 사람이 물뜨러 내려온 고구려 군사를 보고 과일이라도 던져주었을까? 역시 어색하다. 연일 험한 말로 가슴을 후벼파는 협박을 주고받고 틈만 보이면 총을 발사할 듯한 일촉즉발의 경계를 짓는 것이 국경이라는 개념에 세뇌되어 있는 내 머리로는 1500 년 전 한강의 모습을 그려볼 수 없다.
아니다. 삼국시대 세 나라의 국경 모습이 그리 낭만적이었을리는 없다. 장수왕 63년(475년)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략으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로 인해 백제는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에 의해 한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이 아차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펼치기 이전 백제가 조성하였던 것이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빼앗기고 6세기에는 다시 신라가 차지하는 등 세 나라의 각축전이 벌어졌던 현장이었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남산방면
구리 방면
산으로 오르는 길
도봉산 북한산도 조망된다.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으면서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수시로 소속이 바뀌는 세상에서 단지 지배군주의 명령에 따라서 증오하고 배척하다가 다시 교류하고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김씨면 어떻고 박씨면 또 어떤가. 정치적 신념이 없으면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증오감을 불태우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또 이를 이용하여 감정을 부추기면서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1500년 전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던 아차산을 내려오며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늘 오르내리던 코스와 달리 이번에는 여유있게 다른 길로 내려가려 한다. 이 작은 산에 워커힐 호텔을 제외한 온 산이 여기저기 길이 얽혀 있다. 대성암이라는 절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옛날 의상대사가 수도하던 곳이라는 대성암을 지난다.
보루 위에 산행을 위한 길도 만들어 놓았다.
고구려 대장간이 있다는데 어떻게 생긴것인지 궁금하다. 대장간은 하산길 끝에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한옥과 안전히 다른 모양의 목조건물이다. 지붕은 나무를 켜서 만든 너와집이다. 아차산 제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 대장간을 근거로 하여 재현했다고 하는데 여러가지 형태의 기구와 철제품 등이 신기하다. 특히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에너지를 나무로 만든 톱니바퀴를 통해 기중기 등 동력을 필요로 하는 기구로 전달하는 개념이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 삼국시대 당시에 그런 기구가 활용되었던 것인지 궁금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건물은 지은지 꽤 오래된 듯 보이는데 관리가 소흘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일부러 오래 된 티를 내려고 해서 그런건지 모르지만 너무 낡았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관리를 잘 하면 좋은 관광상품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박물관이다.
대성암
오후 4시 30분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한강변을 따라 내려와 다시 광진교를 건너 귀가했다. 까마득한 옛날로 인식되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가 선뜻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 든다. 1500년 전이면 50대(代) 이전의 시절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전쟁과 평화가 공존했으며 수 많은 애환과 행복이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일제시대를 거쳐 한국전쟁을 겪고 옛날 군사 보루가 세워졌던 산 언덕에 미군을 위무하는 호텔이 건설되었다. 이런 수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도 아무런 표정없이 한강은 옛모습 그대로 유유히 흘러간다. 저녁 햇살에 비치는 한강의 잔 물결이 눈부시다.
고구려 대장간 마을
한강변을 걸으며 건너다 본 암사동 아파트 단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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