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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분노 : 탈출 32,7-14
탈출기를 쭉 해가면서 처음에 주목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오는 장면까지, 그 다음에 주목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시나이 산에 도착하기까지 중간에 갈대 바다 사건,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열가지 재앙, 그 다음에 맏아들, 파스카 이런게 중요하였다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갈대 바다 사건, 그 다음에 모세의 노래, 미르얌의 노래 등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나이 산에 도착해서 계약을 맺는 이야기,
계약이라고 하면, 우리는 계약서, 인감 도장이 떠오르지만은 구약에서는 계약을 맺을때 제사를 지낸다.
▶ 구약의 계약의 개념 : 계약을 맺을 때 제사를 지냄
따라서 시나이 산에 계약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면, 그 다음에 계약에서 중요한 것은? 법적으로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이제는 좀 얽매이는,
▶ 구약의 계약의 개념 : 법적으로 얽매임
우리 같은 경우에는 계약서가 있고 계약서를 지키지 않으면은 우리 현대에서는 공권력이 개입할 수가 있습니다.
사법적인 소송을 할 수가 있고 재판을 할 수가 있고 계약을 올바르게 이행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공권력이 있는데,
과거에는 그런 공권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그것을 보증할까요? 옛날에는 신이 그것을 보증합니다.
▶ 구약의 계약의 개념 : 신은 계약을 보증하는 역할
A라는 나라와 B라는 나라가 서로 계약을 맺을 때는 , 대부분 주종 관계의 계약이 대부분입니다. 지금까지 고대 근동에서 드러난 결과물들을 보면 동등하게 맺은 계약보다는 한 나라는 다른 나라를 보호하고 다른 나라는 힘세 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는 이런 주종 관계에 대한 계약이 많은데 그럴때도 항상 신들을 증인으로 세우게 됩니다.
따라서 증인, 증거의 역할을 무엇이 할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데 옛날 같으면은 '그대와 내가 계약을 맺은 것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돼니까..' 돌 기둥이나 그런것을 세운겁니다. 창세기에도 보면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돌기둥 하나를 세워놓았다.
계약에는 제사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구약에서 계약이라는 말을 쓸때는 계약을 자른다(제물을 자르듯이), 계약을 세운다( 돌기둥 같은 것을 세우니까)는 표현도 씁니다.
▶ 구약의 계약의 개념 : 계약의 증거로 돌기둥을 세움
"계약을 자른다(히브리식 표현)" : 계약을 맺는다는 의미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제사 음식을 나눠먹었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계약의 당사자들이 함께 식사를 합니다.
▶ 구약의 계약의 개념 : 제사를 지낸 후 계약의 당사자들끼리 식사를 함
이정도의 틀을 보이고 있고, 이제부터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중요한 문제중에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은, 계약의 백성들이 계약에 충실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을 조금 주목하게 되고 그리고 나서 계약에 필요한 기본적인 개념들, 증언, 증거, 증인 이런 역할을 하는 우리가 십계판이라고 부르는 그 증거의 판,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어떻게 보증하시나? 라는 따라서 그 계약에 관해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그 계약을 잘 지키고 있나? 라는 것이죠.
그렇게 증거 판까지 만들어 주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지킬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사실 일반적인 일은 아닙니다.
신이 인간과 계약을 맺는데, 이렇게 보증하는 증거 판까지 만들어 준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신이 자기 자신을 그 계약에 얽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것 까지 한다. 하느님께서는 지킬 의도가 있습니다. 백성은 과연 어떠한가? 지난 시간에 본 32장 시작 부분에 내용을 보면서 아! 백성은 계약을 어떻게 보면은 지키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백성 편에서 보면 조금은 변명할 여지도 있는 겁니다.
왜냐? 백성은 '우리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다.' 까지만 이해한 겁니다. 그런데 그 야훼 하느님의 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금으로 숫송아지 상을 만드는 그 장면까지를 우리가 보게 되는데, 그런데 그와 같은 장면에서 야훼 하느님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계약의 내용을 보면은 우상을 만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계약의 내용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 하느님이 백성과 계약을 맺을 때 특별히 중요한 내용중에 하나는?
다른 민족이 그들을 신을 섬기듯이, 너희가 나를 섬겨서는 안 된다. 라는 그런 어떤 차별적인 모습입니다. 우상을 섬겨서는 안되는데 , 그들이 이렇게 우상을 만들자, 거기에 대해서 하느님과 또 모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이제부터 보게 됩니다.
탈출 32,7 직역
그리고 야훼는 모세에게 말씀했다.
그냥 말했다가 아닙니다.
탈출 32,7 직역
"내려가라, 너희 민족이 타락했다.
네가 올라오게 한 이집트 땅에서"
여기서 우선 보아야 할것은? 내려가라, 하는 야훼의 명령에 조금은 재촉하는 그리고 조금은 화가난 어감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야훼는 그 민족을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민족이라고 서술을 합니다. 야훼 자신은 뒤로 빠지고 모세한테 책임을 미룹니다.
부모님들이 가끔가다가 아이가 학교에서 시험을 엉망으로 봤을때, 그러자 아빠가 엄마한테 얘기합니다. '당신 아들 왜 이래?' .....
그런데 어떤 아이가 상을 받아옵니다. 그러면 엄마가 '아휴, 나 닮아서 ..'
그런 경우의 표현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하느님인데 '너의 민족이 타락했다. 네가 올라오게 한, 이스라엘과 조금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사소한 단어의 선택에서 볼수가 있습니다.
▶ 모세의 위치는?
야훼와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위치하는데,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가 온전히 형성되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계약은 맺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완전히 일치의 상황으로 들어오지는 않은 겁니다.
예를 들어, 결혼은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편의 집에가서 살게 되는데 하지만 그 가족이 되는데 까지 약간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정말 가정의 한 사람으로서 자리잡기까지,
여기서 '타락하다' 라는 동사는 창세기 6장 홍수 사건이 있게된 신학적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그와 같은 홍수 사건을 내리셨는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런데 재밌게도 창세기 6장에서는 이 단어가? 타락했다.
히브리말 동사는 여러가지 형태로 변하게 되는데 한가지 형태에서는 '타락한다' 라고 쓰였는데 다른 형태에서는 '파멸시키다' 라는 의미도 갖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내가 이제 세상을 파멸시키겠다. 또는 파멸시키지 않겠다. 라고 얘기할 때도 똑같은 동사가 사용이 됩니다.
따라서 같은 동사가 한번은 인간의 타락을 묘사하는데 쓰이고 또 다른 한번은 하느님의 심판을 묘사하는데 쓰입니다.
하느님이 왜? 그렇게 파멸시키는가?
왜냐하면 인간이 파멸당할 만한 그와 같은 타락을 했기 때문에, 재밌게도 똑같은 동사가 사용이 됩니다.
신부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입니다만, 창세기 에서 이미 창조 사건을 시작하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죄에 두 본질이 드러납니다.
º 아담과 하와의 죄는 :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
º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죄는 : 인간을 거스르는 죄
인간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개념적으로 성경은 타락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거스르는 죄는 폭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타락과 폭력이라는 두 죄의 본질중에서 여기서는 타락!
너희 민족이 타락했다!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다!
그런데 구약 성경, 특히 오경에서는 하느님이 거슬러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겁니다.
▶ 모세 오경의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 : 다른 신을 섬김
우상에게 절하고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그와 같은 행위, 그것이 타락입니다.
탈출 32,8 직역
그들은 벗어났다. 빠르게 그 길에서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들은 만들었다.
그들에게 수송아지 상을
여기서 특이하게도 '그리고' 라는 접속사가 보이지 않고 " 그들은 벗어났다. 빠르게 .." 이 말의 의미는 그들이 그들을 위해 숫송아지 상을 만들었다는 그와 같은 의미입니다.
입문하시면서 하느님의 율법, 토라는 폭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가 가는데 차선과 비슷합니다. 여유로은 폭이 있는데 그 차선을 넘어가면 그때 부터는 법을 어기는게 됩니다. 따라서 차선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원시적인 의미에서의 유다 율법은?
종이 잘못하면 때려도 좋다! 하지만 때려서 죽이지는 마라. 이정도 까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율법이 조금더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한 뒤에는 율법의 내용이 신명기로 오면서 좀 바뀝니다.
종이 잘못하면 때려도 좋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때려서는 안 된다. 로,
다음날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때린다면 그 다음에 종은? 그 종을 풀어줘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종이 갖고있는 인권을 보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의미에서 율법에 폭이 있는 겁니다.
이것까지는 해도 좋다고 얘기했는데, 하지만 이것을 넘어가지는 말아라. 그렇게 되면은 중앙선 침범이다. 거기까지 얘기했는데 그것을 한겁니다.
그들에게 숫송아지 상, 즉 우상을 만들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우상은 야훼 하느님 상입니다. 우리가 야훼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고 만든겁니다. ' 라고 얘기하겠죠? 하지만 하느님은 그것조차도 나에게는 우상이다. 라고 얘기하시는 신학적 갈등을 이 대목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을 만드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탈출 32,8 직역
그리고 그들은
그 수송아지 상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수송아지 상에게
제사까지 지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여기서 말했다는 것은 일종의 고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여럭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계시 종교나 여러 가지 종교로..
그 중에 우리가 ,
▶ 그리스도교를 정의하는 한 가지 표현은 우리들은 고백의 종교, 입니다.
사도 신경이라는 신경이 있습니다. 믿을 교리, 그것을 우리가 미사때 합송합니다. 신경을 고백한다. 그래서 그런 신경자체를 confession이라고 합니다. 고백하는 신앙이다는 말입니다.
탈출 32,8 직역
'이들이 너의 엘로힘이다. 이스라엘
너를 올라오게 한 이집트 땅으로부터"
여기서 반복되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올라오게 한 것은 야훼인가? 아니면 모세인가? 아니면 수송아지 상인가?
그게 전부다 이 텍스트 안에서 등장합니다. 야훼는 "니가 올라오게한!" 이라고 합니다.(모세),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가(또는 상이) 올라오게 했다고 합니다. 모세는 '야훼가 올라오게 했다.' 고 얘기힙니다.
누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한 주체인가? 라는 질문이 여기에 계속해서 남고 있습니다.
구약의 관점에서 토라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타락이고 죄입니다.
시나이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은 토라를 분명히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그토록 빠르게, (계약서 맺고 집에가는 길에 계약을 어기는 겁니다) 그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8절은 강조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수송아지 상을 야훼와 동일시 했다하더라도 그들은 토라가 가르치고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납니다.
탈출 32,9 직역
그리고 야훼는 말했다. 모세에게
"나는 보았다. 이 백성을
그리고 보라, 그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9절에 나오는 표현들은 앞선 대목들을 상기합니다. 이미 탈츨 3장, 7절 9절 이런데서 야훼가 나는 보았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보았다' 라는 말은 철학적으로 알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인식했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 라는 내용으로 우리가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하는 '이 백성' 은 이미 1절에서 백성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 모세가'
탈출 32,1 직역
"왜냐하면 이 모세, 우리를 올라오게 한 그 남자
이집트 땅으로부터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무엇이 그에게 있었는지"
'이 모세' 라고 얘기하면서 '이' 라는 지시 형용사가 붙는데 약간 조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모세, 그 남자( 그자가) : 조롱의 어조
그런데 똑같은 표현을 하느님이 백성에게 사용합니다.
나는 보았다. 이 백성을 (저자들을)
그리고 보라,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더라.
여기서 뻣뻣하다 라는 표현은 완강하다와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파라오의 심장이 완강해졌다. 라는 것과 백성의 목이 뻣뻣해졌다. 라는 것은 동일한 그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고,
구약성경을 보면 '우리는 목이 뻣뻣한 백성' 이라고 띄어 썼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면 그것을 각각을 연결시켜 씁니다. 목이- 뻣뻣한- 백성,
▶ 목이 뻣뻣한 백성
(am qasheh orep)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 이스라엘을 표현함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 이스라엘을 표현함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 현실 안에서 '겸손하지 않다' 목이 뻣뻣하니까 절이 안되는 겁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그것보다는 조금더 본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말은 '주종 관계'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주인이 있고 종이 있는데 종이 목이 뻣뻣하면 안됩니다. 왜냐? 옛날에 종들은 가끔씩 짐승처럼 멍에를 매고 밭을 가는 일을 합니다. 목이 뻣뻣하게 목을 수그리지 않으니까 그 멍에를 멜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의 말을 잘듣지 않는 종입니다. 한데 여기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절한다는 의미보다는 주종관계에서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종의 모습을 이 표현이 담고 있습니다.
탈출 32,10 직역
"그리고 이제 나를 놔둬라.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게 나를 나둬라.
그리하여 나의 코가 뜨거워지도록
그들 안에서
(코가 뜨거워 진다는 것은 코가 빨개진다는 겁니다) 구약의 세계에서 코가 빨개진다는 것은 화가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들 안에서, 라고 직역하셨는데 의미는? 그들에 대해 내가 화를 낼수 있도록 나를 좀 가만 내버려 둬라. 그리고
탈출 32,10 직역
"그리고 내가 그들을 끝내버리도록"
여기서 끝내버린다는 것은 멸절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탈출 32,10 직역
"내가 너를 만들도록 큰 민족으로"
앞선 대목에서 우리는 비슷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겪으면서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는 것을 후회하시고 세상을 그런 홍수로 뒤덮어 버리는, 그러면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죽게되는, 하지만 노아를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시는 그런 대목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미 한번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두 번째는 일어날 뻔하다가 하여튼 또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재앙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는 재앙을 내리겠고 너에게는 큰 민족으로 삼겠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오 좋아요.' 하면서 박수치는게 아니라 말립니다.
그러면서 그곳에 50명의 의인부터 시작해서 10명까지 내려가는 의인의 수, 그정도의 의인만 있다면....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하느님께서 결국 그런 의인도 없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는 재앙을 맞이하고 하지만 롯은 피신시키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들은 멸망시킬것이고 너는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 라는 두 번째 대목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좀 말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이 일어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홍수 사건과 아브라함의 사건이 조금 다릅니다.
세 번째 단계가 지금의 단계입니다.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날 말리지마.' 라고 얘기하고 '내가 걔네들 다 없애 버리고 그리고 나서 너를 통해서는 마치 노아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했듯이 너를 통해서 큰 민족을 만들거야!' 라고 했을 때
모세가 아브라함처럼 다시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탈출 32,11 직역
그러자 모세는 달랬다. 야훼의 얼굴들을
코가 불타올랐는데, 코가 뜨거워 졌는데, 모세가 그것을 달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달래는 야훼는? 그의 엘로힘이다. 라고 부연설명을 합니다.
어떻게 달래느냐?
탈출 32,11 직역
"무엇을 위해 야훼여 당신의 코가
뜨거워지는가? 당신의 민족 안에서"
이것을 의역하자면은 야훼여 무엇 때문에 당신의 민족에게 그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민족은 ?
탈출 32,11 직역
'당신이 이집트 땅으로부터 나오게 한
큰 힘과 강한 손으로"
따라서 모세는 당신이 지금 크게 화를 내려고 하는 민족이 당신 민족입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화를 크게 냅니까? 당신이 그들을 이집트 땅으로부터 나오게 했는데 그렇게 큰 화를 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코가 뜨거워지면 안되겠습니다.
▶ 11절에서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한 주체는 바로 야훼임을 강조합니다.
서로의 주장들이 부딪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세인가? 야훼인가? 아니면 수송아지상인가?
탈출 32,12 직역
무엇을 위해 이집트인들이 말할 것이다.
의역하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말하게 하려고 합니까?
탈출 32,12 직역
악함 안에서 그는 그들을 나오게 했다.
여기서 그는, 야훼
그 악함이라는 것은? 야훼가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나오게 한 것은 좋은 뜻을 가지고 나오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산들에서 죽이기 위해서, 그들을 끝내기 위해서 그 땅의 표면으로부터, 그렇게 이집트인들이 말하도록 당신은 무엇 때문에 놔두려고 합니까?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야훼의 화를 입고 멸절한다면 이집트인들은 야훼를 조롱할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감히 하느님에게 명령합니다.
탈출 32,12 직역
“돌아서라. 불타오름으로부터 당신의 코의”
당신의 화를 고정하십시오. 라는 얘기고
탈출 32,12 직역
“그리고 후회하라. 그 악함에 대해
당신 백성을 향한”
당신이 그렇게 화가나서 무언가를 의도하고 있는데 그 악함을 후회하여라. 라는, 악함을 거두어 들여라. 라는 뜻입니다.
▶비슷하게 모세가 야훼를 설득하는 수사법이 구약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민수 14,13-16 ; 신명 9,28; 여호 7장 ; 에제 20,36장; 요엘 2장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설득법입니다. 뭣때문에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조롱하도록 놔두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화내지 마십시오.
우리식으로 얘기하자면 “왜? 사람들 보는데서 그래?” 이런 표현일 것 같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설득하는 모세의 말, 모세가 야훼하느님을 진정시키는 그와 같은 방법의 바탕에는 고대 근동의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평판(reputation)이 중요합니다. 어떤 평판을 얻느냐? 제일 좋은게 뭐냐하면 남들이 나를 '복되다 하리라.' 는 것이 최고의 평판입니다.
▶고대의 최고의 평판
'남이 나를 복되게 하리라.' (하느님께 복을 받은 것)
그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복 받았어. 이게 최고의 평판입니다.
구약에서도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창세 21,22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함께 계시는 구려."
이런식의 표현이 굉장히 좋은 평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좋은 평판은 "아! 그분 참 성인처럼 살아."이렇게 얘기하는 것. 불교에서도 '그 사람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야.' 그런 좋은 평판을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실 요즘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기업 마케팅도 기업의 이미지를 만드는, 아 그 기업은 착한 기업이야. 그런것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의 평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평판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복음에 와서도 비슷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마르 8,27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
탈출 32,13 직역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들은 모두 당신의 종들인데
그들에 대해서 기억하십시오.
조금 우리가 기대했던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사악에 대해서 그리고 야곱에 대해서 라는게 우리가 기대하는 표현인데, 야곱이라는 이름대신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에 대해서 기억하느냐? 단지 그 사람들에 대해서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탈출 32,13 직역
당신이 맹세했던 그들에 대해
당신 안에서"
탈출 32,13 직역
'나는 많아지게 하겠다.
너희들의 후손을 하늘의 별들만큼
그리고 내게 말했던 이 온 땅은 내가 주겠다.
너희들의 후손에게
그리고 그들은 소유할 것이다. 영원까지."
당신이 맹세했던 그들에 대해서 기억해라. 그리고 당신이 말씀했던, 당신의 종들에게 ....우리가 이미 창세기에서 알고 있는 표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신이 맹세했던 그들에 대해
당신 안에서"
▶ 당신 안에서 맹세했다는 표현을 우리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① 당신 자신에게 맹세함
② 당신 자신을 걸고 맹세함
이게 우리한테는 익숙하지 않은 표현인데 맹세라는 게, 법적인 효력을 고대 근동에서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떤 장소에 있었는데 그 장소에서 무언가가 없어졌고 사람들이 다 확실한 증거나 증인도 없지만 그 사람이 그것을 훔쳤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재판이 열립니다. 많은 정황적인 증거로 봤을 때 그가 그것를 훔친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재판으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을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데 나는 그것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라고 선언을 하면 거기에서 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대신에 그가 만약 그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다면 그때부터는 신의 분노를 입게 된다는 그런 재판의 차원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걸고 또는 자기 자신에게, 왜냐하면 하느님 스스로가 신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맹세를 했던 그런 의미로 이 표현을 알아 듣게 됩니다.
탈출 32,14 직역
그러자 야훼는 후회했다. 그 악함에 대해
그가 말씀했던 그의 백성에게 하겠다고
그 악함이란? 백성들을 다 멸절시키겠다는 것
흥미롭습니다. 모세의 명령에 야훼가 따릅니다.
명령이라서 그렇지 사실 모세의 어감은 탄원하자, 하느님께 빌자, 야훼 하느님이 그의 어떤 탄원을 받아 들이는 ,
이렇게 백성을 끝내버리려하던 야훼의 분노는 모세에 의해서 변화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 대목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그때는 '니 백성이 아니라, 그때는 그의 백성에게,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야훼의 모습.
중간에 한부분을 함께 봅니다.
민수 14,11-12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는 대상은 모세입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일으키는 것을 하느님은 자기 자신에게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32장과 비슷하게 응답하십니다. 이 백성에게서 희망을 볼 수가 없구나. 그들을 모두 병걸려서 죽게 한 다음에 모세 너를 통해서 내가 큰 민족을 만들겠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 표현하신 겁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설득하는 부분입니다.
모세가 야훼를 설득하고 있는 부분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탈출32장에서는
아!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끌어냈는데 그게 좋은 뜻이 아니라 악한 뜻이었구나. 광야에서 다 죽게 하려고 그들을 끌어내신 거였구나. 라는게 조롱의 내용이라면,
여기서는 조롱의 내용이 '하느님의 무능력' 입니다. 모세가 신명 9장에서는 이런 설득을 만나게 됩니다..
구약에서 드물게 하느님을 설득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와 사무엘입니다.
모세와 사무엘
그들이 탄원하자, 설혹 모세와 사무엘이 나한테 신청하더라도 '이 결정 만큼은 번복하지 않겠다.
여기32장에서는
모세와 사무엘이 그렇게 하더라도 나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다. 라는 말씀을 합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마음을 돌리적이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와서 딸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유다 사람들을 위해서 우선 일을해야 할 것 같다고 하니, 여인이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느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자신을 낮추니,
예수님이 그 여인의 딸을 낫게 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신부님은 그 대목을 보면서 인간적으로는 '아! 부모의 사랑은 하느님까지도 움직이는 구나.' 라고 느끼셨다고 합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들의 사랑은 정말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임종을 앞둔 환자들 병원에서 도와 드린적이 있었는데, 많은 분들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프면은 하느님 나라로 떠나십니다. 그런데 엄마들은 자식을 놔두고 눈을 감지를 못합니다.
특히나 아이가 어린 엄마들은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것을 여러번 보게 되셨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모세라는 인물에 대해서 생각해 볼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합니다. 그렇다 보니 모세가 하느님이 다른 이들 다 없애고 모세를 통해 큰 민족을 만든다고 하였을 때도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청하는 아브라함 처럼 백성을 위해서 탄원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세의 겸손에 대해서 민수12,3 은
º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
모세가 하느님께 백성을 위해서 간청하는 모습을 염두해둔 표현이 민수12장에서 얘기하는 그 표현과 연결 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