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계의 풍광이 예일레라
▷ 세연정
▷ 세연지
▷ 낙서제
▷ 동천석실
▷ 전설
부용동
▽ 선계의 풍광이 예일레라
부용동은 중국의 부용성이며
옛날 꿈꾸던바 그곳 전경 얻었네
세인들은 신선이 산다는 선도를 알지 못하고
다만 기화와 요초만 찾고 있네
형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지어 진 곳. 고산은 부용동을 신선이 노닌다는 부용성에 비유하며 선경을 얻었노라 노래했다. 선계의 풍광을 옮겨 오고 싶어서였을까? 스스로 신선이 되고자 했음일까? 풀 한 포기 바위돌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한 고산은 부용동 구석구석 발길 닿는 곳마다 정자를 놓고 연못을 피며 거대한 정원을 조성하였다. 부용동 전체를 조경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고산 사후 수려했던 정원들은 대부분이 훼손되고 무성한 잡초속에 주춧돌만이 옛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부용동 정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고산이 시를 읊으며 자연을 노래하던 놀이공간인 세연정 주변과 거처와 살림집이 있던 낙서제 주변 그리고 맞은 편 산중턱에 자리한 휴식공간인 동천석실이다.
▽ 노송 우거진 부용동의 관문-세연정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아서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오우가 중)
오우가의 고향 세연정. 담양 소쇄원과 함께 조선시대 인공정원의 백미로 꼽히는 세연정은 부용동 정원중 가장 수려한 곳이다.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에서 세연이라 이름지어 졌단다.
고산의 유희장소였던 세연정은 부용동 첫들머리에 자리하고 있다. 선별리 선착장에서 오른쪽 도로를 따라 도보로 20분 거리. 입구에 들어서면 연못 주위로 나이든 소나무가 늘어져 있고 동백나무, 차나무등 상록활엽수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그 사이로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 석대위에 단아한 모습의 정자가 보인다. 세연정이다. 세연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정자이다. 중앙에는 온돌 방이 있고 사방으로 창살문이 있으며 문 밖으로는 이중의 널판문이 있다. 마루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시선이 가는 곳마다 색다른 세연정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래서 였을까 고산은 세연정의 사방에 각각의 편액을 걸었다. 중앙에는 세연정 남쪽에는 낙기란. 동쪽에는 호광루. 서쪽에는 동하각이라고...
▽ 무희의 춤사위는 물 그림자로-세연지
낭랑한 무동들의 노래소리 울려퍼질 때 옥소암 너풀거리는 무희의 춤사위는 세연지 물 그림자로 떠오르고... 고산이 배를 띄우고 무동들이 노래하는 어부사시사를 들으며 옥소암에서 춤추는 무희의 몸놀림을 물 그림자를 통해 바라보았던 세연지는 계류를 막아서 만든 연못이다. 이곳에는 자연을 경영한 고산의 지혜가 곳곳에 숨어 있다. 계류를 막아서 만든 연못이다. 이곳에는 자연을 경영한 고산의 지혜가 곳곳에 숨어 있다. 계류를 막은 판석보(일병 굴뚝다리)는 양쪽에 벽처럼 판석을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운 다음 판석으로 위에 뚜껑을 덮었다. 고정을 위해 구멍을 뚫어 돌촉을 박아 놓기도 했다. 세연지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연못 주위와 바위를 감도는 자연스러 곡선을 연출하는 판석보는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비가 오면 폭포가 되기도 한단다. 이러한 석조보는 우리나라 조원유적중 이곳의 판석보가 유일하단다.
세연지는 바닥이 암반으로 되어 있어 물빛이 약간 푸른색을 띤다. 수심은 대략 1.2미터. 자연적인 곡선미와 함께 연못 가득한 수련사이로 드러난 크고 작은 바위들(칠암)이 운치를 더해주는데 칠암에 걸터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기도 했던 고산은 칠암중 혹약암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용처럼 꿈틀거리는 물 속의 바위
어찌하여 와룡암을 닮았는고
나는 제갈공명의 상을 그려
이 연못 곁에 사당을 세우고저
흑약암이란 칠암중 맏형 격으로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한 모습에서 이름지어졌단다.
▽주춧돌이 전하는 옛이야기- 낙서제
보길도의 주산 격자봉아래 자리한 낙서제는 고산이 보길도에 안착하여 제일먼저 터를 잡은 곳이다. 세연정에서 도보로 30여분거리에 있다. 세연정이 유희공간이라면 낙서제는 생활공간이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주춧돌과 돌담만이 그 흔적을 말하고 있지만 고산 당시에는 곡수당과 무민당등 여러채의 건물이 있었단다. 낙서재 뒤편에는 소은병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소은병에는 삼각형의 홈이 패여 있어 빗물이 고이면 바위벽을 타고 흘러내리게 되어있다. 소은병이란 이름은 주자가 경영한 중국 복건성 숭안현 무이산에 있는 대은봉 건너편의 봉우리 이름인데, 주자를 흠모한 고산이 산속에 은둔해 학문을 몰두 한다는 뜻으로 이름 붙인 것이란다. 이곳에서 고산이 달구경을 하던 거북 보양의 바위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땅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귀암에서 올라 요요한 달을 바라보며 고산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단지 4령에 참여함만 알뿐
뜻 지킴이 돌처럼 단단함을 뉘라서 알랴
너에게 복거한 때로부터
저녁이면 내 달구경을 즐리리라
▽ 신선이 소요하던 부용의 절승-동천석실
석실의 부엌에선 차 끓이는 연기나니
구름인 듯 안개 인 듯 꽃가에 맴돈다
바람따라 날아가다 선돌에 도로 남고
달빛에 실려가다 냇물 위에 머무네
(석실모연중)
이름모를 시인이 노래한 동천석실의 선경이다.
동천석실은 낙서제에서 마주보이는 앞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동백나무등 상록활엽수가 숲터널을 이룬 길을 따라 천연의 바위계단을 10여분 오르면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바위위에 요요하게 자리잡은 동천석실이 있다. 동천석실이란 이름은 신선이 사는 곳을 동천복지라고 하는데서 유래했단다. 석실로 오르는 오솔길 옆에는 삼각형의 연못이 있다. 연못에서 석실로 오르는 돌계단 사이에는 작은 다리가 놓였는데 희황교라 이름지어졌다. 희황은 중국의 황제 복희씨를 말한단다. 돌계단은 여덟 계단으로 한사람이 겨우 오를 정도로 협소하다.
석실은 정사각형의 한 칸 짜리 정자이다. 집터는 좁고 주위를 바위가 빙 둘러쳐 있다. 앞과 옆은 낭떠러지로 마치 요새나 전망대 같은 느낌을 준다. 고산은 여기서 차를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며 독서를 즐기곤 했단다.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는 이곳에서는 부용동의 전경과 함께 낙서제 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 천제의 노여움 산 삼형제 바위
부용리 뒷산, 자그마한 연못가에 나란히 서 있는 세 개의 바위에 얽힌 이야기다.
옛날 부용리에 나이 30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더벅머리 노총각이 살고 있었단다. 어느날 점장이 노파를 찾아간 총각은 언제나 장가를 갈 수 있겠는지 물어보았단다. 점쟁이 노파는 총각에게 아무날 아무시에 여자옷 한 벌을 준비해 부용동 연못가 바위틈에 숨어 있으면 천산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할 것이라며 이때 옷 한 벌을 감추어 두라고 하였단다. 그리고 선녀가 옷이 없어 떠나지 못할 때 가지고 간 옷을 내어주면 내어주면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 자식 넷을 낳기 전에는 감춰둔 옷을 절대 내놓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노파가 알려준 시가에 연못을 찾아간 총각은 선녀의 옷을 숨겼고 마침내 선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 꿈같은 시간이 흘러 아들 셋을 낳은 총각은 어느날 선녀에게 지난 일들을 이야기 했단다. 말없이 듣고 있던 선녀는 자기의 옷을 한번만 보여달라고 애원을 했고 총각은 점쟁이 노파의 당부를 잊고 선녀에게 옷을 건네주고 말았단다. 그러자 선녀는 그 옷을 입고 아들셋을 데리고 연못가로 가서 같이 천상으로 올라가자고 했단다. 그러나 아들들 아버지를 혼자두고 갈 수 없다고 하자 선녀는 혼자 천상으로 올라갔단다. 천상에 올라간 선녀는 그 동안의 일을 옥황상제에게 아뢰었고 크게 노한 옥황상제는 총각에게는 벼락을 내리겠고 세 아들은 홍수를 내려 고기밥을 만들겠다고 했단다. 선녀가 제발 아들들을 고기밥만은 되게 하지 말아달라고 울면서 애원하자 상제는 마음을 돌려 세 아들을 바위로 만들어 연못가에 세워놓았단다. 그때부터 연못가에는 전에 없던 바위 세 개가 생겨났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