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고각하照顧脚下 ②
가족이 있는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졌으되 또 모든 것에 집착함 없이 살 수 있다면
참 화장세계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무소유無所有’란 하나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한 곳에도 집착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집착이 있으면 ‘나’로 존재하게 되고 집착이 없으면 ‘나 없이’
존재하게 됩니다. 바뀐 것은 집착뿐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래如來는 “진여眞如 그대로 오신 분”이요,
선서善逝는 “진여眞如 그대로 가신 분”입니다.
『반야심경』에는 “나지도 죽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중생의 눈에는 오직 몸 밖에 보이지 않으니
태어나고 죽음이 있지만, 진여의 세계에서는 사람들 각각의 몸은 물로 사람들
각각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무수 번뇌의 생각들조차 화엄 법계의 그러한
연기緣起일 뿐이라고 봅니다.
송나라 때의 야보도천 스님의 게송이 전해집니다.
“젊어서부터 돌아다녀 먼 곳까지 익숙하니
몇 번이나 형악산을 돌고 소상강을 건넜던가.
하루아침에 고향길을 밟으니
비로소 객지에서 보낸 세월이 길었던 것을 알았네.”
미혹의 세계에서 살다가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을 귀향에 비유했습니다.
야보도천 스님께서 깨닫고 보니 깨달은 자리가 바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그 자신의 고향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깨닫지 못한 삶은 아무리 영화를 누리며
화려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고생이 극심한 객지요, 나그넷길에 불과합니다.
끊임없이 밖을 향하고 끊임없이 원하고 갈망하던 그 집착뿐이던 ‘내가’ 마침내
고향에 이르러 안과 밖이 없으며, 너와 내가 없으며,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이 없는
그 무아無我의 행복을 노래하는 게송입니다.
사복이 띠풀을 뽑아 어머니와 함께 들어간 그 자리가 바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이
없는 자리라면 그 자리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현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자리가 여래如來요, 이 자리가 선서善逝일 것입니다.
이 자리가 온 곳이요, 이 자리가 간 곳일 것입니다. 진여 열반의 세계가 띠풀 한 움큼
뽑아내면 있는 자리요, 한 움큼의 띠풀을 뽑지 못해서 우리들의 싸움은 오늘도 내일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에서는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각명 선사에게 어느 승려가 물었습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고각하照顧脚下, 그대가 서 있는 자리를 살펴라.”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이 자리! 그렇습니다. 지금 나의 마음에서 한 치도 떠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번뇌로 살아가고
또 힘들어하는지 무엇을 탐내고 무엇에 집착해 괴로워하는지,
『삼국유사』에서는 너무 쉽게 그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띠풀 한 움큼 뽑으면 너의 발밑이 바로 그 화장세계華藏世界니라.”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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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如來는 “진여眞如 그대로 오신 분”이요,
선서善逝는 “진여眞如 그대로 가신 분”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고각하照顧脚下, 그대가 서 있는 자리를 살펴라.”
고맙습니다_()()()_
幸福찾기 111 - 第9講 本來無一物 (4. 照顧脚下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