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드레스큐어님의 세 가지 질문 중에서 세 번째 질문에 답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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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 번쩨의 질문인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님이 궁금해 하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TULIP'으로 불려지는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과 함께 칼빈주의 5대교리[또는 칼빈주의 5대강령]의 하나로서 칼빈주의 신학의 기본원리로 이해되어지며 역사적 전통을 잇는 개혁교회의 신앙을 이끌어온 중심 신학 사상이기도 합니다. 칼빈주의 신학 사상은 하나님 중심 사상(God Centered), 성경 중심 사상(Scripture Centered),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God's Absolute Sovereignty)으로 집약되는데 이 신학 사상을 뚜렷하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칼빈주의 5대교리입니다.
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예정론을 반대하던 화란신학교 교수인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가 죽은 뒤, 소위 그의 신학 사상을 좇을 뿐만 아니라 이를 수호하고자 하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Arminians)이라고 알려진 추종자들이 당시 개혁교회들에 의해 체계화된 성경의 교리적 가르침에 항의(抗議)하여서 자신들 나름대로의 교리적 입장을 '자유의지'(Free will),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보편적 속죄(Universal Atonement), 저항할 수 있는 은혜(Obstructabke Grace), 은혜의 상실(Falling from Grace), 이 다섯 가지로 요약하여 화란 국회에 제출함으로써 표명한 것에 대해서 1618년에 화란교회의 총회가 이를 성경의 빛에 의해 검초하기 위하여서 돌트(Dort)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7개월 동안 154회에 걸쳐 회의를 거듭한 끝에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5대교리는 성경에 위반되는 것으로 확정하고 이를 이교적인 것으로 선포하는 동시에 그동안 논의되었던 그 문제들에 관한 칼빈주의적 가르침을 천명하기 위해 이를 다섯 가지로 요점 정리하여서 칼빈주의 5대교리로 채택하고 이를 성경과 일치한 것으로 발표함으로써 교회적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칼빈주의 5대교리의 하나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은혜의 상실'(Falling from Grace), 곧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릴 수 있다며 은혜로부터의 타락[상실]을 가르치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베푼 사람을 결코 그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그와 함께 하여 그의 믿음을 이끌어 가심으로써 그의 구원을 지키신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구원을 영원히 보장하신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한 구원의 은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성도는 자신이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는 것인 한편 성도의 구원이 보존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서 성도가 주께 가진 믿음을 끝까지 인내하도록 그의 삶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여서 도우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가지신 영원한 작정과 그에 따른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예정에 의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님은 다음과 같이 궁금해 하였습니다. "성도의 견인에 관한 건데.....히브리서 6장에 보면...마치..뉘양스가 아닌거 같아서..."하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6장을 보면서 성도의 견인을 말하는 분위기[가르침]가 아닌 것 같이 여겨지고 있는 것으로 님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히브리서 6장 이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히브리서를 기록한 성경 기자[히브리서를 쓴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본인은 사도 바울이라고 확신한다]는 1장부터 4장 13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아들로 우리에게 임하셨고 또한 말씀하셨다"는 선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서 '천사보다 뛰어나신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면서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고 한 후에, '모세보다 우월하신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면서 "믿음을 화합하여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4장 14절부터 7장 28절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믿는 도리이신 큰 대제사장'으로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수행의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6장은 이러한 이해에 따른 가운데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히브리서 6장 중 1-8절에서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도에 의해서 제반 은사를 맛보았으면서도 끝내 타락하여서야 되겠는가 라는 뉘앙스로 인해서 님은 혼란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서 4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는 말씀까지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표현들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은혜의 상실[타락]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히브리서 4장 1절의 경우는 지금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부터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구절은 결코 구원의 은혜의 상실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유로 해서 그들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표면적 유대인으로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보증은 아니라는 것이죠. 약속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이면적 유대인, 곧 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여기서 이면적 유대인이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알겠죠? 사실 히브리서 4장 5-6절에 이르게 되면 거기서는 안식에 들어갈 남은 자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도 전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증된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의미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 1-8절인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는 말씀은 히브리서 5장 11-14절에서 지적하였던 사실에 근거하여서 하고 있는 권면입니다. 곧 오래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제는 남을 가르칠 수 있을 만도 한데 아직도 하나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는 형편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단단한 음식을 먹고 하나님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에 있는 성장한 그리스도인으로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고 있는 권면인 것입니다. 이 권면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이제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그리스도교의 초보 진리)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와 이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나열된 것들은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 말한 '하나님 말씀의 초보'를 해석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해서 존재하였던 구약 시대 때의 계시 일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의 계시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 지식들 중에서의 가장 기본되는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님이 의문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 신앙의 진리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교의 초보 진리의 역할을 했던 것인데 그리스도의 그림자적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였던 각종 제사 의식적인 신앙에 머물지 말고 이것이 지향하고 있었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데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리스도 안에로 들어와 있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소유할 것이 아닌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버려야 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여섯 가지 열거했습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그런 후에 이것들의 터를 다시는 닦지 말고 완전한데로 나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여섯 가지는 하나님 말씀의 초보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그리스도교의 초보 진리]로써 버리도록 요구되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거듭 말하거니와 이것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신앙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진 계시의 진리의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적 개념들 안에서 본래의 제 뜻을 찾지 못하고 왜곡되고 있는 지극히 유대주의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되지 못하고 여전히 유대주의적 전통 안에서만 생각되고 거기에 매여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의 참 뜻은 '죽은 것에서 나온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적 의식 안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쓸 데가 없어서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붙잡으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돌아서야 할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리키는데 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한 가운데 되어지는 신앙을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적극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을 말합니다만 정작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본의는 외면하고 생명 없는 죽은 것만 붙들었습니다. 따라서 이것도 버려야 할 목록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세례들'을 버려야 할 목록으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례들은 오늘날 예수님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세례와 또한 교회가 베풀고 있는 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세례 개념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례가 단수가 아닌 복수인 '세례들'로 말해지고 있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례들은 세례(洗禮)가 아닌 '여러 가지 씻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의 씻는 의식들을 말하는 것인데 보다 정확한 의미는 '세정식'(洗淨式)입니다. 정결 의식으로 씻는 행위를 하는 것이죠. 세례에 있어서 유대교의 개념이 그렇습니다. 기독교가 수세자에게 임한 죄사함의 사실에 두고서 세례를 베푼다고 하면 유대교는 수세자가 죄를 회개하는 사실에 두고서 세례를 행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교는 죄를 없애는 행위적인 의식으로 세례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버려야 할 목록입니다.
그리고 '안수'를 버려야 할 목록으로 말했습니다. 구약 시대에서 안수는 모세 율법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안수는 희생제물 위에 손을 얹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약 시대에서는 제사 의식과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스라엘을 지도할 자를 세우는 것에서 행하여졌습니다. 여호수아와 레위인에게 안수가 행해진 것은 그래서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는 것을 통하여서 자기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능력이 여호수아에게 계승되었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레위인들은 백성들에 의하여 안수받는 것을 통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책임을 감당할 자들로 세워졌습니다. 레위인은 속죄 제물에 안수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속죄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또한 여호와께 받아들여져서 거룩해졌습니다. 신약 시대에서는 안수가 좀 더 다양하게 행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그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진 것을 나타내시는 기도적 의미에서, 또한 어린아이가 나아오는 것을 용납하실 때 그 아이를 받으시는 것으로 안수가 행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의 확장과 관련하여서 파송자를 세울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그 일을 하나님의 선한 뜻 안에서 이루어 가실 것을 기원하고 은혜를 구함으로 하였으며, 교회의 사역자를 비롯하여서 직분자들을 세우는 것과 관련하여서 안수가 행하여졌습니다. 이것 외에도 더 있겠으나, 이런 안수가 이것이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에 의해서 행하여지지 않고 인간의 권위 의식에 의해서 행하여지거나 마치 인간이 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행하여지는 등 잘못 사용되고 있기에 이것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므로 버리라는 목록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을 다시는 닦지 말아야 할 터의 목록으로 말하였습니다. 이는 앞서의 것들에서 알 수 있었듯이 이제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 안에서 갖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였을까요? 유대인들 중에서 일단의 무리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초대 교회의 하나인 고린도교회에서도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어서 교회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반면에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해도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있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서는 그분 안에서 소망되는 것으로서 이 위에서 믿음은 더욱 견고히 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기에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을 버리라'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하고 있는 말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결코 공허한 이야기거리가 아닙니다. 죽은 자의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확실하게 입증된 것인데 여기에 또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즉 언제까지 죽은 자의 부활의 터를 닦고 또 닦고 해야 다시는 닦지 않아도 되는 신앙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게 입증된 것이니 이 부활의 확신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심판'의 터를 다시는 닦지 말아야 할 목록으로 말하였습니다. 영원한 심판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갖는 확실성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인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일을 하셨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받아 소유한 이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소유한 것이며 또한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하여서 그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그런 영원한 심판의 진리를 "그리스도를 믿으면 과연 영원한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냐? 또는 아니냐?"하는 것으로 갑론을박하며 논쟁하고 계속해서 그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지극히 유아적인 것입니다. 이미 영원한 심판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희생에 의한 헌제사역에서 온 세상에 나타내신 것으로서 그에 대한 믿음에 서 있는 사람은 이것에 대해서도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즉 이것을 가르침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에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3-6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어한 것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여전히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이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가를 알게 해 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진리를 아는 빛을 받았기 때문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아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기뻐하였으며 성령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모습을 띠기도 하였으며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제공되어지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기도 하고 장차 다가올 내세의 세계의 힘을 강하게 느끼기도 하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지 않고 게속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린다면 다시는 주게 돌아설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복음의 빛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서 이런 저런 은사를 경험하였을지라도 이 모든 경험은 중생한 사실에서 겪는 것이 아닌 비중생의 상태에서 겪는 것에서 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한 사실로 일시적으로 신자의 모습으로 있으면서 이런 저런 은사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타락한다고 하면, 즉 결국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부인한다고 하면 다시는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주께 돌아설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셈이어서 어떤 회개로도 새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서, 본문의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성령 훼방죄'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사실이 너무나도 뚜렷하고 그래서 부인할 수 없이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는 사실을 경험하면서도 불구하고 유대교로 있으면서 여전히 옛언약 아래 놓여 있으면서 새언약에로 나아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런 자들은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실을 다음과 같은 대비적인 말로 하였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7-8절). 무슨 말입니까? 밭에 비가 넉넉하게 충분히 내려 농부가 추수기에 많은 곡식을 수확하여 들였다면 그 밭은 하나님의 복을 경험한 것이지만 만일 밭이 가시나무와 엉겅퀴로 뒤덮인다면 그 밭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불에 태워지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심으로 은혜의 해[年]를 임하게 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고 있다면 의당 여기에 합당한 곡식을 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 합당한 모습을 띠어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옛언약 아래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붙듦으로써 여기서 나오는 가시나무와 엉겅퀴만을 내고 있다면 여기에 주어질 것은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제 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6장 1-8절은 '성도의 견인'에 의문을 품을 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뉘앙스를 단 얼마라도 풍기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히브리서 6장 1-8절은 교회 안에서 여전히 유대주의적 신앙관을 가진 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에 설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굳건히 하십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2절). 무슨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면,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은 사람들을 너희가 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본 받으라"는 것에서입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은혜로부터의 상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에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온갖 은혜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들어오지 않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성도의 견인'과 대항하는 교리로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비복음적인 신앙이요 다른 복음으로서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인지요!.
님이여!, 성도의 견인을 비롯하여서 다른 칼빈주의 5대교리도 잘 배워서 바른 신앙에 견고히 잘 서나갈 수 있기를 구하며, 또한 성경에 해밝은 지식을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께로부터 받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알게 해 주시고 있는 바 그 참된 뜻을 잘 이해하여서 참된 신앙에 잘 서나갈 수 있기를 주님께 구합니다.
첫댓글 오늘 날 제임스 던과 E. P 샌더스와 같은 바울신학의 흐름에서는 인간의 전적타락을 인정하지 않은 듯합니다. 마치 칭의와 성화를 한 원으로 놓고 구원을 설명하는 듯 합니다. 난해 구절로 알려진 히 6장 말씀을 선명하게 풀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
정말..감사합니다..너무 모르기에 자주 드르겠습니다...^^ 평안하세요....